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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바조 그림, “엠마오에서의 만찬” 해설

[미술저널]  박심원목사 <2>

카라바조는 16, 17세기에 걸쳐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시작된 바로크 회화의 개척자이다. 그의 생을 다하기 9년 전에 인생의 최종적인 삶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엠마오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장면을 화폭에 담아낸다. 스승을 잃고 절망에 빠져서 힘없이 엠마오로 행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이 나타나신 것은 화가 자신에게 나타나신 예수를 그려내고 싶었을 게다.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이다. 그러면서 완전한 신이신 하나님이시다. 이러한 주장이 사실적인가? 종교적 가르침인가? 두 갈래 길에서 인류는 수천 년간 그 싸움을 그치지 못하고 있다. 인류가 존재하는 동안 이 싸움은 지속될 것이다. 과연 하나님이 인간이 될 수 있는가? 인간이 또한 하나님이 될 수 있는가? 신인양성론(神人兩性論)은 종교적 교리인가? 실제적 사건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인양성은 종교적 이론이 아니라 실존적 사실로써 인류의 시작부터 예언되어 온 것이며 수천 년간 그 사실을 믿는 신실한 제자들을 통하여 전해져 왔다. 그러나 신인양성이 사실임을 증명할 과학적인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그를 따랐던 제자들은 자기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림으로써 종교적 교리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임을 증명해 왔다.

주님의 열두 제자들을 사도라 부른다. 그 사도들이 처음 주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자기 인생의 완성을 꿈꾸었다. 비록 천한 인생을 살아 왔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자기 인생의 화려한 꽃을 피울 것이라 기대했을 것이다. 갈릴리 지역의 변두리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았던 제자들의 일상은 판박이를 아로 새긴 듯하다. 몇몇 제자들을 제외한 모든 제자들은 갈릴리에서 태어나고 그곳에서 잔뼈가 굵었으며 늙어 가고 있었다. 수제자인 사도 베드로는 글을 쓸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질 정도로 배움과는 거리가 먼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그들의 내일은 불을 보듯 자명한 사실이었다.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다 생은 끝이 날 것이다. 그렇게 희미한 흑백과 같은 꿈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을 무렵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다. 수많은 군중들이 갈릴리 해변 언덕으로 주님을 따라 운집했다. 더 이상 수용할 수 없어서 주님은 시몬의 배에 오르셔서 배를 뭍에서 조금 띄우기를 요청하셨다. 그리곤 해변 언덕에 자유롭게 자리한 군중들을 향해 외치기 시작하셨다. 시몬 베드로의 귀로는 주님의 외침을 들으면서 손으로는 그물을 정리하는데 집중했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외침은 태양빛이 머리맡에서 내리 쬐일 만큼의 긴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시몬의 그물 정리는 벌써 끝이 났을 것이지만 마땅히 손에서 그물 정리하는 것을 그만 둘 용기가 나지 않아서 계속적으로 그물만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청중을 향해 외치시던 주님은 잠시 호흡을 멈추곤 고개를 숙이셔서 시몬을 내려다 보셨다. 그 때 마다 시몬의 손도 잠시 멈추어야 했다. 그분의 시선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일이 몇 번이 반복되는 동안 시몬의 손은 떨기 시작했다. 이제 더 이상 시몬은 그물을 정리할 수 없었다. 정리된 곳으로 그물이 다 옮겨 갈 무렵 주님의 외침도 끝이 났기 때문이다. 청중들은 숨을 죽일 듯 고요했다.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는 최고의 오케스트라의 공연이 끝난 후 헐떡이는 숨을 참고 있는 지휘자의 모습에 박수를 보낼 엄두도 못 내고 그의 움직임을 주시하는 것 그 이상이었다. 훗날 주님의 외침을 제자들은 이렇게 기억 했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막1:22,27) 그리곤 주님은 조용한 목소리로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 시몬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렇게 위대한 메시지를 외치셨던 그분이 자신에게는 지극히 평범한 명령을 하셨기 때문이다. 시몬은 이렇게 대답한다.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눅 5:4-6)

그 후 시몬의 행동은 주님 앞에 무릎 꿇는 것이었다. 시몬은 고기가 많이 잡혔기 때문에 무릎 꿇은 것은 아니었다. 주님의 외침이 있는 동안 사실 시몬의 마음을 불일 듯 회개의 마음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차마 무릎 꿇을 용기가 없었을 뿐이었다. 무릎 꿇고 흐느끼는 시몬에게 주님은 말씀하신다. “고기를 낚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 제자들이 새로운 정치 세계나 율법의 제자가 되는 새로운 삶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고기를 낚았던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단순한 삶의 변화일 뿐인 것이다. 다만 그 본질과 대상이 달라지는 것이었다. 자기 본능적 욕망을 위한 어부가 아니다. 고기를 잡는 생업으로서의 어부가 아니라 이제는 사람을 살리는 어부로서의 영적 지도자가 되는 것이다.

제자들의 3년간 삶은 꿈을 꾸는 듯했다. 로마의 정권아래 식민 생활을 하면서 숨죽여 살았던 지난날들의 모든 괴로움을 깨트리는 듯 했다. 예수는 당당하게 헤롯 대왕을 향해 ‘저 여우’(눅13:32)라고 질책하기도 했다. 그럴지라도 로마 정권은 예수를 향해 어떠한 행동을 취할 수 없을 만큼의 민초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시몬을 중심으로 한 제자들은 시대의 지도자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예수께서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야고보와 요한의 두 형제가 예수께 간청하기도 했다. 그것은 예수께서 로마 정권을 물리치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할 때 자신에게 좋은 자리를 주라는 일종의 뇌물이었다. (막10:37)

그들의 꿈은 허망하게 깨지기 시작했다. 주님의 나라는 세상에 임하는 권력 체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 땅에 죽으러 오셨다. 의로운 하나님께서 죽으심으로 그 죽음을 믿는 모든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함이셨다. 결국 3년간 공생애의 짧은 사역을 마치시고 주님은 처절하게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벌거벗긴 채로 죽으셨다. 제자들은 충격을 받았다. 그 충격은 주님을 부정하는 것이며 도망하는 일이었다. 로마 정권은 분란을 막기 위해 주님을 따랐던 제자들도 함께 처형할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두려웠다. 그들은 집단적으로 행동하면서 숨어 지냈다. 앞날을 계획하기도 전에 주님은 약속하신 대로 부활하셨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문을 꼭꼭 걸어 잠근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주님의 부활은 제자들에게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주님의 시체가 없어지자 로마 정권은 민요를 막기 위해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어서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 갔다며 거짓 루머를 퍼뜨리게 했다. (마28:12) 그리고 제자들을 처형하기 위해 공개 수배를 내리게 된다.

web-1506-The Supper at Emmaus부활하신 예수를 직접만나보지 못한 두 명의 제자는 그 소문만 듣고 예루살렘에서 10km 떨어진 엠마오로 길을 떠났다. 그들 중에 한 젊은이가 대화에 끼어 들었다. 그 목소리, 그 외침은 어디서 많은 들었던 것이었다.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종결하여 설명해 주었다. 음식을 먹기 위해 기도할 때 제자들의 눈이 밝아져서 부활하신 주님임을 알아보게 된다. (눅24:13-31) 이제 제자들은 과거의 나약했던 어부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기 목숨을 담보로 예수 그리스도가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었음을 증언하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증거는 과학적 증거가 아니라 자기 목숨을 걸고 증언하는 것이리라. 그 사건이 일어난 지 1600 여년이 지난 후 이탈리아의 작은 마음에서 태어나고 자란 미켈란젤로는 엠마오의 만찬에 자기 인생을 담아 화폭에 담아낸다. 이미 이름을 떨치고 있는 미켈란젤로와의 구별을 두기 위해 자신이 자랐던 작은 마을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에 덧붙인다. ‘카라바조’이다. 밀라노 동쪽에 있는 작은 시골 마을이다.

이는 마치 예수 그리스도 이름 앞에 갈릴리 지역의 작은 마을인 나사렛 이란 이름이 붙여진 것과 흡사하다. 카라바조는 고단한 삶을 살았다. 39살의 짧은 생을 사는 동안 15번이나 수사상에 기록을 남길 만큼 쫓기는 공인된 죄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중에서 일곱 번은 영어의 몸이 된다. 여러 차례 탈옥도 감행했다. 그의 죄명은 폭행, 기물파손, 명예훼손, 불법무기소지 그리고 살인이다.

카라바조는 16, 17세기에 걸쳐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시작된 바로크 회화의 개척자이다. 그의 생을 다하기 9년 전에 인생의 최종적인 삶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엠마오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장면을 화폭에 담아낸다. 스승을 잃고 절망에 빠져서 힘없이 엠마오로 행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이 나타나신 것은 화가 자신에게 나타나신 예수를 그려내고 싶었을 게다. 존재하나 그 존재를 증명할 수 없는 사실이기에 화가의 상상력을 동원한다. 단순한 동원이 아니라 카라바조의 인생을 예수님의 가르침에 담고 싶어 했다. 그의 화폭을 통하여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한다. 그래서 여느 화가들이 그린 예수님의 초상과는 차별을 둔 것이다. 젊은 예수, 수염이 없는 예수, 그 예수의 모습은 바로 카라바조 자기 자신이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 처형을 당하면서 구원받았던 ‘디스마’ 처럼 자신의 삶을 주님께 드리고 싶은 마음으로 종전의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에 관한 틀을 깨트리고 자기 자신을 투영한 카라바조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화폭에 담아낸다.

예수는 신인양성이시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다. 인간의 죄를 속하시기 위해 죽음을 택하신다. 인간에게 죽음은 당연한 일이지만 하나님에게 죽음은 가장 처절한 수치인 것이다. 그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셨다.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은 목숨을 다하여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요, 진리임을 증언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 카라바조, 그곳에서 자란 미켈란젤로 역시 그의 화폭으로 주님의 부활하심으로 완전한 인간으로서, 완전한 신으로서의 예수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있다. 그의 삶을 종결하면서 자신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 그 험난한 길을 택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그림 한 폭에 담아낸다. 그의 그림에 담겨진 주님은 말씀을 하지 않는다. 영혼에서 영혼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생각에서 생각으로 말씀하고 있을 뿐이다. 신이시면서 인간이신 예수, 인간이시면서 신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 사랑을 네 삶을 통하여 증언하라는 메시지를 담아내고 있다. 삶을 통하여 증언되지 않는 예수는 거짓일 뿐이다. 비록 냄새나는 삶을 살았다 할지라도 자신의 삶이 결국은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 투영되어야 함을 전하고 있다.

<@박심원목사/영국 예수마을커뮤니티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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