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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다와 마리아 집에 계신 그리스도

[아트저널]  박심원목사/ 예수마을커뮤니티교회 담임


교회의 모순과 진리의 실천에 대한 불균형 고발…


 마르다와 마리아의 모습 속에서 당시의 이기적인 교회의 모습과 또한 현대 교회의 모순과 진리의 실천에 대한 불균형을 읽어 낼 수 있게 된다. ‘벨라스케즈’는 교회의 모습이 주님의 무릎 앞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주님으로부터 배운 말씀을 실천해야 함을 그려내고 있으며 그렇게 하지 않았던 당시의 교회를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Christ in the House of Martha and Mary (1618년)
디에고 벨라스케즈(Diego Belasquez) 작품


21세기를 살아가는 과학 문명은 더 이상 발전할 것이 없을 만큼 최고 정점에 와 있는 듯하다. 배운다는 것은 누군가의 삶에 관함이다. 누군가는 그림을 그리고, 누군가는 음악을 만들어 내고, 누군가는 건물을 짓고, 누군가는 철학과 사상을 만들어 내고, 누군가는 소외된 이웃을 위해 섬기는 삶을 살게 된다. 결국 배움은 그의 철학, 그의 삶, 그의 생각을 체계적으로 배우는 일인 것이다.

기술 문명은 과거로부터 온 것이다. 짚신을 신고, 움막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에서 현대의 빌딩 숲을 창조해 낼 수 있었으며, 촛불과 같은 희미한 빛의 역사 속에서 현대의 화려한 빛의 문화가 만들어 진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배워야 하는 모든 배움은 과거로부터 와서 그 배움을 통하여 더 나은 미래를 건설할 수 있게 해 준다.

과거의 시간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살았던 선각자들의 삶의 고통과 고난의 흔적 속에 고스란히 배어 있다. 음악을 하는 이들에게는 과거의 삶의 흔적이 음악에 녹아져 있게 된다. 그래서 음악은 교양 차원의 아니라 삶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베토벤의 음악, 쇼팽의 음악은 단순한 장르의 음악이 아니라 그 당시의 삶의 현장에서 들려오는 생방송과 같은 생동감 있는 뉴스인 것이다.

과거를 정체 시켜 담아 놓을 수 있는 최고의 그릇은 화폭이다. 화가는 붓 하나로 시대 상황을 압축시켜 후세 사람들을 향해 묵언의 발언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림은 그 당시의 신문과 같은 것이다. 과거를 살아 보지 않았지만 그림 속에 묻어 나오는 묵향을 통하여 인생의 묵직한 삶의 원칙들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web1508-p25-picture벨라스케즈(Velazquez 1599 – 1660)는 스페인 바로크를 대표하는 유럽 회화의 중심적인 인물이다. 17세기 유럽은 르네상스 시대를 종식하고 바로크 시대를 열었던 시대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특징은 질서와 균형, 조화와 논리의 구조 속에서 세상을 지배했던 의식구조였다. 짐승은 천 년 전에도 그 방법대로 살아갈지라도 권태기를 느낄 수 없지만, 인간은 같은 것을 반복하게 되면 그것이 아무리 최상의 것일지라도 권태를 쉽게 느끼게 된다.

르네상스의 질서와 균형 잡힌 틀에 얽매이다 보니 새로운 사상, 새로운 예술에 눈을 뜨게 된다. 그 시대가 바로크 시대인 것이다. 바로크 시대는 르네상스 시대와는 반대 되는 사상이다. 질서와 균형을 새롭게 조명하고, 조화와 논리성을 흐트러트림으로 개성에 맞는 자유분방함과 불균형을 통하여 새로운 균형을 만들어 낸 것이다. ‘벨라스케즈’는 바로크 시대를 이끌어 갔던 중심인물이다. 그가 그려낸 모든 그림은 다른 이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던 화가 중의 화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화가를 존경한다는 것은 그 화가의 인격임과 동시에 존경받는 화가는 분명 인생의 획을 그은 사람임이 증명되는 셈이다.

‘벨라스케즈’는 그렇게 17세기 유럽의 바로크 문화를 이끌어 갔던 중심인물이 된다. 그는 ‘프란시스코 파체코’(Francisco Pacheco)의 수제자로 회화기법과 기독교 도상학(Iconography)을 배웠다. 도상학이란 상징성, 우의성, 속성 등 어떤 의미를 가지는 대상을 비교하고 분류하는 미술사의 한 방법이다. 화가 임의대로 선을 그리고 색감을 입히는 것이 아니라 선 안에 역사적인 의미를 담아야 하고, 색감도 그려 내야 하는 것이다.

‘벨라스케즈’가 1618년에 그려낸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계신 그리스도(Christ in the House of Martha and Mary) 작품은 기독교 미술사의 도상학의 대표적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벨라스케즈’는 화폭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해 지나친 아첨을 하여 화려하게 그리지 않았다. 실존하는 모습 그대로를 그려내려 했다. 마르다와 마리아에 대해서는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눅10:38-42)이기에 그 내용을 아는 이들은 관념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벨라스케즈’는 마치 사실과 같은 정밀화로 마르다의 마음과 그를 위로하는 어머니의 마음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성경의 내용과는 정 반대의 개념인 것이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말씀을 들었던 마리아에게 초점을 맞추게 된다. 예수의 방문은 단지 한 사람이 아니라 그를 수행하고 따랐던 제자들과 언제나 함께 했다. 마르다는 일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위대한 초대를 화력하게 장식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녀가 꿈꿨던 위대한 초대의 정점은 화려한 음식이었다. 몸이 부서지도록 뛰어 다니며 음식을 준비하는 반면 동생 마리아는 철없이 주님 앞자리에 앉아서 말씀을 경청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르다는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벨라스케즈’는 방안에 있는 그리스도와 마리아에게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부엌에서 분노하고 있는 마르다의 얼굴을 그려냄으로 당시 기독교 문화 뿐 아니라 현대 교회 문화에 대해 고차원적으로 고발하는 것이다.

‘벨라스케즈’가 살았던 시대는 성경을 바탕으로 발전한 기독교 문화가 세상을 지배했던 시대였다. 당시 스페인은 세계를 지배하려는 야욕에 차 있었다. 다른 나라를 지배하는 방법 중 가장 손쉬운 방법은 무력으로 강제적으로 진압하는 것이다. 강제진압은 언제나 많은 인명 피해가 따르기 마련이다. 약소국가들은 강대국에 의해 그들의 문화와 종교, 그들이 가지고 있는 삶의 틀을 짓밟히게 된다. 정복의 핵심은 바로 성경에서 나온 가르침이었다. ‘벨라스케즈’는 그러한 시대의 종교를 한 폭의 그림에 담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말씀을 듣는 것이 중요한가? 삶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한가? 야고보서에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 했다.(약2:26) 야고보서를 기록한 사도는 예수님의 친동생인 야고보이다. 그가 초대 교회의 수장이 되어 야고보서를 기록하면서 야고보서의 진정한 모델은 바로 육신으로는 형이었던 예수 그리스도였을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초월적인 존재이면서 언제나 삶의 환경을 떠나지 않은 지극히 인간적인 삶을 사셨다. 야고보서는 바로 그러한 예수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벨라스케즈’가 그려내려 했던 마르다와 마리아의 모습 속에서 당시의 이기적인 교회의 모습과 또한 현대 교회의 모순과 진리의 실천에 대한 불균형을 읽어 낼 수 있게 된다.

세상은 교회를 비판한다. 과거에는 교회가 세상을 책임졌으며 이끌어 갔다. 교회는 세상을 부둥켜 앉았으며, 세상의 어둠을 향해 작은 빛이 되었다. 그러나 현대 교회는 오히려 세상이 교회를 향해 걱정을 하며, 고차원적이 아닌 기초적인 도덕과 윤리를 실천하라고 강요받는 실정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벨라스케즈’는 교회의 모습이 주님의 무릎 앞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주님으로부터 배운 말씀을 실천해야 함을 그려내고 있으며 그렇게 하지 않았던 당시의 교회를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의 방문은 마리아의 집이 아니라 마르다의 집이었다. (눅10:38) 그의 집은 가난했다. 생선 몇 마리와 달걀, 마늘과 밀이 전부였다. 최악의 상황에서 최고의 만찬을 만들어내야 하는 마르다의 마음이 느껴진다. 그것이 어쩌면 우리네 인생인 것이다. 앉아 들음 보다는 그 들음을 실천하는 삶의 현장의 모습이 더 아름다운 것이다. 마르다의 분노의 찬 얼굴은 당시 화려하게 지은 교회를 향한 지탄의 분노였으며, 그 분노는 오늘까지 전해져 내려온다. 주어진 환경은 최악의 상황이지만 그 상황 속에서 최선의 빛을 비출 수 있음을 배우는 것이 과거로부터 배우는 미래 철학인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러하지 못하다. 과거의 습관이 미래를 지배하기 때문일 것이다. ‘벨라스케즈’도 그러한 고민을 했으며, 그의 고민이 오늘 나의 고민이 된다. 그의 고민은 마르다의 분노이며, 그의 분노를 통하여 의미 있는 인생을 배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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