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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통독 25주년- 평화통일은 하나님의 선물

[독일시사리뷰]  이성춘 목사, 프랑크푸르트국제교회/ 10회

통독 이후,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의 연약함은 깊어지고…

2015년 10월 3일은 독일 평화통일 25주년이 되는 날로, 독일에서 70개 지역에서 독일교회와 기관들이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렸다. 11월 9일은 동서의 철의 장막, 곧 장벽이 무너진 날로 기념하고 있다. 1989년의 독일의 평화통일, 철의 장막의 붕괴는 세계역사에 있어서 새로운 시대, 곧 21세기를 여는 역사의 분기점을 이루었다. 철의 장막의 붕괴는 그 동안 축적된 핵의 불꽃이 아니라 라이쁘치히의 니콜라이 교회에서의 평화통일을 위한 월요기도회의 불꽃으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선물로 이루어졌다.

1989년의 독일의 평화통일, 철의 장막의 붕괴는 세계역사에 있어서 새로운 시대, 곧 21세기를 여는 역사의 분기점을 이루었다. 철의 장막의 붕괴는 그 동안 축적된 핵의 불꽃이 아니라 라이쁘지히의 니콜라이 교회에서의 평화통일을 위한 월요기도회의 불꽃으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선물로 이루어졌다.

류덴사이드의 시장인 디터 드쩨바스는,  25년전에 통일의 과정이 평화적으로 이루어진 것을 깊이 감사해야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 일에 교회의 그룹들이 특별히 큰 공헌을 하였다고 인정했다. 그리고 이 시장은, 통일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감사하며, 현재의 난민들을 섬기면서 그 감사의 마음을 되돌려주어야한다고 강조했다.

라이프찌히의 니콜라이 교회에서도 700명이 참여하여 감사예배를 드렸다. 동독의 공산권치하에서 “칼을 쳐서 보습으로”라는 활동의 창시자였던 드레스덴의 하랄드 브레트 쉬나이더목사는 설교중에,  1989년의 평화혁명과 일년 후의 통일은 당대에 실현가능한 것으로 전혀 생각하지 않았지만, 실제로 이루어졌다고 말하면서 “우리는 오늘날에도  우리 나라 안에서 진행되고 있는 세속화의 물결에 정면으로 반대하여 다가오는 하나님을 염두에 두어야한다.”고 지적했다.

통독이후에 인구이동에 대한 염려가 컸지만,  매년 동독 젊은이 10만여 명이 서독으로 이주해 갔을 뿐이다. 2012년 이후터는 상호 이주자가 비슷하게 균형을 이루었다. 동서독 사람들의 평균수명도 서로 비숫해졌다.  1991년 당시 동독의 경제력은 서독의 43% 의 규모였는데,  지금은 72%로 성장을 했다. 임금수준도 1990년에 서독의  지역의 49%였던 것이 이제는 83%까지 상승했다.

I. 동독교회내에서의 평화의 운동

1) 공병대 : 평화를 만들어가는 역군들
2014년은 독일에서 공병대가 탄생한지 50년이 되는 해이다. 서독과는 달리 동독에서는 군복무 거부를 할 수 없었지만, 1964년에  교회가 나서서, 총 대신에 삽을 들고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건설군인 제도를 도입하게 했다. 이것도 거부하면 2년 동안 감옥생활을 해야했다. 공병대는 군복 어깨 위에 군용 삽이 그려져 있는 표시로 일반군인들로부터 구분되었다. 이들은 동독시절에 군복무를 거부하는 용기를 가진, 냉전 속의 전쟁위기 앞에서 평화를 만들어가는 역군이 되었다. 그리고 산상수훈에 나타난 평화를 실천하는 자들이었다.

2) 평화운동 : 칼을 보습으로
“ …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미가 4,3) 러시아의 조각가 예브게니 우체티치는 1958년 브뤼셀의 세계전시회에 한 조각품을 만들어 전시했다. 한 남자가 칼로 쟁기를 만드는 모습이다. 원본은 모스크바에 있고, 러시아의 대통령이었던 크루쉬츠샤가 1959년에 한 복사본을 유엔에 기증하여 뉴욕에도 하나가 세워져있다. 이 조각품을 하랄드 브테트쉬나이더 목사는 1981년에 책갈피로, 옷에 장식으로 붙이는 것으로 10만개씩 만들어 청소년들에게 배부하여 평화운동을 동독 내에서 일으켰다. 이 운동으로 젊은 청소년들이 “칼을 보습으로”라는 성경의 이야기를 대화의 주제로 삼았고, 거리에서, 학교에서 서로 이야기하게 되었다. 이 평화운동으로 체제 유지에 큰 위협을 느낀 국가와 교육당국의 방해와 억압도 만만치 않았다. 소지자에게는 학교수업참가와 대입학력고사를 금지시켰고, 교사에게는 해고를 했다.

3) 월요촛불 기도회
라이쁘찌히의 니콜라이교회의 크리스챤 퓨러목사는 1982년 부터 매주 월요 기도회를 이끌어왔다. 이 기도회에서는 언제나 산상수훈이 중심주제가 되었고, “비폭력이 교회 내에서만 머물려 있도록 하지 말고, 그것을 거리로, 삶의 자리로 가지고 나아가자”는 요청이 반복되었다. ‘기도와 실천, 교회 안에서와 밖에서, 교회의 강대상에서와 거리 일상에서’가 함께 역사하였다. 1989년 10월 9일에 이 교회를 중심으로 라이프찌히의 4개 교회가 7만명이 모인 촛불기도회와 그 행진을 이끌었다. 이때에, “우리는 모든 것들을 예상하고 준비하였지만, 촛불과 기도에 대하여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호스트 진더만은 고백하였다.

평화행진을 막는 현장 지휘관은 돌과 화염병으로 다가오면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촛불과 기도로 다가오는 시민들에게는 어떻게 하라는 명령을 받지 못한 것이다.  촛불과 기도의 평화행진으로 라이쁘찌히의 모든 가게들 가운데서 깨어진 창이 하나도 없었고, 이때에 이긴자도, 굴복당하여 진자도 없었다. 모두가 다 존중되었고 승리자가 되었다.  피흘림이 없는 평화통일이 이렇게 교회의 교회의 기도회로 부터 시작되었고, 이루어진 것이다.

4) 원탁회의
브란덴북어그의 주지사인 디이트마르 보이드케는 25년전의 동독지역의 중앙 원탁회의 의미를 높이 평가했다.  공산당과 야당의 정치가 각 15명과 진행자로서 목사 3명이 참여하여 이루어진 원탁회의는  1989년 12월 7일에 국회모임의 전단계의 위원회로서 모임이 되었다. 이 중앙원탁회의 공개적인, 뜨거운 논쟁의 주제는, ‘어떻게 동독의 민주화 과정을 이끌어갈 것인가’ 였다.

마틴 미카엘 파샤우어 목사는 진행자로 이 회의에 참석하였고,  시편 23편의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시고” 을 음미하면서 진행하였다. 그에 의하면, 원수는 사람이 아니고 폭력이었고, 평화롭게 거리에 밀려 나아오고 있는 모든 국민에 반대하는 폭력이었다. 그래서 그는 비폭력은 거리에서의 모든 데모대에게 중요했던 것 보다, 이곳 원탁회의의 참석자들게는 더욱 더 중요한 것이였다고 증언하하였다.

원탁회의는 민주적인 독일로 진행하는 길목에서 참여자들에게 인내의 시험을 요구하는 중요한 자리였으며, 이 회의는 기적적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찬양함으로 마무리 되어졌다. 신학자이며 시민권리 주창자인 리챠드 쉬레더는 중앙원탁회가 국가내전을 방지하였고, 독재가 무너지는 것을 가능케했다고 증언한다.

5) 목사들의 공화국!
베를린의 신문인 Tageszeitung 는 당시에, “구 동독지역은 목사들의 공화국이 되었는가?”라고 질문했다. 주간신문인 DIE ZEIT 는,  어떻게 지구상의 가장 작은 나라 땅, 불경건한 땅에서 순수한 기독교인들이 주로 통치하게 되었는가?  라는 질문을 제기하였다.

그것의 답변은, 목사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구 공산권 정권에 협력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4분의 3의 인구가 무종교인인 이 지역에서, 모든 주지사와 연방정부 안의 모든 영향력있는 사람들이, 그리고  통독이후 15년 동안에는 국회의원들 중 최소 50%가, 이곳에서 선출된 정치가들의 70%가 기독교인들이었다.  구 동독지역에서는 정치참여가 여전히 큰 수고로 여겨지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무거운 짐을 스스로 지고 갈 때에,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지지해주고 있는 것이다. 평화적인 혁명이 이루어진 그 때 뿐 아니라 오늘까지도 많은 기독교인들의 참여가 독일의 하나됨에 귀한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

II. 서독교회들의 협력

1)  교회의 후원자, 파트너 관계
1949년 8월 30일 동서독의 총회와 개교회, 교회의 섬김단체 사이에서 후원자 관계가 결성되었으며, 이것이 동서교회의 파트너 관계로 발전하였다. 역사가인 안케 실로몬(베를린)은 동서독이 분리되어 있을 때에, 양교회들은 중요한 파트너 관계를 유지하였다고 증언한다.

서독의 파트너 교회는 동독의 파트너 교회에게 과자, 커피와 의복들과 교회의 건축 리모델링을 위한 자재들과 기독병원을 위한 현대화된 의료기구들을 후원했으며,  심지어 감옥에 갇힌 자들까지도 돈으로 사서 서독으로 데리고 갔다. 서독의 교회들은 동독교회들을 지원하면서도, 동독교회들을 통해서 깊은 경건심을 배울 수 있었다.

서독지역의 목회자들은 사례비의 1% – 3%를, 심지어 5%까지 동독지역의 동료목사들을 위해 후원했다. 필자는 튀빙엔에서 잘 알고 지내는 스타인네스텔 목사 가정이 은퇴하고 10년이 넘어었도, 통독이후 20년이 다 되었어도,  동독지역의 파트너 목사 가정에게 해마다 절기를 따라 정성스럽게 선물들을 보내는 것을 보아왔다.

쵸센- 프래밍의 교구감독인, 카타리나 푸리안은, 양 교회들의 파트너 관계는 동독의 정치 지도자들이 원했던 동서독의 분리를 무력하게 하였다고 보고하였다.

동서독교회가 상호 원활한 관계를 유지한 곳에는 통일 이후 상호 정죄나 불신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서독교회는 통독 이후에 동독지역에 200개의 미션스쿨을 세웠고, 2000개의 교회건물들을 재건축하거나 리모델링을 해주었다.

동독지역에서 젊은이들이 기독교인이 되지 않았지만, 교회가 제공하는 직업현장, 디아코니 현장에서 일하려는 관심을 가짐으로, 교회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2)  디아코니 기관의 역활
동독 주민을 위한 섬김에는 서독이 1963년부터 1990년까지 33,755명의 동독 정치범들을 돈으로 사서 서독으로 데리고 온 것 같은 비밀스러운 일들도 있었다. 1963년에는 한 명당 15,000에서 50,000 마르크까지 지불하였다. 동독은 이 댓가로  3,400 백만 데마르크에 해당하는 원조물을 받았다. 서베들린의 변호사인 유르게 스탕에와 동독의 파트너인 볼프강 포겔이 양국을 대표해 중재해 갔다.  처음에는 현금으로 나중에는 현물, 물자로 이 비용을 지불하였으며,  독일교회 협의회에 속한 다아코니 기관 (슈튜가르트)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3)  2015년 9월 5일에 베를린( 프리드리히하인) 의 부활교회에서 “우리는 서로 만났었다 – 동서독 안에서의 국경을 넘어선 교회의 상호관계”라는 주제의 모임에 초대된 200여명이 기독교인들이 함께 모였다.

참여자들은, 자신들이 동서독 교회들의 파트너관계를 통해 분단시대에, 국가의 통일을 미리 선취하여 경험했다는 것을 공감하였다.   행사를 주관한 교회의 감독인 마르쿠스 드뢰게는 이러한 교회의 파트너관계는 독일사람들로 같은 민족이라는 소속감을 강하게 해주었다고 회상했다. 그들은 분리되었지만, 서로 연대감을 가지고 살아왔고, 그것은 통일 후 25년이 지난 후인 지금도 좋게 기억 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III.  장벽이 무너짐으로

1)  포로된 자들이 해방을
스테판 라이페목사는, 보통 장벽이 무너졌다고 단순하게 말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장벽에 뛰어 올라 넘어간 것이라고 말한다. 장벽이 무너지면서, 셀 수 없는 실향민 가족들이 서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28만명의 양심범 수감자들이 감옥에서 풀려났고, 자유의 품으로 돌아왔다. 사실은 동독주민 전체가 쇠창살 없는 그들의 감옥에서 풀려난 것이다.

공산정부가 감옥에 갇히게 된 부모들의 자식들을 강제로 입양시킨 자녀들이 1만명이 되었는데, 이들이 부모를, 부모는 이 자녀들을 찾게 되었다. 수천명의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강제로 사회주의 교육을 받았던 청소년수용소를 떠나게 되었다. 토르가우의 청소년수용소는 4천명을 수용했던 가장 큰 장소였으며, 그곳은 독일 중앙방송을 통해 소멸장소로 불리워졌다.  

2)  국경지대는 산책로로
동서독의 국경지대는 산책로, 자전거길로 변모되었고, 자연보호지역이 되었다. 25년이 지난 지금은 그곳이 어떤 곳이었는지 사람들의 뇌리에서 거의 잊혀져가고 있다.  하지만 그 국경을 넘어 서독으로 탈출하려다가 총을 맞고 죽은  희생자들의 가족들에게는 그곳은 여전히 잊을 수 없는 지역이다.

1949년 동서독의 국경지대가 세워지고, 1961년 8월 12일 밤부터 13일 새벽 사이에 서베를린을 포위하는 장벽이 세워졌고, 그 길이는 총 155㎞, 남북으로 가르는 장벽의 길이는  43.1km 였다. 동서독이 분리된 처음 몇년은 해마다 이십만명씩 동독지역에서 서독지역으로 피신하여 갔으며, 이렇게 탈출한 사람들이 2,686,942명이나 되었다. 그런데 장벽이 설치된 후에는,  탈출에 성공한 사람들이 일년에 7백명 밖에 안되었다. 80년대에 들어와서는 그것도 150명 정도에 불과해졌다.  이렇게 탈출에 성공한 사람은  5천75명이었다. 첵크포인트 챨리의 집 박물관의 자료에 의하면, 장벽을 넘다가 사살되거나 죽은 사람이 1065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독일 정부가 공식통계로 발표한 사망자는 270명이다.

3) 다큐영화, 가족
통독 25주년을 맞이하여, 스테판 와인에르트 감독은, 국경을 넘어 탈출하다가 사살당한 자들의 애환을 다루는  다큐영화  “가족 (Die Familie)”를  제작하였다. 이 영화는 1961년에서 1989년 11월 9일까지  국경지대에서 총에 맞아 죽은 숫자가 1720여 명인데,  어떻게 그들이 죽어갔는지, 어디에 묻혔는지 지금까지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고 보고한다. 관련된 모든 자료들이 페기되어 사라져버린 것이다. 당시에는 국경지대에서 죽은 가족을 위한 장례식도 감시를 받았고, 장례식에 참여한 사람들도 직업상 불이익을 당했다. 이런 억압된 분위기에서 가족들은 의혹, 분노, 감시, 억압 등에 대하여 태연한척하며 분노를 삼키며 살아야했던 것이다.

당시에도 국경을 넘는 자들을 사살한 수비대들을 법으로 처벌하는 조항이 있었지만, 그들은 단지 2년 기간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을 뿐이다. 국경지대를 수호하는 임무가 국가의 시민의 목숨보다 더 중요한 최고의 가치로 되어 있었다.  통독된 이후에 동독 국가의 수반이었던 에릭 호네커와 에곤 크로위쯔도  수사를 받았지만,  어떤 무거운 처벌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수사했던 검사들은 그 상황을  지금도 아쉬워하고 있다.

이 다큐에 의하면, 통독 25년이 지난, 지금도 유가족들은 복수와 원수갚음을 한시도 잊지 못하고 있다. 한 어머니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말하였고, 한 희생자의 동생은, 사살자들을 용서해야하는가? 에“나는 100가지 다른 것들은 다 용서할 수 있지만, 이 일은 전혀 다른 일이다.” 라고 대답였다.  당시 국경수비대였던 한 사람은“자신도 국가 시스템의 희생자이며. 그때에 자신은  겨우 19살된 군인이었다”고 말한다. 그 국경 수비대들도 명령체계의 마지막 수행자였던 것이다.

IV. 문화와 편견의 장벽을 넘어서서

분단된 독일에서, 칼로 보습을,  비폭력 등과 같은 평화와 자유를 만들어내는 성서의 선포들이 국가의 독재 권력에 반대하는 과정을 촉발시켰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그의 손을 펼치셔서 촛불과 기도로 독일을 자유의 세계로 이끌어가셨다.  

작센주의 한 도시인 켐니쯔의 정치가인 프르쯔 헬레는,  동독에서의 평화혁명과 장벽의 무너진 이후 25년이 지났지만, 동서독 사람들 머리 속에는 장벽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서로에 대한 편견들의 장벽이 존재하고 있어서 1989년의 평화혁명이 온전히 성공적으로 이끌어 가는데 방해물로 남아있는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문화, 세대, 세계관과 사회적인 환경 속에 존재하고 있는 새로운 장벽들을 넘어서도록 노력해야하는 것이다.  

왜 동독이 목사 공화국이 되었는가라는 주목을 받을 정도로, 동독지역의 교회와 목사들이 사회적 책임을 잘 감당하였다. 그러나 목사들이 정치의 중심에 서서 지상의 나라를 이루어갈  때에,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의 연약함은 깊어지고 있다. 통독 이후에 동독지역은 선교사들의 무덤이 되었다고 말할 정도로 복음사역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번은 다른 선교단체들이 집의 문을 두드렸다고 할 정도의 선교적 역량이 집중되었지만,  새로 시작된 교회들은 10에서 40명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기존의 교회들도 축소되고 성도들이 줄어가고 있다. 이제 목회자들이 이제 사회를 향한 관심과 역량을, 신앙과 하나님의 나라 선포에 집중하여 복음의 책임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통독 25주년을 맞이한 독일은 이제 유럽을 향해 다가오는 난민들을 환영하고 그들을 섬기는 시대적인 사명 앞에 서있다. 자신들을 장벽들을 넘어 서독지역으로 몰려가게 했던 하나님이, 난민들을 서유럽의 장벽을 넘어서 독일로, 서유럽국가로 보내시고 계신다. 독일에 통일을 선물한 하나님은 이제 독일에게 난민들을 선물로 주시고 계신다. 독일 사람들이 이 하나님의 손길과 하나님의 기회에 순종하는 동반자들이 되어가야 한다.

이 지구상에 아직도 분단되어 남아있는 나라는 키푸루스 ( 터키에 속한 북 키푸르스와 그리스에 속한 남키푸르스) 와 우리나라 대한민국이다. 특별히 우리 한국 기독교인은 우리 나라를 향한 하나님의 손길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그 손길을 기다리면서, 우리 한국교회들은 동서독의 교회들처럼 북한의 주민들과 신앙인들을 위한 후원자로, 파트너로 함께 연합하여 나아가야한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이루어진“하나님과 함께 장벽을 넘는다”는 모토와 함께 진행된 통독 25주년의 감사의 행사는 한국의 통일을 위한 기도도 포함되었다. 독일인들도 한국의 통일을 위해서 기도하며 기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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