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오피니언 > 시사칼럼 > 또 다시 파리에서 테러 사건, 세계가 슬픔 잠겨
시사칼럼

또 다시 파리에서 테러 사건, 세계가 슬픔 잠겨

[포커싱프랑스] 채희석 목사/ 파리 모두 제자교회 <9회>

또 다시 파리에서 테러 사건이 “무엇을 위한 폭력인가?”

이슬람 혐오 현상이 증가하는 이 시점에, 또 하나 집고 넘어갈 것이 있다. Daesh는 이슬람의 본질을 보여주기 보단 이슬람의 기생충과 같은 존재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서구의 적일 뿐만이 아니라 이슬람 세계를 좀먹는 존재이기도 하다.

위협 받는 프랑스와 유럽
2015년 11월 13일 주말이 시작되는 금요일 밤, 자유롭고 평온한 파리 10구역과 11구역, 파리에 정착하여 수년간 살아온 익숙한 곳이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레스토랑에서 외식을 즐기는 파리지엥들, 바타끄랑 콘서트 홀에서 음악에 흥취 된 젊은이들, 프랑스-독일 국가대표 축구 경기로 열기에 가득 찬 파리 북부 외곽의 쎙드니 축구 경기장…. 바로 이 곳에서 축제의 폭죽 소리가 아닌, 인간 자폭 카미카즈의 폭음과, 카라슈니코브로 쏘아대는 총소리가 자유와 낭만의 파리를 한 순간에 깨버린다. 파리와 쎙드니의 여섯 곳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조직적인 테러가 일어난 것이다. TV를 통해 팔레스타인이나 아프가니스탄에서나 볼 수 있었던 경악할만한 테러 행위가 유럽의 중심지 파리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같은 해 1월 <샤를리에브도> 테러 사건은 특정 반이슬람 언론사나 유대인이 대상이었지만, 이번 사건은 프랑스인 자체를 향해 문자 그대로 묻지마학살이 벌어진 것이다. 130명 사망자, 300여명 부상자, 그리고 온 나라가 이 무분별하고 냉혈적인 테러 앞에, 충격과 공포에 빠진다.

이번 파리 테러사건이 주는 심리적 효과는 일파만파로 퍼지고 있다. 불안과 두려움이 프랑스와 유럽의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다. 시리아와 이라크에서 이슬람 무장세력으로 떠오른 소위 이슬람국가조직(IS, Daesh)에 대한 공습에 참여한 프랑스는 물론 보복을 예상하고 있었다. 더 나아가 지난 10여년 전부터 국내외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이슬람 급진주의자들의 위협이 현실화된 것이다. 동 테러 사건을 계기로 프랑스 정부는 시리아에서 훈련 받고 급진적 이슬람주의자가 되어 돌아온 일부 이민세대 젊은이들을 더욱 분명하게 테러 용의자로 간주하고, 경우에 따라 이들을 추방할 수 있도록 국적법 관련 헌법도 수정하고자 한다. 유럽에 사는 무슬림에 대한 혐오와 오명을 씌우는 행위가 날로 증가하고 있으며, 절망의 늪을 벗어나 유럽으로 오는 난민 정책에도 제동이 걸리고 있다. 파리 테러사건이 주는 더 근본적인 위협은 Daesh는 유럽 변두리 국가나 먼 나라에만 존재하는 것이 더 이상 아니며, 이젠 바로 유럽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폭력은 시작일 뿐이라는 것이다.

전쟁 선포.. 그러나 적은 누구인가?
재난이 머리 위에 임한 것이다. 프랑스 정부는 주저하지 않고 나라가 전시 상황이 되었음을 선포한다. 즉각적인 국내 비상 상태 선포뿐만이 아니라, 유엔 안보리의 동의를 얻고 시리아 IS에 대한 공습의 강도를 높인다. 이슬람 테러집단 Daesh를 응징하겠다는 순결하면서도 단호한 결단이자 불가피한 조치이지만, 왠지 끝이 안 좋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그 이유는 이 전쟁은 군사력과 외교력을 앞세운 기존의 전쟁과는 다른 면모가 있고, 새로운 성격의 적을 맞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와 서구권 전체를 위협하며 테러를 일으키는 적은 눈도 없고 귀도 없는, 마치 매끈한 입방형 가면을 뒤 짚어 쓴 짐승과 같다. 그들은 불과 2년전(2014)에 제정 일치 권력을 아울러 갖는 새로운 칼리파(Califat)국가 선포를 주장하면서 <이슬람 국가>(IS)를 자처하는 무장단체이다. 먼저, 이들은 “국가”라고 자처하고 있다. 이 점에서 IS는 단순한 테러조직인 알카에다와 달리하고 있다. 국가는 기본적으로 영토와 공권력과 백성으로 구성이 된다. 막스 베버(Max Weber)에 의하면, 국가란 합법화된 폭력을 행사하여 백성이 자신의 권력에 순종하게 만들 수 있는 제도 또는 메커니즘이다. 이슬람 국가(IS)로 자처하는 이 존재는, 서구적인 관점에서 보면, 제정일치 전체주의 국가인 셈이다. 같은 맥락에서, 유럽연합(EU)은 일종의 전체주의식 합정 (governance)제도와 비슷하여 상호 유사한 점이 없지 않다. 다만 IS가 다른 전체주의 국가와 다른 점은 히틀러, 마오, 스탈린 등과 같이 인간의 모습으로 보이는 정치 지배자가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좇는 백성을 불러 모으며 그들이 “광신자”가 되게 하여, 자신을 대적하는 전 세계 나라를 향해 폭력을 행사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이처럼 Daesh는 국경이 없는 나라이다. 전자통신망을 통해 전세계적으로 소속될 백성을 모집하고 있어, 기존의 지정학적 국가 개념을 벗어나고 있다. 일종의 on-line 국가이며, 이념과 종교 상의 국가라 말할 수 있다. 따라서 한 지역(시리아)을 공습하고 지상군 파병하여 어느 정도 그들의 세력을 약화시킬 수는 있어도, 승리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그들이 일으키는 폭력이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진다는 것이다. 또 그들의 범행 성명은 마치 말세에 나타날 대 전쟁을 암시하는 종말론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사실 IS에 의해 저지르는 악은 우리의 언어를 넘어서서 그 잔인함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IS는 전세계에서 죽지 못해 살고 있는, 마치 상속인조차 없는, 젊은 영혼을 소집하여 그들을 세뇌 교육시키고, 죽음의 전선으로 내몰고 있다. 그리고 그런 죽음에서 그들의 인생의 의미를 부여시키고 있다. 특히 그들은 초대교회 시절부터 전통을 지켜오던 중동 여러 나라의 많은 기독교인들을 대량 학살하여 자신들의 신에게 피의 제물로 주고 있다. Daesh뿐만이 아니라 이와 유사한 보코하람(Boko Haram)도 기독교 어린이들과 여인들에게, 또 비이슬람교도를 향해 냉혹하게 무차별 학살을 자행하고 있다. 이는 다름아닌 마귀의 셀피(selfies, 자가 촬영사진)인 것이다. 전투기와 총으로 물리칠 수 있는 적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이 세상의 악을 반영하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올해는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집단학살)가 터키의 옛 왕국 오스만제국에 의해 범행된 지 백 주년(1915)이 되는 해이다. 아마도 지금부터 또 다른 백 년 후에는 Daesh에 의해 저지른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의 기독교인 대학살을 추가적으로 기념하게 될 것이다.

결과보다는 원인을 찾아야…
또 Daesh는 상처를 입고 신음하면서 날뛰는 여러 뿔이 달린 짐승과도 같다. 사실 이 땅엔 서로를 죽이고 갈등을 야기하는 메커니즘이 끊임없이 있었지만, 특히 지난 60여년 전부터 서구와 이슬람 간의 갈등은 노골적인 갈등과 폭력으로 나타나고 있다. 물질주의가 지배하는 서구 세력과 이들을 부정하게 여기는 급진적 이슬람주의 세력 간에, 종교적 순종을 보이는 히잡을 쓴 여인과 맨 머리에 길거리를 활보하는 여인 간에, 동양과 서양 간에, 북과 남 간에, 갈등의 골은 깊어지고 있다.

하지만 서구는 항상 정의롭고, 이슬람세계가 항상 불의한 것인가? 오히려 정반대의 경우가 많다. 중세의 십자군이 지중해를 따라 이베리아 반도에서 바다 건너 시리아에 이르기까지 무슬림을, 칼과 창으로, 몰아낸 것을 마치 연상케 하듯이, 현대로 접어들어가는 19세기 중 후반에서 20세기 초반까지 유럽 서구 국가는 이슬람 영토를, 무력과 뛰어난 기술력으로, 정복하고 식민지화하였다. 이슬람 성지는 더럽혀 지고, 무슬림은 기독교 영성이 아닌 무기의 힘 앞에서 굴욕을 당하고, 경제적으론 착취를 당한 것이다. 이에 대해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Arnold Toynbee)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 평가를 하고 있다. “현대 서구가 이슬람 세계를 포위하듯 한 이런 공격은 현재 두 문명 간의 갈등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앞으로 보다 광범위하고 보다 욕망에 넘치는 세력으로서 서구 문명이 하나의 커다란 사회 속에 결집된 온 인류를 향해, 그들이 갖고 있는 현대 기술에 힘입어, 인간이 육지와 바다와 공중에서 개발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상대로 통제하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작금 서구가 이슬람에게 행하는 것은 동시에 다른 문명 -동방정교, 인도, 극동 세계-과, 또 현재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있는 생존하는 원시 사회와, 심지어 열대 아프리카의 구석진 곳에까지 동시에 같이 행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60년 전, 이슬람 국가들은 하나 둘씩 탈식민지화 되었지만, 식민지 지배가 준 상처는 무슬림들에게 여전히 깊이 남아 있다. 왜냐면 식민지화(colonization)란 조국을 상실하는 것이며, 자신을 황폐하게 만드는 것이고, 인격을 가진 개인으로서나 또는 백성으로서, 심지어 창조주의 심히 보기 좋은 존재로서 사는 것 자체를 금지 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로 이슬람 세계의 반서구적 정서에 대해 역사적 이해를 할 필요가 있다. 물론 피식민지 백성이 느끼는 이런 정서를 모를 리 없는 서구는 기득권 세력 중에서 소위 친 서구 타협주의자 “헤롯당”을 지원하면서, 반 서구파 “혈열당”을 견제시키고자 했고, 대부분의 이슬람국가들은 아직도 이 양 세력 간의 갈등과 내전으로 몸살을 겪고 있다. 우리나라 일제 식민지 역사가 남긴 상흔도 이와 유사하다. 이런 의미에서 일제의 한반도 식민지배가 하나님의 뜻이고, 식민지배가 있었기에 고속도로와 민주주의가 있다고 말하는 자는 요즘 횡행하는 표현을 빌리자면 “혼이 없거나 잘못된 자”이거나 “역사를 모르는 자”임에 틀림이 없다. 역사를 거슬러 살펴 보면서, 눈에 보이는 현상보다 근본 원인을 찾아가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슬람 혐오 현상이 증가하는 이 시점에, 또 하나 집고 넘어갈 것이 있다. Daesh는 이슬람의 본질을 보여주기 보단 이슬람의 기생충과 같은 존재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서구의 적일 뿐만이 아니라 이슬람 세계를 좀먹는 존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알카에다가 초기엔 미국의 지원을 받아 훈련을 받고 반소 세력으로 활동하였으나 결국 배신당한 후 테러집단이 된 사실이나, 석유 채굴권을 보호하기 위해, 대량살상 무기 제거라는 허위 명목으로, 이라크를 침공하여 독재자 사담 후세인을 제거했으나 사후 처리를 제대로 못하여, 지금과 같은 이라크 시리아 내전 사태로까지 확대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Daesh는 국제 열강이 이권을 위해 힘을 겨루는 갈등의 사각지대에서, 과거 식민지 상처를 안고 반 서구 감정을 가진 이슬람 세계의 취약점을 이용하여 절망에 신음하는 영혼을 미끼로 삼아 미처 날뛰는 맹수와 같은 것이다. IS가 노리는 것은 새로운 이슬람국가라는 종교적인 위장아래, 기독교 서구에 대한 폭력뿐만이 아니라, 무슬림이 유럽에서 조화롭게 살지 못하게, 이슬람이 유럽에서 공존할 수 없도록 하며, 반사화적이 된 젊은 무슬림의 마음 속 불만족을 미움과 극단적 폭력으로 변질시켜서, 폭력의 대중화를 도모하는 것이다. 종교적 양심의 급진화가 빠지기 쉬운 어두운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무슬림이 테러리스트는 아니다.

IS에 대한 기독교적 자세는…
이슬람 폭력주의자들에 대한 기독교인의 자세는, 다른 자유인처럼, 폭력에 저항하고 이를 배척하는 것일 수도 있다. 특히 국가 차원에서 정당한 방위와 국민 안전을 위해선 무력 저항이 요구될 수도 있다. 주 후 4세기는 역사 상 기독교 위상이 전환되었던 시기였다. 핍박을 받던 소수의 종교 기독교가 점차적으로 허용이 되고 관용을 베푸는 종교로, 그리고 얼마 후엔 공식 종교가 되면서, 가끔씩 타 종교를 핍박한 지배 종교가 된다. 주로 기독교 이단자, 이방인, 유대인들이 박해나 심지어 폭력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 후 11세기부터 수세기에 걸쳐 이루어진 십자군 원정은, 교회가 세속의 힘과 결탁하여, 성지 탈환을 위해 이슬람 정복을 시도한다. 명분이 어떻든 간에, 기독교가 타 종교를 핍박하는 광적이고 불관용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역사가들은 평가하곤 한다. 본래 비폭력을 전파하는 기독교가 교회를 대적하는 자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이 신성화되고, 찬양 받을만한 것이 된다는 교리 상의 변질이 일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잘못된 교리는 이슬람의 성전(지하드)과도 일맥상통한 면이 있는 것이다.

주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치신다: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태복음 26장 52절). 이 말씀이 기독교인은 전쟁을 부인하거나 포기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다만 잘못된 전쟁으로 실족하지 말라는 것이다. 서로 미워하기 위한 전쟁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또 성급하게 승리하기 위해 전쟁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 후 패배와 실패를 대비하라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이 땅에서 칼로 하는 전쟁에는 진정한 승리란 없다. 우리는 전쟁을 하되 폭력을 심기보다는, 보호를 하고 희망을 심는 전쟁을 하는 소명을 받은 것이다. 조지 W 부쉬 미 대통령이 “악의 축”을 운운하며, 이라크 전쟁을 섣불리 일으켜, 전쟁은 실패했을 뿐만이 아니라,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무고한 인명 피해가 생겼고, 이슬람 세계와 서구 간에 증오의 벽을 더 높이 쌓게 하였는가를 아는 것은 약간의 명철을 가진 자라면 다 아는 주지의 사실인 것이다.

그럼 우리를 위협하는 악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주님은 우리에게 <악에서 승리하게 하소서>가 아니라, 우리를 <악에 구하옵서>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신다.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악에 대해 마지막 승리는 최후 종말의 사건이 될 것이다. 단, 악에 대한 최종 승리는 미래에 발생하겠지만, 우리는 <이미> 그 승리는 알고 또 누리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이미> 그 승리를 선포하셨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은 그 날이 오기까지 마치 집행 유예 된 불행한 삶을 어쩔 수 없이 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시 형성된 새로운 삶을 추가적으로 사명인으로 더 사는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속했고 그 분이 주신 추가적인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악한 세상, 사랑할 수 없는 이 세상을 사랑하시되 자신을 드리듯이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우리도 추하고 사랑하기 어려운 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사랑하는 삶이 남았을 뿐이다. 테러가 난무하는 이 세상을 사랑할 순 없지만, 이 세상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길이 양같이 순교를 당하는 길이라 할지라도…. “주여 우리를 악에서 구하옵소서”.

READ  2016년, 종교개혁과 하나의 세계의 해

Leave a Reply

Be the First to Comment!

Notify of
wpDiscuz
Previous Next
Close
Test Caption
Test Description goes like this
Social Media Auto Publish Powered By : XYZScript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