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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

음악가 바흐, 개혁자 루터, 루터와 바흐의 만남

[유럽에서 보는 유럽이야기]  김학우 목사/ 마드리드 사랑의 교회 담임/ 56회

루터에게 가장 큰 영향을 받은 바흐

오는 2017년은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한 지 50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이며, 금년은 음악의 아버지 바흐가 출생한지 330년이 되는 해이다. 바흐는 루터가 세상을 떠난 후 139년 뒤에 출생했지만 종교개혁 이후 루터에게 가장 큰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사람이다. 철학자 에밀 시오랑은 “바흐가 없었다면 신은 그 권위를 잃었을 것”이 라고 말할 정도로 바흐를 격찬했다.

바흐, “루터의 신학을 음악으로” 표현하다.

근대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는 신학을 소위 음악의 전당에 올린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신학과 음악을 조화롭게 융화한 사람이 바로 바흐이다. 바흐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구원의 메시지를 음악으로 강렬하게 구현하려 했다. 바흐는 “음악의 유일한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개혁자 루터의 신념을 그대로 따랐다. 그가 작곡이 끝난 곳에는 “S.D.G.”(Soli Deo Gloria-하나님에게만 영광을)이라는 약자를 빠트리지 않고 꼭 적어 넣었다. 루터를 통해 받은 바흐의 신앙(고백)은 그가 20대에 쓴 짧은 장례식용 칸타타 곡(BWV 106 번곡, BWV 227번곡)에서 잘 드러나 있다. 서곡에서 그가 신구약 성경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졌음은 물론, 자신의 신앙고백도 명백하게 드러내었다. 제 2곡에는 바울이 아테네에서 고백한 “예수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 한다.”(행17:28)를 인용했으며, 시편 90편12절 “나의 살아갈 날들을 알게 하사 삶을 지혜롭게 살게 하소서!”가 독창 아리아로 들려진다. 제 3곡에서는 예수님께서 죽으시면서 “하나님이여! 내 영혼을 당신 손에 맡기나이다.”라는 말씀이, 그리고 제 4곡에서는 “모든 영광과 찬송이 주께 있다.”라는 합창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자”라는 고백으로 칸타타가 마쳐진다. 한국의 개혁신학자, 박형룡 박사가 “죽음과 내세를 다룬 종말론이 교의학의 면류관”이라고 한 말과 같이, 바흐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인 죽음 앞에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림으로 교의학의 면류관인 종말론을 그 누구보다 선명하게 잘 표명했다고 하겠다.

특히, 바흐의 신앙과 신학 사상은 그의 작품, 244번으로 분류되는 불후의 명곡 “마태수난곡”을 통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마태수난곡”은 기독교 신앙의 길잡이 일뿐 아니라, 메마르고 화석화되어 가는 기독교 신앙에 영적인 묵상과 깊이와 그리고 기독교 신앙에 참된 고백과 믿음의 뿌리를 잘 보여 주고 있다. 바흐의 교회음악에 감동을 받은 스웨덴의 주교 나단 죄더블럼은 바흐를 “제 5복음서 저자”라고 칭하였다. 이후 바흐는 제 5 복음서 저자로 불리는데, 이는 그가 복음서에 근거해서 많은 작곡을 했기 때문이다. 1870년 4월 30일, 무신론자 니체(Nietzsche)는 그의 제자 로데(Erwin Rhode)에게 “금주에 나는 바흐의 거룩한 마태수난곡을 세 번째로 들었다. 매번 말할 수 없는 감탄하는 마음으로 듣곤 한다. 아마 기독교를 완전히 잃어버린 사람이라 할지라도 바흐의 음악을 들으면 그것은 복음처럼 들린다.”라는 말을 남긴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루터, “바흐의 음악을 신학으로” 표현하다.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뛰어난 신학자이기도 했지만, 훌륭한 음악가이기도 했다. 루터의 최고 업적은 찬송가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코랄”(choral, 찬송가)이라는 장르를 탄생시킨 일이다. 독일 음악의 역사는 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루터가 고안한 “코랄”이 교회 음악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물론 독일 음악의 기초가 되었다. 이 위대한 코랄은 바흐, 마이어베어, 멘델스존, 바그너, 니콜라이, 라프 등의 작품에서 계속 연결되고 있다. 루터는 현재 독일 국가로 사용되고 있는 “내 주는 강한 성이요”라는 곡을 비롯한 40여곡을 작사, 작곡했으며, 수난곡과 오라토리오, 칸타타 등 예배 음악과 함께 사용되고 있다.

루터는 음악에 관해 집중적으로 글을 쓰지 않았지만, 자신이 스스로 발간하였던 찬송가의 서문들, 성경 주석, 설교문, 편지 등에서 그의 해박한 음악관을 알 수 있다. “나는 음악을 사랑한다. 왜냐하면 음악은 사람의 선물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며, 영혼을 즐겁게 하고 마귀를 몰아내고 죄 없는 기쁨을 일으키고, 이를 통해 분노와 욕정과 교만을 지나가게 하기 때문이다. 나는 신학 다음 맨 첫 번째 자리에 음악을 부여하는데, 이는 다윗과 모든 선지자들의 예를 보아 얻은 결론이다.” 루터는 일찍이 “성경 말씀을 제외하고 찬양받을 만한 것은 음악뿐이다.”라고 했다.

이런 이유로, 루터의 음악 연구가인 프리드리히 세멘드는 “마틴 루터의 음악적 뿌리는 음악의 아버지 바흐 때에 가서 그 절정에 달했다.”고 말하므로 바흐가 음악의 아버지였다면, 마틴 루터는 바흐를 있게 한 근원(source)이라고 말했다. 프란시스 쉐퍼는 “만약 마틴 루터가 없었다면 바흐도 없었을 것이다.”라고 했고, 그리고 데이비드 스카어는 “만약 루터가 바흐만큼의 놀라운 음악적 재능을 하나님께로부터 허락받았다면, 그는 16세기의 바흐로 기록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모두는 루터는 16세기에 우뚝 선 위대한 음악가로, 바흐를 낳게 한 스승이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바흐는 루터의 신학을 천부적인 재능으로, 영혼을 울리는 오선지에 표현했다면, 루터는 미래에 바흐가 표현하려고 했던 음악을 신학으로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루터의 신학과 바흐의 음악이 만난 “아이제나흐”

바흐는 아이제나흐(Eisenach), 현 루터거리 35번지에서 8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집은 현존하지 않고, 그 자리엔 1907년에 바흐박물관이 세워져 오늘에 이른다. 바흐는 태어난 지 이틀 후 루터교회의 전통에 따라 루터교인으로 등록 되었고, 8살부터 수도원학교에 다녔다. 그가 다닌 수도원학교는 200년 전,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다녔던 학교였다. 그러니까 루터와 바흐는 동문인 셈이다. 바흐의 고향 아이제나흐는 루터 어머니의 고향이며, 루터의 외갓집이기도하다. 루터에게는 학창(1498-1501)시절과 청소년기를 보낸 제 2의 고향이기도하며, 가장 소중한 스승들과 멘토들을 만난 곳이다. 루터는 아이제나흐를 기억할 때마다 언제나 “내 사랑 아이제나흐” (Meine liebe Stadt!)라고 애정을 표현했다. 특히, 아이제나흐 바트부르그 성은 루터가 교황청으로부터 파문당한 뒤 이단자로 몰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서 1521-22년 동안 이곳에 머물면서, 헬라어 신약성서를 독일어 성경으로 번역한 곳으로, 종교개혁의 꽃을 피운 장소이다. 루터가 보름스 제국의회에 오가는 길과, 1529년에는 마르부르크의 종교논쟁에 가는 길에, 그리고 노년 때인 1540년에는 지방감독의 집에 머무르며, 지난날 자신의 삶을 회고한 곳이기도 하다.

루터와 바흐, 두 거인(巨人)이 만난 작은 도시, 아이제나흐는 독일역사의 결정적인 순간마다 소중한 역할을 해왔고, 독일인들의 마음도 함께 했다. 1777년에는 독일의 문호 괴테가 이곳 바트부르크에 5주 동안 머물면서 예술가적 감흥을 받고, 독일 문학에 불을 지폈다. 또한 독일이 프랑스 나폴레옹의 식민지하에 있을 때에 500여명의 학생들이 1817년 10월 종교개혁 300주년 기념행사를 위해 모여 독일의 자유와 통일을 외치며 저항했던 곳이다. 그뿐 아니라 현 독일 사회민주당(SPD)이 1869년 바로 이곳, 아이제나흐에서 “독일 사회 민주주의 노동자 당”으로 시작한 곳이다. 루터에게 종교개혁의 밑거름이자, 바흐의 음악에 밑거름이 된 아이제나흐는 나폴레옹 치하에서 자유와 통일정신이 시작된 발원지이고, 독일 민족 정치사의 민주주의 사상이 흘러내린 곳이다. 그 가운데서 루터가 바트부르크 성에서 라틴어 신약성경을 독일어 성경으로 번역하여 출판(1534년)함으로, 독일과 전 세계인의 정신과 생각을 바꾼 개혁이야 말로 500년 동안 잊지 못할 사건이었다.

루터는 성경을 통해서 어두운 세상을 바꿨고, 바흐는 루터의 신학을 오선지에 담아 사람들의 영혼을 불타오르게 했다. 작은 도시, 아이제나흐에서 거인 두 사람이 만남으로 말이다. 지금도 바흐의 고향이자, 루터 하우스가 있는 아이제나흐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 “내일 지구가 망할지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으리라.” -마틴 루터-

필자: 김학우/
kmadrid@hanmail.net/스페인, 마드리드 사랑의 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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