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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크시론

온 세상이 그 생기로 가득해지리라

[유크시론 162호] 발행인 이창배 목사

이 사순절의 절기를 보내며 계속 자문자답을 거듭해 보길 소망한다. 그리해서 그 동안 내 안에서 깊숙히 묻어둔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 찾아지고, 그분이 사시고, 나는 없어지기를 소망한다.

봄기운이 한창 피어나는 것을 본다. 진작 화창했었다면 좋았었을 햇살이 그 동안은 어디로갔다 이제야 돌아온 건가, 그래도 반갑지만 일말 아쉬움이 드는 좋은 날씨가 지속된다. 잠시 볼 일이 있어서 은행엘 갔다가 주차장 주변에 펼쳐진 흰 야샹화 군락지를 발견하고는 마음에 설랬다.
본능적이라고 할까, 핸드폰 카메라를 빼들고 이리저리 사진을 찍고 있었더니 지나던 독일 노신사 부부가 신기해 보이는지 그 자리에서 멈춰 서서는 빙긋한 웃음을 띄우고 바라본다. 아마도 필자를 이상하게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어린 아이도, 청년도 아니고, 어찌됐던 반백이 넘은 동양사람이 길가 공원에 종기종기 피어난 야생화에 정신이 팔려서 사진을 찍는다고 부산을 떠는 모습이다보니 자못 궁금했겠다 싶었다. 그래도 괜찮다. 남이야 보던지 안 보던지 그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내 마음은 사진앨범에 저장되는 그 싱싱한 봄꽃의 매력에 빠져서 모처럼 아이같은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화창한 햇살이 겨울내내 그 색이 죽지 않은 잔디에 내려앉고, 수많은 잔디의 틈사귀에 삐죽삐죽 돋아나온 꽃망울들에서 노란색, 보라색, 분홍색의 꽃을 터뜨린다.  햇살에 실린 따스한 기운에 금새 반응을 일으키는 자연의 오묘함은 무어라 다 말할 수 있으랴. 그러고보면 사실 꽤 오랜시간 동안 이런 생명의 감동을 놓치고 살아온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늦기야 했다지만, 이런 감각을 되새기고 나니까 문득 마음에서 기쁨이 샘솟듯 올라오는 것이다. 허, 그참 이상했다. 그저 그날에 본 것이라곤 흔한 들판에 때가 되면 피고 질 꽃이요, 풀이요, 그 이름조차도 기억치 못할 야생화에 불과할 것인데, 그런데 내 마음이 거기에 반응을 한 것이고 보니 이상한 일이었다. 마치 오래된 금제에서 풀린 느낌처럼 난 내 영혼이 그렇게 생기에 대해서, 갓 태어나는 생명의 싱그러움에 대해서 춤을 추듯 좋아하는 감정을 느꼈던 것이다.

나는 침전되어 살았었던가?

최근에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매일 매일 40일 동안을 말씀을 읽고 묵상을 나누고 있는 중이다. 처음부터 어떤 대단한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먼저는 나 자신이 주님의 행적을 따르면서 은혜를 받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기 때문이다.

사실은 이미 지난해 5월에 성지인 이스라엘 땅을 밝고 왔다. 짧지만 이곳 저곳 주님과 관련된 장소들을 다녀보았고, 그 사진들도 상당 수 찍어 보관하고 있다. 그것을 통해 올해 사순절 기간을 통해서 우리 교우들과 짧지만 보고 느꼈던 점들을 테마로 나누어 매일매일 소셜네트워크를 통해서 전달해 주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런데 막상 일을 시작해 놓고 보니 여기저기 생각치도 않았던 부분들에서 헛점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미리 준비한다고 하는 차원에서는 이미 준비가 됐다고 여겼던 참인데, 말씀을 깊이 읽고 또 읽으면서 그 말씀을 짚어보니, 준비된 것은 커녕 제대로 쓸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다는 패닉현상이 빠지게 됐던 것이다. 그러고보니 얼마나 우스운 노릇인가? 이렇게 나 자신을 몰라도 한참을 모른다는 것을 또다시 깨닫게 된 것이다.

진정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고정되어 있는 사고와 사물이 아닌 것을 느낀다. 말씀이 살아있고, 활동력이 있는 생명이란 진리는 역시 생명을 통해 반응이 일어나게 되는 일이고보니 어리석게도 고착화 된 자료 데이터와 현장 사진이란 증명만으로 좋아라했던 나의 모습이 초라해지기는 소금이 쓸데가 없어 밖에 내다버려야 할 지경까지 이르고만 게 아닐까 하는 근심에까지 이르게 했던 참이다. 수없이 버리고 또 버려야 할 자만과 교만, 그런데 아직도 내게는 치워야할 불필요한 겉치례적 요소들이 너무도 많아 보인다.

지난 주말부터는 거의 혼미상태에 이를만큼 지독한 독감에 걸려서 끙끙거리며 살고있다. 지금까지도 온전치 못하다. 참으로 독한 감기기운이 나를 묶고 있을 때 , 내 힘과 의지로는 도저히 일어날수도 먹을수도 없을 것 같았는데 그런데 보니 매일 사순절의 말씀읽기와 묵상을 나누고 있고, 교회 금요성경공부 모임과 주일예배와 설교, 그리고 지금 유크 편집의 마무리까지도 하고 있다는 게 기적같아 보인다. 그게 사실이지 않는가?

나는 없고 주님만 있다.

지난 겨울의 지리하고도 음습한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 만으로도 행복하다. 아침에 일어나나 낮시간을 보내든 하늘은 언제나 두툼한 커튼으로 막혀진 듯 한 답답함, 몇 날이나 해를 보았는지, 보지 못한 것보다 본 횟수가 손꼽을 만큼 적은 이 기후 속에서 봄을 맞이하고, 햇빛을 적잖히 즐길 수 있으니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는가?

어떤 목회자는 자신의 삶을 곰곰히 되돌아보고서 자신이 왜 예수를 믿게 됐는지? 에 대해서 내린 결론이 “행복해지기 위해서” 라고 했다. 그 말이 동감이 된다. 왜? 굳이 신앙생활을 해야만 돼? 이렇게 묻는 이가 있거든 역시 들려줄 말이 “행복해지기 위해서야” 랄 정도는 되어야 하겠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몇달 가운데 햇빛을 못 본 체 산 우울한 경험만으로도 햇빛이 그렇게 그립고 반갑건만, 왜? 예수님은 안 반가울까? 그런 질문도 필요하다. 여기저기서 신앙의 위기라느니, 교회의 위기라느니 하는 소리들이 들려진다. 그렇다고 그 소리들이 결코 허무맹랑한 소리들만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의 위기”가 아닌 것은 더욱 분명하다. 결국은 흔들리는 것은 나 자신이지 예수님은 아니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더욱 믿음의 대상을 재정립하지 않으면 안된다.

동면의 긴 시간을 보내고, 따스한 기운과 함께 싹을 틔우고, 꽃망울을 터뜨리는 각가지 들꽃들의 아름다움에도 내 영혼이 반응하며 기뻐하거든, 그런데 왜 우리 영혼의 주인이시며, 생명의 주가 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자기를 버리심, 십자가의 길과 죽으심, 무덤에 갇히심과 부활하시는 그 영광의 순간순간들에 대해서 애써 무감각해 지려고 하는지? 이 사순절의 절기를 보내며 계속 자문자답을 거듭해 보길 소망한다. 그리해서 그 동안 내 안에서 깊숙히 묻어둔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 찾아지고, 그분이 사시고, 나는 없어지기를 소망한다. 그래야 생기를 되찾는다.

내가 찾으면, 교회도 찾아질 것이요, 온 세상이 그 생기로 가득해지리라.

이달의 말씀 ㅣ 에스겔 37:5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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