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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데스다 못에서 중풍 환자를 치유하는 그리스도

[미술저널]  박심원목사/ 영국 예수마을커뮤니티교회 담임 <3>

높은 벽인 교회, 38년 된 중풍병자를 고치는 장면을 화가는 절제된 그림언어로 당시의 이기적인 교회의 모습을 화폭에 담아냈다.

Christ healing the Paralytic at the Pool of Bethesda (1667 – 70)

작가 :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 (Bartolme Esteban Murillo, 1618-1682 스페인)  
소장 : 영국 국립 미술관 (The National Gallery) 30 / 774

인간은 상호 의존적 존재이다. 그렇게 진화되어온 것이 아니라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전능자로부터 지음 받은 것이다. 비좁은 사람이라면 자기 살기 위해 주변 환경을 교묘한 방법으로 이용 하게 될 것이다. 자기 살기 위해 가까이에 있는 이웃을 짓밟는 행위를 하지만 표면적으로는 드러나지 않도록 세련된 선악으로 포장하게 된다. 그래서 시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자기의 이웃을 은근히 헐뜯는 자.” (시101:5) 전면적으로 그 사람을 비웃거나 넘어지도록 올무를 놓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염려해 주고, 어려움을 당할 때 어려움을 유발케 한 집단을 향해 함께 분노해 주지만 그의 넘어짐이 속으로는 왠지 모르게 기분 좋을 때가 있게 된다. 개인 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 역시 다르지 않다. 양적인 성장이 특정 교회만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면 그것은 교회 전체가 중병을 앓고 있다는 증거일 게다. 그럼에도 교회는 건강하지 않을지라도 내가 속한 목양지만 양적 성장을 꿈꾸는 비좁은 목자의 마음을 버리지 못하게 된다.  

성숙한 사람일수록 자기 살기 위해 모든 환경을 의존하려는 비좁은 틀을 깨트리고 타인과 더불어 살 수 있는 상호 협력과 의존적 삶을 택하게 된다. 홀로 백리를 독주하는 것 보다는 함께 십리를 완주하는 것이 더 복된 일인 것이다. 쉽지 않지만 성숙한자라면 그 길을 택해야 한다. 어린 아이일수록 지나친 이기주의적 삶을 살게 된다. 신앙이 성숙하다면 자기를 희생 시켜 인류 사회에 공헌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이다. 자연 세계는 홀로 성장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무림을 호령하는 호랑이 개체수가 줄어 드는 것은 홀로 생활하기 때문이다. 무리지어 집단을 이루지 않기 때문에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가장 나약하게 여겨지는 토끼 종보다 더 빠른 속도로 개체수가 줄어드는 것이다. 홀로 강한 존재는 세상에 서야 할 자리는 없다. 그것이 개인이든, 공동체든, 기업이든, 자연세계든 동일하게 적용되는 창조주의 법칙인 것이다.

사람은 사람을 통하여 비로소 사람다운 사람으로 성장하게 된다. 사람을 만들어 가는 것은 위대한 스승만의 몫이 아닌 것이다. 모두가 스승이고, 모두가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상호의존적 스승이요, 또한 상호의존적 제자가 되는 것이다. 심지어는 악한 사람일지라도 그 악에서 선함을 배울 수 있는 것이다. 17세기 스페인의 바로크 회화의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화가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 그의 유아시절은 불운했다. 어떠한 연유로 부모를 잃었는지는 제한된 기록이지만 부모의 부재로 불운한 소년기를 보낸다. 사람은 사람을 통하여 배워야 하는데 그 배움의 첫 걸음이 부모인 것이다. 부모의 부재는 인간으로 살아가야 하는 기본적이 상호의존적인 관계의 단절로 자기만의 고집된 아성을 쌓게 된다.

인간은 자신의 생각 속에 세계를 예술로 펼쳐 나감으로 자기완성을 이룰 수 있게 된다. 화가의 그림 앞에 선다는 것은 그의 내적인 고민, 더 발전된 자아를 발견해 내기 위해 벌거벗은 몸짓 앞에 서는 것이다. 17세기, 스페인에서 그의 소년기 시절에 비춰진 교회의 모습은 높은 벽만이 존재해 왔다. 요한복음 5장에 기록된 베데스다 연못에서 예수께서 38년 된 중풍병자를 고치는 장면을 화가는 절제된 그림언어로 당시의 이기적인 교회의 모습으로 화폭에 담아낸다. 38년 된 환자의 모습은 어쩌면 ‘바르톨로메’ 화가 자신일지도 모른다. 부모로 부터의 단절, 그것은 세상의 모든 상호의존적 존재로 부터의 단절을 의미했다. 심지어는 교회조차도 그를 용납할 수 없었다. 남루한 옷차림, 냄새나는 모습, 초점 잃은 눈동자, 그래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자기만의 골방으로 숨어 들어 그림을 그려내는 거였다. 그의 그림 속에는 사랑의 본질이신 예수님조차도 측은한 환자를 내려다보고 계신다. 접근할 수 없는 화려한 옷을 화가 스스로가 입힌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실제의 모습이 아니라 화가 자신이 겪었던 교회의 콧대 높은 이중적인 모습이요, 가난한 사람들을 용납하지 않았던 교회의 현실에 대한 몸으로 그려낸 신문고 였다.

화가가 경험했던 교회는 화려한 사람만을 좋아했다. 그것은 과거나 현대나 다르지 않는 슬픈 현실이다. 야고보서에도 그러한 내용을 담고 있다. 아름다운 옷을 입고, 값비싼 금가락지를 낀 사람이 오게 되면 좋은 자리에 앉게 하고,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오게 되면 서 있는지 자기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한다. 그것이 고아로써 화가 자신이 경험한 교회의 높은 문턱에 관한 처절한 울부짖음이었다. 이론적으로 분명 베데스다 연못엔 천사들이 내려와 물을 동하게 했다. 그 못에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어떠한 질병에서 고침 받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이론이었다. 교회는 결코 생애 전체를 중풍으로 앓아 누워있는 무능력 하며 무기력했던 자신을 향해 그 귀하고 거룩하며, 사랑스런 앞자리를 내어주지 않을 것임을 화가는 알고 있었다. 부강한 교회를 세우는데 힘이 있는 사람이 먼저 뛰어 들어갔을 것이다.

그럼에도 베데스다라는 교회를 떠나지 않은 것은 종교적 규율 때문이었다. 과연 이 시대의 교회에서도 베데스다 연못처럼 물이 동할 수 있을까? 그것이 어쩌면 장자가 꾸었던 이뤄질 수 없는 나비의 꿈이 아니런가. 주님이라면 화려한 옷을 입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리고 뻣뻣하게 선채로 고통 중에 있는 환자를 향해 손을 내밀지 않았을 것이다. 주님 당신이 무릎을 꿇고 환자를 부둥켜안았을 것이다. 화가가 추구하는 상호의존적 존재는 종교적 이론으로서의 사건이 아니라 환자와 함께 울어주는 것이다. 환자의 고통을 끌어 안아주는 것이다.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는 것이요,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는 것이요,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는 것이요, 헐벗었을 때 옷을 입혀 주는 것이요, 병 들었을 때 돌보아 주는 것이요, 옥에 갇혔을 때 찾아가 주는 것이다.

베데스다 연못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화가 자신도 이 땅을 다녀 간지 4세기가 훌쩍 지났다. 이제 남은 것은 베데스다 연못을 찾아가신 주님의 역사적 사실, 그 사건을 자신의 삶으로 엮어낸 화가 자신의 현장 고백, 그 그림 앞에 서 있는 오늘 내 자신이다. 내가 입었던 종교적 화려한 옷을 벗어 던져야 한다고 화가는 외치고 있다. 그리고 환자의 눈높이, 고통당하는 형제의 눈높이로 내려가야 한다고 질책한다. 그의 깨어진 토기 물명에 물을 가득 담아 그와 함께 거룩한 성찬식을 거행하라 말하고 있다. 설혹 나는 그의 병을 고쳐줄 능력은 없지만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의 병을 고쳐주는 능력을 구함이 아니라 그의 아픔을 끓어 안을 수 있는 아비의 심정일 게다. 그와 내가 상호 의존함으로 다음세대를 겸손하게 세울 수 있는 버팀목이요 울타리가 될 것이다. 나는 그로 더불어 세워지고, 그는 나로 더불어 세워지는 꿈을 현실화 시키는 주인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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