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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

초대교회사 3대 교부 이야기

[유럽에서 보는 유럽이야기]  김학우 목사/ 마드리드 사랑의 교회 담임/ 59회

암브로시우스, 유세비우스, 아우구스티누스

초대교회사에서 3대 교부라고 말할 때에 암브로시우스와 유세비우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를 칭한다.  교부란 글자 그대로 “교회의 아버지” 즉 “교회의 영적 아버지”를 뜻한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을 “교회의 아버지”(고전4:15)라고 말했다. 교회사에서 바울처럼 교회의 영적인 스승과 아버지를 교부라고 불렀다. 이들 세 교부들은 그 이름과 같이 중세교회에 아주 큰 영향력을 끼쳤다.

국가를 중세교회에 예속 시킨, 암브로시우스
 
“교회 찬미가의 아버지”로 불리는 ”암브로시우스(Ambrosius, 339-397)는 “황제는 교회 안에 속한다.”라고 말함으로, 국가를 교회에 예속시켜 사실상 교권을 국권 위에 놓게 했다. 이것은 훗날 중세교회와 교황들이 국가를 지배하는 발판이 되었다. 암브로시우스는 처음부터 교회와 국가의 영역을 분리하였으며, 황제들이 교회에 영향력을 행사 하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았다. 이런 사실은 그의 설교에서도 강하게 나타나 있다. “하나님께 속한 교회를 가이사에게 양도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성전이 가이사의 것이 될 수 없다…또한 황제는 교회 위에 있음이 아니요 교회 안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암브로시우스는 황제들에게 권력을 행사한 사건들이 많았다. 384년 발렌티니안 황제가 “이교 제단”을 복구하려 했을 때 암브로시우스는 강력히 저지하여 좌절시켰다. “자비로우신 그리스도인 황제여, 당신은 하나님께 대해 신앙과 열심을 다할 의무가 있으며, 신앙을 위해 책임과 헌신을 다해야 합니다. 당신이 이교 신들을 위한 제단의 복구를 명령하고 참담한 희생제를 드리도록 명령하는 것이 당신의 의무가 아닙니다….우리가 원하는 것과는 다른 어떤 것이 선포되어지면, 우리는 참을 수 없고, 당신을 무서워할 수도 없습니다. 당신이 교회에 올지라도 목자들을 볼 수 없거나 당신을 반대하는 사람만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발렌티니안에게 보내는 편지, 17:3,13)

또한 390년에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데살로니가 원형 경기장에서 수천 명을 학살하였을 때에 황제에게 책임을 물어 회개를 촉구하였다. 암브로시우스 전기 작가의 기록에 따르면,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교회당 안으로 들어오려고 할 때 입구를 가로막고 이렇게 외쳤다. “그 자리에 멈춰라. 양손에 불의의 피가 가득한 자, 죄로 더럽혀진 너 같은 인간은 회개하기 전에는 성찬에 참여하기 위해 거룩한 성소에 들어 올 수 없다.” 황제는 그의 말을 듣고 반항하지 않았고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고 공개적으로 회개하였다. 암브로시우스는 아리우스파를 배격하며, 니케아 정통파 입장에 서서 교회의 권위와 자유를 수호하였고, 성직에 대한 개혁과 의무를 강조하였다. “주님을 위해 황금보다는 영혼들을 보존하는 것이 더 낫다. 세상에 내보낸 하나님께서는 황금 없이 교회들을 모으셨다. 교회는 저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필요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 황금을 소유하고 있다.” 이런 그의 설교는 대중을 사로잡았고, 그 가운데 아우구스티누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중세신학의 초석을 마련한, 유세비우스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회 역사의 아버지”로 알려진 유세비우스 히에로니무스(Eusebius Hieronymus, 347-420)에 대하여 “유세비우스는 모르는 것이 없을 만큼 박식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는 박식한 성경학자답게 엄청난 양의 교회역사를 남겼다. 그의 총서는 사도시대 이후부터 4세기 초에 이르는 교회 역사를 망라한 것으로, 기독교가 공인되기 이전에 일어난 기독교 10대 박해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그가 남긴 교회사는 고스란히 “밍네(Migne)의 라틴 교부 문헌 총서(Patrologia Latina)” 제 22-30권에 수록되어 있다. 그의 총서가 오늘날 400쪽 정도로 된 책 40-50권의 분량쯤 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얼마나 방대한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가 이처럼 많은 저서를 남길 수 있었던 것은 비교적 오래 살기도 했지만, 수도원 안에서 열정적으로 학문에 몰두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불가타역”(Vulgate)을 들 수 있다. “불가타역”은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한 “칠십인 역,”과 영어 번역인 “킹 제임스 성경”과 함께 교회사에서 대표적인 성경으로 꼽힌다. 불가타역은 제롬이 그의 친구이자 주교이며, 스스로 교황이라 칭했던 다마수스의 요청으로 약 15년간의 노력 끝에 405년에 완성하였다. 하지만 불가타역은 로마교회가 공식적인 성경으로 받아들인 13세기 이후 비로소 “벌게이트”(Vulgate, 공동역)란 이름으로 채택되었다. 그의 저술활동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라틴 교부들 가운데 유일하게 모든 예언서를 주석하기까지 하였다. 406년은 말라기주석을 시작으로 407년에는 다니엘, 408-409년 동안 이사야, 412-415년에는 에스더, 그리고 415-416년 사이에 예레미야 주석을 완성했다. 후대 학자들은 그의 엄격한 언어와 생동감 넘치는 문체는 “흑단처럼 윤이 난다.”라고 평했다.

유세비우스의 펜은 아주 포학하였으며, 매우 공격적이었다. 특히 이단들에 대하여 미치광이, 괴물들, 사단의 하인 등등의 험악한 말들을 쏟아내었다. 그는 많은 약점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적대적 입장을 보이는 자들과 싸웠고, 펠라기우스와 같은 이단들로부터 바른 신앙과 신학을 지키기 위해서 아우구스티누스와 함께 요청하기도 하였다.
 
중세교회 신앙과 신학의 청사진을 제시한, 아우구스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354-430, Augustine)는 사도 바울 이후 가장 위대한 신학자, 중세기 천 동안 가장 탁월한 신학자, 서방교회의 아버지, 그리고 중세 시대의 신학과 사상을 지배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플라톤주의를 중심한 기독교 사상가들에게 하나의 모델이기도 했다. 또한 개신교 종교개혁자들의 작품에서 강조되었던 많은 사상들은 대부분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기원한 것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정도이다. 하버드 대학의 철학교수 화이트헤드가 “현대의 모든 철학은 플라톤의 주석이고, 현대의 모든 신학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석이다.”라고 말한 것은 이러한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의 교회관과 성례관은 로마교회 교리의 발전에 한 몫을 하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아우구스티누스 또한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그 중 대표적인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자신의 삶과 신앙을 담은 “고백록”(Confessions, 400)과 그의 필생의 대작으로 413년에 시작하여 426년에 완성한 당시 지식의 도전에 답하는 역사철학인 “신의 도성”(City of God, 426)과 그리고 삼위일체론(On the Trinity, 416)이 그것이다. 특히 삼위일체론은 서방신학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터툴리안, 오리겐, 아타나시우스 등이 성자와 성령이 성부에 종속된다고 주장하였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는 완전한 동등성임을 주장하였다. 그가 후 시대에 제시한 신앙과 신학의 청사진은 다름 아닌 “죄와 은총”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모든 죄는 교만에서 시작되며, 그 교만의 시작은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돌아서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아담의 원죄로 멸망 받으며, 심지어 어린 유아라 할지라도 멸망을 받는다.”라고 말했다. 반면 그의 죄 개념에 대응한 것이 은총관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한 것은 우리가 거룩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거룩하게 되게 하기 위해서다. 하나님이 어떤 인간을 선택하고 어떤 인간을 멸하느냐 하는 그 까닭은 인간에게는 없다. 일하고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아우구스티누스를 말할 때에 그의 스승 암브로시우스를 빼 놓을 수 없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고백록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세상에서 훌륭하게 알려진 당신의 경건한 종, 그의 웅변은 당신 백성에게 기름의 윤택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그는 아비답게 나를 맞아주었고…나는 그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진리를 가르치는 스승이었습니다. (고백록 5권, 13장)” 로마교회는 딱 두 번의 회심 기념일을 지키고 있다. 하나는 사도 바울의 회심 기념일(1월 25일)과 또 다른 하나는 성 어거스틴의 회심기념일(5월5일)이다. 후대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하여 크게 두 가지를 기억하고 있다. 타락과 불신앙가운데서 자신의 죄를 청산하고 거룩한 삶을 산 것과 모든 초대교회 신학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중세와 근대 신앙과 신학의 청사진을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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