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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크시론

아~ 땅바닥에 밟히는 하나님의 이름

[유크시론 170호]  이창배 발행인

진정한 개혁, 나부터 먼저이다

함께 한 몸이 된 교회들이 서로 사랑하는 일이 가장 큼에도 우리의 사랑은 고작 우리가 다니는 교회의 문턱도 넘어서지 못한 채 그 안에서도 당짓고, 헐뜯고, 시기하고, 미워하고, 갈등한다. 이웃교회와도 어떤가?

지난 수년 동안 유크는 표지 그림에 계속 배경을 달리하는 교회의 모습을 담아 오고 있다. 교회의 다양한 존재 양식이 무엇인지? 배경과 환경, 처해진 상황의 각기 상이함 가운데서 교회가 끈질기게 그 모습을 잃지 않는 것을 모티브로 삼고자 했던 이유이다.

또한 교회 자체가 늘 동일하지 않음도 마찬가지이다. 이렇듯 교회는 그 본질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 출발점이다. 십자가 없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저 건물일 뿐이다. 그러니 교회가 더 할 수 없이 귀하고 귀하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유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선명한 교회들을 사랑한다. 유크의 태생 또한 교회이고, 교회가 모태이기에 더 없이 사모하고, 사랑함이다.

그런데 교회들을 보자. 세상의 어둠이 짙어질수록 십자가의 빛이 더욱 밝아지며 교회가 드러나고 있는가? 그런데 정작 이 모습을 보면서 기뻐해야 할 것인가? 두려워해야 할 것인가? 유감스럽게도 그것이 11월을 맞이하는 본지의 고민이다.

근간 도처에서 교회의 얼굴에 부끄러움을 입히는 사건 사고들이 끊이질 않는다. 과연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인지 도무지 인정할 수 없는 일들이 백주에 벌어지는 세상이다. 그것도 버젓이 교회안에서 일어난다. 입이 열개가 되어도 할 말을 잊게 만들만한 일이다.

최근까지 대한민국 장자교단이라는 자부심을 내세우는 예장합동 총회 총무로 중추적 역할을 맡았던 목사가, 언젠가는 교회 강단에서 가스총을 허리띠에 차고나와 수많은 목사들이 모인 거룩한 총회를 향해 총을 빼어들고 만용을 부리더니만, 몇일 전에는 이웃교회를 찾아가 목양실에서 상대방 목사에게 백주에 칼부림을 하디니 도대체 뭘 어쩌자는 말인가. 그가 원하는 게 정말 무엇인가. 모름지기 더는 보여줄 것이 없는 끝판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선명히 각인되지 아니한 한 인간이 어디까지 나락에 떨어질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싶다.“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3:11)고 선언하시는 그 말씀이 하나도 그릇됨이 없음을 고백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들, 곧 믿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서 모독을 당한다”(롬2:24) 는 말씀이 부딪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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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더는 말자
이제 더는 말자.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막을 수 없게 된 그 원인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말 못한다. 이제 알만큼 다 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 그 뻔뻔함인 것을… 그런데 어디 그 일이 대한민국 땅에서만 일어나는 일인가? 다른 민족들, 열국들 가운데 일어나는 추문은 별개로 치더라도, 우리들 유럽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들 가운데에서도 일어나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저 소문이라고 치부해 버리면 차라리 편안할까? 불의한 일을 향해 차라리 입을 막는 것만이 유일한 대안일까? 알면서도 모르는 척, 듣고도 못 들은 척, 나와 관련된 직접적인 일이 아니면 괜찮아서 그럴까? 그것이 거짓이던지, 물질적인 것이던지, 불륜을 저지른 일이던지, 그것이 큰 일이던지, 작은 일이던지, 그러나 이것은 크고 작음과 무겁고 가벼움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과연 올바른가, 그릇된 가의 문제일텐데 눈치만 보다보니 정작 바른 말로 가르칠 때를 놓치고, 문제만 확산시키는 어리석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 사실 그 문제라는 것은 당사자의 문제이다. 다른 제 삼자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꺼리가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기저기 입소문처럼 떠도는 말들을 다 유언비어로 치부하기엔 너무도 적나라한 얘기꺼리가 들어있고, 발 없는 말이 천리간다는 속담처럼 이미 수많은 사람들의 입과 입을 통해 무수히 퍼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물러설 줄 모르는 그 철면피 함을 보고만 있어야 마땅한가? 그러고도 무슨 사역을 한다며,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일 수 있단 말인가, 이 참담함을 무엇이라 다 표현할 수 없어 답답하다.

그들 스스로가 부끄러움을 모르니, 아는 자들이 그 부끄러움을 가지고 십자가로 나아가 회개하자. 누가 옳아서 누구를 가리키고, 정죄하고 판단할 수 있겠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 없이 구속함도 없는 엄연한 진리 앞에 서서 다시금 돌아보아야 한다. 그 은혜를 잃어버린 자들 앞에 더욱 반듯하게 서서 십자가 복음을 단단히 붙잡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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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주님을 찾자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로 접붙여짐을 받은 성도들이라면 마땅히 오늘 우리 주님의 교회가 모독을 당하는 일에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 곧 우리가 주님을 사랑함을 회복해 가는 첩경이다.

오늘날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라는 자기 각성이 그 어떤 때보다 필요하다. 본지의 보도도 있었지만 이미 세계적으로 지구상에서 핍박을 받는 대다수의 사람들 가운데 80%는 기독교인들이며 전세계 22억의 기독교인 중 어떤 형태로든 괴롭힘을 당하는 비율이 1/3 정도라고 한다.

유엔은 기독교를 가장 핍박받는 종교로 발표했다. 오픈도어에 의하면, 50개의 국가에서 1억명의 기독교인들이 억압을 받고, 사회에서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 통계상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핍박을 당하는 종교는 바로 기독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비극적인 핍박에 대해서 철저하게 무관심을 당하고 외면을 받는 종교도 기독교이다.

생각해 보라. 만일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누군가 사회적인 범죄, 아니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질렀을 때와 어떻게 비교가 되는지. 그러나 더한 비극은 바로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에게서조차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흘리심의 의미가 퇴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피값으로 사신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교회는 그 분의 몸이 됨을 그저 입술로만 고백하는 데에서 머물러 있다. 함께 한 몸이 된 교회들이 서로 사랑하는 일이 가장 큼에도 우리의 사랑은 고작 우리가 다니는 교회의 문턱도 넘어서지 못한 채 그 안에서도 당짓고, 헐뜯고, 시기하고, 미워하고, 갈등한다.

이웃교회와도 어떤가? 나만 뜨겁고, 나만 기쁨이 충만하면 되는가? 결국 내 교회주의를 헐어버리지 못하는 옹졸한 모습이 교회의 이미지로 굳혀졌다. 멀리 볼 것도 없이 바로 이로써 하나님의 이름이 세상으로부터 모독을 당하게 된 그 출발이 된다. 이제 우린 어찌할까?
우리가 각성하자. 미스바로 모이자. 회개하자. 다시 주님을 찾자.

이 달의 말씀 | 렘 29:11~13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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