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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세례/The Baptism of Christ

[미술저널]  박심원목사/ 영국, 예수마을커뮤니티교회 담임

예수께서 세례 받으신 사건은 역사적이다. 그러나 화가의 그림처럼 받으신 것은 아닌 것이다….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 그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그 형태는 각자의 믿음의 분량만큼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 그림은 역사적 사실이 아닌 것이다. 과거의 한 사건을 현대의 한 정점에서 예술로 표현한 것은 위대한 발상이다. 그 발상은 미래를 여는 힘이 된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거장 앞에 내 비좁은 마음이 떨고 있다.

세상의 모든 문화와 문명은 과거로부터 온 것이다. 공존하는 과거는 현대인들에게 낯설게 느껴진다. 반면 과거의 것만을 맹종하는 이들도 있게 된다. 현대인에게 과거를 이해할 수 있는 지력이 없다면 그것이 과거로부터 온 것임을 망각하게 되는 것이며, 과거로부터 오는 문화적 막강한 지혜는 힘을 잃게 될 것이다. 수원에서 생성된 생수가 개인의 삶의 현장까지 흘러오게 하는 많은 방법과 지난한 연단을 거쳐 한잔의 컵에 담겨 갈 한 목을 축일 수 있게 된다. 지금 내가 마시는 생수의 근원이 과거로부터 온 것임을 알고 마시는 자와 모르고 마시는 자는 한 잔에 담겨진 영적인 무게가 다를 수 있게 된다. 수 백 년, 수 천 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현대적 시각으로 과거를 해석하는 것이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분야의 전문가들로 부터 과거를 해석할 지혜를 구하게 된다.

인간이 창출해 낸 지혜는 미래를 향한 예언 적인 아이디어가 담겨 있다. 수천 년 전의 유물들을 볼 때 현대와 다를 바가 없으며, 현대의 문명으로도 세울 수 없는 건축물들을 그들은 세웠다. 모든 예술은 미래 지향적인 안목이 숨겨져 있다. 그들은 미래를 앞당겨서 현실 문화에서 무언가를 세우고 그리고 만들어 냈다. 21세기 신문명의 화려함 속에서 과거 흑백의 시대에 만들어진 음악을 연주하고, 배우고 있으며, 물감을 찾아 들판으로, 산으로 찾아 다녀서 제대로 된 캔버스를 갖추지 못해서 나무를 깎아 그 위에 그렸던 그림을 현대인들은 과거를 더듬어 찾아내어 그것으로 음악이든, 미술이든, 건축이든, 철학이든 모든 분야의 기준을 삼았다.

과거에 완성된 작품들은 미래의 어느 정점에서 꽃을 피우도록 미완성의 작품으로 완성된다. 그래서 당시에는 무명이었으며, 숨죽였던 작품들이 천 년의 암반을 깨뜨리고 빛을 보게 되는 것이 태반이다. 사람들은 감탄한다. 어떻게 그 당시에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그 그림 앞에서 눈물 흘리기도 하고, 인생의 전환점이 되기도 한다. 과거에 그려진 작품들은 당시의 현실을 그린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과거를 그렸다. 물론 명화 중에는 당시의 일상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린 풍속도 있을 것이다. 조선 시대 후기 그림의 획을 그은 혜원 신윤복(1758년 출생, 영조 34)은 풍속도로 유명하다. 백성들의 일상의 소소한 삶을 그려 왕에게 상참함으로 왕의 귀가 되었고 눈이 되었다.

인간의 현실적 삶을 화폭에 담은 그림을 통하여 후세 사람들은 그 시대를 골목골목 누비며 다닐 수 있게 된다. 그들이 입고 다녔던 의복이 어떠하며, 무엇을 즐겨 먹었으며, 어떤 환경에서 살았는지 소소하게 할 수 있게 된다.  동네 어귀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과 들리지 않는 대화도 나눌 수 있게 된다. 따스한 볕 의자에 앉아 뜨개질을 하던 구수한 할머니 곁에서 말없이 햇볕의 따스함을 나눌 수 있게 된다. 안방극장의 단골손님인 사극에 등장하는 모든 의상과 장식, 당시 상황들을 재현 해 내는 것은 작가 임의적 창조력이 아니라 누군가 그려 놓은 당시의 풍속도 한 장으로 상상력의 날개를 화려하게 펼쳐서 장식할 수 있는 모토가 된 것이다. 이러한 그림들은 사실적 가치를 가지고 있게 된다.

현실 세계 뿐 아니라 역사적 현장을 화폭에 담아낸 그림도 있다. 왕의 대관식은 마치 그 현장의 앞자리에 앉아 있게 하는 감흥이 들게 할 정도이다. 섬세한 붓 터치, 화가는 선 하나에 생명을 불어 넣고, 그 선은 다른 선과 만난다. 그렇게 만난 선들은 다른 선들과 춤을 추며 화려한 색상을 머금는다. 미처 그 선을 따라가기도 전에 선들은 다시 그림으로 완성이 된다. 점에서 시작한 선, 선과 선이 맛 닿고, 그 선들은 화려한 옷 속에 감춰진다.

The Baptism of Christ프란체스카의 예수의 세례, 이 그림 한 점으로 2011년 홍익대학교 석사 논문으로 발표한 미술학도(박세윤 님)도 있다. 그의 주제는 “보르고 산 세폴크로 내에서 작품의 역할과 의미” 라는 주제로 논문으로 발표된 바 있다. 그의 논문을 읽는 것은 제한이 되어 있기에 제목만으로 감흥을 얻는다. 한 점의 그림이 어떤 이에게는 인생의 다음 과정을 뛰어 넘게 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 것이다. 과거의 한 징검다리를 현실의 세계로 끄집어내어 미래를 여는 문으로 삼은 것이다. 그렇게 그림은 현실의 세계에서 과거를 길어 올려 미래를 향하는 문이 되어 준다. 과거의 어느 정점에서 그림을 그렸던 화가는 미래에 박수갈채를 받을 그 영광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림이 좋아서 그림을 그렸고, 그 그림에 자기 인생을 담았을 뿐이다.

그림 앞에 선다는 것은 내 속 사람이 과거의 골목길을 여행하는 것 같다. 내 육체는 두 번 바뀐 천 년의 세월에 살고 있지만 마음은 수백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화가의 상상력은 이제 화가의 것이 아니다. 오늘 현대인들이 화가의 그림을 해석해 놓은 것을 보면 그것이 자기가 그린 그림 인지 물을 수도 있게 된다. 페이스북에 이런 유머가 올려 있었다. 어느 한 교회에서 평상시에 바른 생활과는 관계없는 고인의 장례식에 한 목사님께서 추도사를 읽기 시작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것은 평생 근면 성실하며, 남을 돕는데 앞장서고, 정직하게 살다가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여기까지 듣고 있던 미망인이 옆에 있는 큰 아들에게 조용히 말했다. ‘얘야, 얼른 가서 저 관 속에 누워 있는 사람이 정말 네 아버지인지 확인하고 오너라.’

해석된 그림은 원본과는 다른 관점일 수 있다. 훗날의 사람들은 그 그림을 평가한다. 그 평가는 때론 원 저작자의 의도와는 판이 하게 다를 수 있게 된다. 화가는 그림이라는 방편의 길을 만들어서 갔을 뿐인데 후세 사람들은 화가가 그 길을 통하여 간 목적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연구하고 있을 뿐이다. 신약성경 로마서로 예로 든다면 로마서에 관련하여 50문항을 문제로 낸다면 현대 신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어떠하든 풀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 문제지를 2천 년 전 사도바울에게로 가져간다면 사도 바울은 아마도 낙제 점수를 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미술작품은 시대상황을 반영한 그림도 있지만 그 시대에서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작가의 상상력으로 끌고 와서 당시의 현대적 시각으로 화폭에 담은 그림도 있다. 바로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받으시는 세례의 장면이 그러하다. 작가인 델라 프란체스카로써 프랑스 화가이다. 그의 고향인 토스키나 보르고 산 새폴크로에 세워진 세례요한(St. John the Baptist) 교회를 위해 제작한 작품이다. 그래서 그림 뒤편은 예수께서 세례 받으신 요단강의 배경이 아니라 화가에게 친숙한 보르고 산 세폴크로 주변의 경관을 삽입 시켰다.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으시는 장면은 성경에 기록된 분명한 사실인데 어떻게 세례 받으셨는지에 대해서는 몇 문장으로만 성경에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화가는 자기 상상력을 동원하여 화가 당시의 현대적 감각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그림을 그린 것이다.

그 그림으로 우리는 다시 과거를 해석하게 되는 과오를 범하게 된다. 화가 자신이 그렸던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는 조건 없이 그 상황을 수궁해야 한다. 그러나 화가 당시의 상황이 아닌 그 이전의 것, 특별히 성경에 관련하여 그린 그림이라면 화폭에 담겨진 사실만으로 성경을 해석하거나 이해하려 한다면 본질이 변형된 또 다른 거짓된 성경의 한 장면 앞에 목도하는 것과 같다. 많은 화가 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 모습을 그리고 싶어 했다. 그러나 주님은 어떠한 외형적인 형상을 남겨 두지 않으셨다. 이유는 그 자체만으로 또 다른 예수, 우상으로서의 예수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십계명을 말씀하시면서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것은 하나님을 부어서 우상을 만들지 말라 강조하신 것이다.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나 금으로나 너희를 위하여 신상을 만들지 말고.” (출20:23)

예수께서 세례 받으신 사건은 역사적이다. 그러나 화가의 그림처럼 받으신 것은 아닌 것이다. 주님이 세례 받으신 장소는 요단강이다. 그리고 물에 잠기는 침례형태로 세례를 받으셨다. 그 물에서 올라오실 때 비둘기 형태로 성령님이 임재하시는 것을 사람들이 목도하였다. 그러나 비둘기는 아닌 것이다. 다만 하늘로부터 성령님의 임재하심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마치 비둘기가 땅으로 내려앉는 모습으로 연상했을 뿐이다. 이는 비유인 것이다. 둥근 달을 일컬어 누이 얼굴 같다 말할 때 얼굴과 달은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둥글면서 밝은 모습을 표현했을 뿐이다. 그렇게 표현한 것을 후세 사람들이 ‘누이의 얼굴을 달이다.’ 라고 결론을 지으면 전혀 다른 누이의 모습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 그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그 형태는 각자의 믿음의 분량만큼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 그림은 역사적 사실이 아닌 것이다. 과거의 한 사건을 현대의 한 정점에서 예술로 표현한 것은 위대한 발상이다. 그 발상은 미래를 여는 힘이 된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거장 앞에 내 비좁은 마음이 떨고 있다. 그와 함께 마음이 담긴 차를 한 잔 나눌 수 있다면 그는 분명 이렇게 조언할 것이다. 「예수께서 받으신 세례, 그 광경을 내 마음에서 간직하고 싶어서 나는 한 폭의 그림으로 완성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그림으로 예수의 아름답고 위대한 세례 받으심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형태를 역사적 사실로 보고 있으니 내 마음이 아픕니다. 그럴 줄 알았다면 그림 아랫부분에 이런 문구를 덧붙였을 것입니다. ‘이 그림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한 화가의 간절한 믿음의 표현이다.’」

인생은 누군가를 본받으며 성장하도록 되어 있다. 그렇게 성장한 인생은 누군가에게 모델이 되어 간다. 좋은 측면이든 반면 교사적인 측면이든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내 인생의 발자취가 기억되어진다. 나는 누군가에게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 그 발자취에서 향기가 날 것인가? 프란체스카의 몸부림, 그의 화폭 앞에서 떨림으로 서있게 된다.

<필자소개: 유크 금번호부터 미술칼럼을 담당하시는 박심원 목사님은 영국 예수마을커뮤니티교회 담임, KCA총무, 영국 코리아포스트칼럼리스트로 활동 중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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