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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

비단길, 소금길, 순례자 길

[문화칼럼]  김학우 목사/ 마드리드 사랑의 교회 담임

세상에는 수많은 길이 있다. 그 중에서 오랜 역사 속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내왕했던 길이 있다면 “비단길”(실크 로드, Silk Road)일 것이다. 또한 수많은 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을 운반한 길이 있다면 “소금길”(Via Salaria)일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한번쯤 꼭 걷고 싶은 길이 있다면, 바로 유네스코에까지 등재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의 순례자의 길이 아닐까 싶다.

비단길은 비단처럼 부드러운 길이 아니다.

동서 문명이 소통한 비단길, “실크 로드”(Silk Road)는 친근하면서도 낯선 단어다. 교과서에서 무수히 접하긴 했지만 쉽게 갈 수 없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비단길이란 고운 이름과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죽음의 길이지만, 현대인들에게 로망의 길이기도하다. 뿐만 아니라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 너머로 펼쳐진 초원의 길과 사막 길, 바닷길을 수없이 반복하면서 지구의 동쪽에서 서쪽 문명의 발상지까지 횡단하는 도전의 길이도 하다. 비단길은 동쪽 중국으로부터 중앙아시아, 서 아시아의 오아시스지대를 거쳐 이스탄불과 로마에 이르는 무역루트 전체를 가리킨다. “실크로드”라는 말은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펜(1833-1905)이 교역로에서 중국의 특산물인 비단이 많이 거래되고 운반되었다는 점을 착안하여 “자이덴 슈트라쎄(비단길, Seiden Straße”란 이름을 최초로 사용하였다.

비단길은 아시아와 유럽 그리고 아프리카 3개 대륙을 잇는 동서 문화교류의 동맥이자 세계 문화와 문명의 산실이었다. 무엇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집트 문명, 인더스 문명, 중국 문명 등 다양한 고대문명들이 비단길을 통해 개화되고 교류되어 지금의 전 세계 문명의 초석이 되었다. 이뿐 아니라, 이 지역에서 시작되고 발흥한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등이 비단길을 따라 확장되어 나갔다. 비단길은 단순히 동서양을 잇는 무역 통로만이 아니라 동서남북을 하나로 묶는 사통팔달의 거대한 정보와 교통망의 역할과 함께 세계의 모든 종교들이 전파되는 통로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크나큰 대동맥 위에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왕,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 한나라의 무제, 당나라의 태종, 이슬람의 칼리프들, 칭기즈칸, 티무르 등이 많은 전쟁과 정복을 거듭하면서 수많은 민족들이 발흥하고 멸망했다. 비단길의 역사 가운데서 특히 몽골의 위대한 전사 칭기즈칸을 빼놓을 수 없다. 1995년 미국 워싱턴포스트가 지난 1000년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1위로 칭기즈칸을 선정한 바 있다. 그는 비단길을 따라 가장 많은 영토를 정복한 왕으로, 로마 제국보다도, 이슬람 제국보다도 더 넓은 땅을 정복하고 다스렸다. 그러니까 칭기즈칸이 비단길의 역사에서 가장 큰 수혜자인 셈이다.

소금길은 소금처럼 유용하게 사용되지 않았다.

인류 문명의 발상지를 보면 바다를 낀 강을 중심으로 생겨났다. 생존에 필수적인 소금과 물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도 로마의 티베르 강 해안에서 만든 소금을 운반하기 위해 만든 “소금길”에서 유래 됐다. 이탈리아인들은 소금길을 “비아 살라리아”(Via Salaria)라고 불렀으며, 소금길이 로마 부흥의 중심이 되었다. 로마제국은 기원전 640년경에 소금을 국가의 통제 하에 두어 전매사업으로 시작하면서 소금을 내륙으로 운반하기 위해 최초로 소금길을 만들었다.

해안에서 만들어진 소금이 하천을 통해 배로 운반되면서 물류혁명을 가능케 했고, 소금을 유통하면서 수많은 “소금길”이 생겨나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6-7세기까지 로마제국의 작은 어촌에 불과 했던 베네치아가 풍족한 항구도시로 발전한 것도 역시 소금 덕분이었다. 오늘날 천일염의 기술을 개발한 베네치아는 양질의 소금을 생산하여, 당시 비잔틴 등 유럽에 소금을 수출하여 큰 이익을 얻었다. 로마는 소금 길과 함께 동서로 연결된 비단길을 통하여 유럽으로 들여온 실크, 도자기 등을 거래하여 큰 부를 이뤄 유럽 최고의 무역거래 도시가 되었다.

유명한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샤일록(구두쇠)이야기는 이런 베네치아의 번성한 상업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하지만 부를 축적한 로마는 비단길을 통해서 들여온 비단으로 사치문화가 확산하게 되었고, 대량의 은화들이 중국으로 유출됨으로 은 부족 현상까지 생기게 되었다. 은화의 결핍은 곧 은화 화폐의 함량의 저하를 가져왔고, 은화에 대한 불신을 초래하게 되었다. 결국 로마는 소금을 통해 축적된 부를 비단길을 통해 들여온 비단으로 경제가 무너지는 단초를 제공함으로, 소금 길로 인해 부흥한 로마의 경제가 비단길로 인해 쇠퇴하고 만 셈이다.

일본 오사카대학 가와기타 미노루 교수는 막대한 인원을 동원해서 재배해야 하는 사탕수수를 가리켜 “사탕수수가 있는 곳에 노예가 있다.”고 말했는데, 이는 입맛을 내는 설탕에 대한 욕구가 노예제를 낳게 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사탕수수를 저장하기 위해선 반드시 소금이 필요했다. 모든 사람들이 거의 매일 먹고 있는 설탕과 소금 속에는 달고 짠 인류의 역사가 숨어 있으며, 작은 소금 그릇과 홍차 한 잔 속에도 오랜 인류의 역사가 숨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순례자 길은 구도자만이 걷는 길이 아니다.

638년 예루살렘이 칼리프 오마르에게 함락되어 순례지역으로서 쇠퇴함에 따라 800년경부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로 가는 성지 순례가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11세기 초 스페인이 국토 회복 운동을 펼치면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지역이 국민정신의 요충지가 되었다. 특히 교황 레오 3세(재위 795-816)가 이곳을 성지로 지정함에 따라 로마, 예루살렘과 함께 카톨릭의 3대 순례지로 손꼽히면서 각국의 왕과 주교를 비롯한 수많은 순례자들이 찾게 되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스페인 북서부 갈리시아 지방에 위치한 도시로, 유럽 어디에서나 발걸음을 내딛으면 새로운 길이 만들어졌다.

일반적으로 순례자들이 출발하는 지역으로 프랑스의 파리, 베즐레, 퓌이, 아를 등 4곳에서 시작하여 피레네 산맥을 넘는 순례길이 생겨났다. 이 길을 “카미노 데 프란세스”(Camino de frances, 프랑스 사람들의 길)이라 부른다. 이 가운데서 가장 많이 이용하는 코스는 프랑스 남부지방의 국경 마을인 “생장피 데 포르”(St Jean Pied de Port)에서 시작하여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이르는 800km의 순례길이다. 또한 순례길 주변에는 부르주대성당, 성 프롱 대성당, 성 푸이 수도원 성당, 등 크고 작은 수도원과 순례자들을 위한 전용 숙박시설, 병원, 식당 등 약 800개가 있다. 1998년 유네스코에서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자의 길을 세계유산으로 지정하였다. 한국 제주도 올레 길의 표본이 되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자의 길은 시간이 지나면서 구도자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걷는 길이 되었다. 길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길에서 자신을 만나고, 길에서 더 아름다운 자연을 발견하면서 누구나 걷는 길이 되었다.

프랑스의 사상가 장 작크 루소는 길을 걷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길을 걸을 때 명상을 할 수 있다. 걸음이 멈추면 생각도 멈춘다. 나의 정신은 오직 나의 다리와 함께 움직인다.”라고 하며 걷기를 좋아했다. 서양 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히포크라테스 또한 “최고의 약은 걷는 것이다.”라고 했으며, 동양의학의 선구자인 허준도 동의보감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좋은 약을 먹는 것보다는 좋은 음식이 낫고, 좋은 음식을 먹는 것 보다는 걷기가 더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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