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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

폭풍 가운데서 / 디트리히 본회퍼의 생애

[신앙인물] 본회퍼 목사 이야기

깊은 타락의 나락으로 달려가고 있는 민족 전체를 온 몸으로 막았던 사람

디트리히 본회퍼(Ditrich Bonhoeffer, 1906-1945)는 처음부터 히틀러의 잔학 행위에 맞서다가 레지스탕스 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되어 1945년 4월 9일 하인리히 힘러(Heinrich Himmler)의 특별 명령으로 처형당했다.  

그는 감옥에 갇히기 6년 전에 이런 글을 남겼다. “그리스도께서 한 사람을 부르실 때, 그분은 그에게 와서 죽으라고 명하신다.”

미쳐 돌아가는 현대 세계 앞에서, 본회퍼는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생각했다. 1933년 나치가 권력을 잡을 때부터 본회퍼는 저항을 시작했으며, 특히 반(反)유대주의가 교활하게 일어나는 데 강력히 저항했다. 그는 곧 히틀러와 나치 정권에 대한 독일 개신교의 저항을 이끌었던 고백교회(Confessing Church)를 대표하는 목소리가 되었다.

본회퍼에게 저항은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였다. 그것은 제자도의 문제였다. 그의 충성은 “총통보다 높으신 주님”을 향한 것이었다. 이는, 그가 “그러한 주님의 주되심과 그토록 철저한 제자도만이 독일의 주장과 속임수를 이길 수 있다는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1935년, 본회퍼는 핑켄발데(Finkenwalde)에 새로운 신학교를 세우고 이끌었으며, 그곳에 주변에서 활동하고 있는 세력과는 완전히 대조되는 공동체를 세웠다. 이 신학교는 1937년에 강제로 폐교되었으나, 1940년까지 지하 공동체로 비밀리에 계속되었다.

그의 책 「신도의 공동생활」(Life Together, 대한기독교서회 역간)에 기술되어 있듯이, 본회퍼는 세속적인 세상 앞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로, 또한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살도록 이끌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이 결심은 세상으로부터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에 참여하는 기초가 되었다.

본회퍼는 독일을 떠나라고 권하는 동료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1892-1971)에게 쓴 편지에서 “내가 만일 지금 내 민족과 더불어 시련을 견디지 않는다면 전쟁이 끝난 후 나는 독일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재건하는 데 참여할 권리가 없을 것입니다.” 라고 썼다.

그는 생애 마지막 주간에 여러 게슈타포 감옥들을 옮겨 다니면서 국적이 다양한 많은 사람들을 만났으며, 마침내 플로센부르그에서 최후를 맞았다.

그의 동료 수감자 가운데 하나였던 한 영국군 장교는 이렇게 썼다. 본회퍼는 내가 만났던 사람들,하나님이 그 삶에 현존하시며 늘 곁에 계시는 극소수의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1945년 4월 8일 일요일, 본회퍼 목사는 작은 예배를 인도했으며 모두의 가슴에 감동을 주는 말씀을 전했다. 그는 우리가 갇혀 있는 참 뜻과, 이것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생각과 결심을 표현하는 정확한 단어들을 찾아냈다. 그가 마지막 기도를 끝내자마자 문이 열렸고 두 명의 간수가 들어왔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본회퍼, 이리 나와!” 그것은 모든 수용자들에게 한 가지 의미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ㅡ 교수대.

우리는 그에게 인사를 했다. 그는 나를 따로 부르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끝이 아닙니다. 내게는 이것이 삶의 시작일 뿐입니다.” 다음날 그는 플로센부르그에서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현대의 세속화된 세계 앞에서, 디트리히 본회퍼는 제자도의 대가가 무엇인지 보여 주었다. 그는 제자도의 소명이 무엇인지 예시적으로 보여 주었다. _『하나님의 나라 최전선에 서라, 제임스 에머리 화이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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