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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마틴 루터 킹 목사의 행동하는 신앙에 비춰 본 아쉬운 우리의 신앙

[프랑스시사칼럼]  채희석 목사/ 파리 모두 제자교회 <3>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자신이 <사회적 복음> (Social Gospel)의 옹호자임을 온 삶을 통해 보여주었다. 그는 탁상 공론하는 신학자도 아니며, “오직 순수복음”을 말로만 떠드는 교조주의 설교자도 아니었다.

올해 (2015) 3월로서 마틴 루터 킹 목사가 1965년 3월에 이만 오천 명 시민과 함께 미국 알라바마 주의 셀마(Selma)에서 몽고메리까지 비폭력 평화 행진을 주도한 지 50주년이 된다. 생명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3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이 행진의 목적은 이미 1964년에 제정된 공민법(Civil Rights Act)이 모든 시민에게 차별 없이 적용되도록, 특히 아프리칸 미국인들에게도 참정권을 당연히 보장하라는 것이었다. 첫 행진은 공권력에 의해 잔인하게 제압되어 <피로 물든 주일>(Bloody Sunday)이 되고 만다. 그러나 결국 셀마에서 백악관까지 이루어진 긴 행진은 <참정권 법안> (Voting Rights Act)이 1965년 8월에 입법화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이 역사적 사건을 다룬 영화 <셀마>가 올해 3월 11일 프랑스 영화관에서 일제히 개봉되었다. 미국 흑인 여감독 아바 뒤버네이(Ava DuVernay)가 제작한 이 영화는 1965년 그 당시 3개월 동안 지속된 역사적 행진의 투쟁적인 모습을 리얼하게 집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특히 킹 목사의 번뇌하고 회의에도 빠지며, 다른 리더와의 입장 차이, 가족에 대한 염려 등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 주면서도, 그의 결연한 신앙적 삶과 영적 투쟁의 모습을 다소 클라식하게 표현한 첫 장편 영화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동 영화의 배경인 된 미국은 2차 대전 이후 새로운 초강대국으로 떠오르면서, 세계를 향해 마치 자유와 민주주의, 정의와 평화의 수호자로 군림하게 된다. 하지만 외부적 평가와는 달리 그 내부 사정은 암담했다. 니그로 미국인에 대한 사회적 차별, 경제적 불평등, 공권력 폭력 등 <인종차별주의>(racism)가 만연하였다. 이들은 과거 노예제도와 인종 차별주의를 대물림 받은 시민이지만, 현대 국가가 된 미국은 인종차별주의로 생긴 이들의 상처와 사회분열에 대해 국가적 돌봄과 책임관리를 소홀히 했던 것이다. 흑인을 비롯해 수많은 소수인종에게 희망이 되었던 오바마 대통령은 2008년 필라델피아 대선 운동 시 “우리는 인종이라는 [차별적] 단어에서 벗어날 수 있다”라고 말했지만, 이번 셀마 행진 50주년을 맞이하여 그는 “인종차별이 여전하다”고 고백하였다. 여전히 아프리칸 미국인에 대해 경찰 공권력이 저지른 폭력은 매스컴에 종종 뜨거운 이슈가 되며, 여전히 백인의 우월감을 크고 작은 일에서 보여지고 있다. 특히 흑인은 빈곤 계층이라는 공공연한 사회적 계급화는 또 다른 인종차별화 형태가 되고 있으며 <탈인종주의>를 벗어나지 못한 미국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프랑스는, 미국과 달리, 2차대전 동안 유대인 등 소수 인종이 나치에 의해 당한 참극을 체험하고, 법으로 인종 별, 출신 별, 종교 별 차별은 물론, 그들에 대한 공식적 통계 집계도 금하고 있다. 심지어 프랑스 대통령 올랑드는 2012년 대선 시 인종차별을 근본적으로 제거하기 위해 헌법에서 인종(race)이란 단어 자체를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프랑스 역시 현실은 이상과는 달랐다. 올해는 프랑스 주요 도시 근교를 중심으로 이민세대 청소년들의 소요사태가 전국적으로 일어난 지 10주년이 된다. 소위 소외된 젊은 층으로 불려지는 이민 2,3세대들은 1세대에 비해 정체성의 위기를 심각하게 겪고 있었다. 사회경제적으로 차별과 냉대를 받으며 결과적으로 높은 실업률로 좌절하면서 2005년 가을 전국적인 폭동사태를 일으킨 것이다. 이는 인종주의를 어느 정도 극복했다고 자부하던 프랑스 공화국이 마치 안데르센의 동화에 나오는 <벌거숭이 임금>이 된 꼴로 만든 것이다.

셀마 행진을 성공리에 마친 마틴 루터 킹 목사는 같은 해 10월 24-25일에 프랑스기독교총연맹(FPF)의 초청을 받아 파리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는 파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설교를 24일 주일에 파리 미국교회에서 했다. 요한계시록 21장 16절 “그 성[새 예루살렘]은 네모가 반듯하여 길이와 넓이가 같은지라” 말씀을 기초로, 온전한 기독교인의 삶은 새 성과 같이 3차원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먼저 인생의 <길이>는 인격을 성장시키며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발견하여 그 분의 임재를 삶 속에서 느끼며 은사 계발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회 직분이라도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것이다. 다음은 인생의 <넓이>로, 우리의 삶은 이기적으로 영위되면 안되며,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모든 사람에 대해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 백인이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안보와 복지만을 생각했지만, 흑인 역시 그들의 형제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모든 인간이 존엄 속에서 자유를 누리며, 가난에서 벗어나도록 평화적 투쟁을 하는 것이 바로 오늘날 이런 삶을 사는 것이다. 끝으로 인생의 <높이>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한다. 고통의 근원에 관한 문제와 같이,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없는 것이다. 비록 우리는 이 땅에서 부분적으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이해할 뿐이지만, 영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투쟁을 지원하신다. 하나님 없는 우리의 모든 노력은 헛된 것이 된다. 우리에겐 하나님께서 그의 창조를 완성하기 위해 우리와 함께 일하신다는 역사의식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결론에서 킹목사는 자유를 위한 흑인 영가 “We shall overcome… The Lord will see us through”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극복할 것이며, 주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도우실 것이다) 가사를 읊으면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며,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자고 말하며 설교의 끝을 맺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자신이 <사회적 복음> (Social Gospel)의 옹호자임을 온 삶을 통해 보여주었다. 그는 탁상 공론하는 신학자도 아니며, “오직 순수복음”을 말로만 떠드는 교조주의 설교자도 아니었다. 그는 <설교된 신학> (théologie prêchée)을 실천하는 자, 즉 사실과 확신에 기초하여 설교하는 신학자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그 당시 사회적 신분이 높은 자들을 신도로 두고 자랑하는 엘리트주의 교회에 대해 냉엄히 비판하였다. 그는 교회가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을 염려케 하고 잔인하게 예속화 시키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에도 그 역할을 하여야 한다고 믿었다.  기독교인이라면 천상의 거처를 생각할 뿐만이 아니라, 사람의 삶을 마비시키는 달동네나 게토(ghetto)도 생각하여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경제적 불평등, 불의한 정치, 부패된 사회 악조건으로 시달리는 자들을 염두에 두지 않는 종교는 새로운 피를 필요로 하는 <불임 종교>와 같다고 도전하였다.

마틴 루터 킹 목사에게서 <적극적인 비폭력> (actif non-violence) 저항이란 비겁한 자의 저항이 아닌 진정 강한 자의 저항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적인 자질과 용기를 갖춘 진정한 저항이며, 정복이 아닌 설득을 통해 화해로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 참여자는 복수가 아닌 고난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본받아, 비폭력 저항을 하면서, 이 땅에서 <구속적 고난>에 동참하는 것도 사회를 구원하기 위해 자기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그는 교회나 기독교인의 삶이 무슨 특권층이 누리는 값싼 은혜를 누리는 것으로 전락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였다. 질서를 지킨다는 명분 아래, 적극적으로 정의를 행하지 않는 그 당시 대다수의 백인교회의 미지근한 입장에 대해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더 나아가 자본주의 미국사회의 구조적인 부조리를 지적하면서 “미국이여, 다시 거듭날지어다”라고 확언하기도 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메시지가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전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기 위해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자문을 해본다. 첫째, 미국의 그 당시 상황과는 당연히 다르지만, 우리가 당면하는 오늘날의 <흑인문제>는 무엇인가? 우리 주변에 살고 있는 흑인이나 이민자의 입장을 생각하고 동참하고 있는가? 둘째, 정통 교리, 영적 부흥, 회심을 위한 설교, 심지어 사회 정의를 강조한 것이 지난 20세기 초부터 복음주의 기독교가 가진 입장이었다. 하지만 진정 <행하는 신학> (théologie de l’action)이 뒷받침되고 있는가? 셋째, 우리 교회가 지향하는 <성공>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양적인 성장을 성공으로 착각하는 유혹에 빠지고 있지는 않는가? 대형교회가 그리스도를 향한 열정과 헌신이 반드시 높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는 어떻게 복음을 신실한 행함으로 보여주고 있는가? 마지막으로 복음 설교자의 예언적인 역할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우리는 현실을 직시하면서 영혼의 양식을 공급하는 설교자를 가지고 있는가? 유학하는 청년들에게 먼저 사랑의 하나님께서 보시는 현실을 깨우치며 믿음과 소망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가?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우리가 오늘날 이 유럽 땅에서도 이런 기독공동체를 이루기를 원하고 있을 것이다. 주님을 따르되 적극적인 사회 참여를 동반한 예언자적인 교회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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