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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크시론

우리는 지금 어디쯤 서있을까?

[유크시론 175호]  이창배 발행인

깊은 침묵에서 부활로 나아가자

그렇다. 가슴 뛰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 솔직히 그런 열망이 시간이 갈수록 더욱 마음 깊은 곳에서 끓어오른다. 결코 젊은이들에게만 있는 그런 특권이 아니라 남은 생애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꿈꾸는 사람에게는 피어나는 꽃과 같다.

꽃샘추위가 매서운 법이라고 했나? 햇빛은 맑고 투명해 모처럼 화창한 날씨라 생각해 잠시 외출해 보았더니 아니다. 바깥은 온 몸을 서늘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렇게 삼월을 떠나보내는 것이 아쉬운 걸까, 4월이 마냥 더디게만 느껴진다.
그런데 사실 생각해 보면, 늘 부활절을 맞이하는 그 어간이 다른 때에 비해서 추웠던 기억이 난다. 늘 부활절 새벽 미명이면 새벽연합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차가운 공기를 마시며 길에 나서곤 한다. 그 때마다 유독 차가운 날씨를 맛 본 것이 늘 있어왔기에 그런 것인지, 그렇다고 다른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이 무렵의 기온은 다른 어떤 주간보다 오히려 낮았으니 말이다. 마치 동이 트기 직전의 새벽녘이 가장 어둡다는 말처럼 곧 겨울이 봄으로 바꾸어지는 환절기의 막바지라서 더욱 심리적인 현상일 수도 있겠다 싶다. 마음은 날로 새로이 시작될 푸른 봄날에 대한 기대가 커져만 가는데 일기의 변화가 조금 더딘 것에 대한 투정인가?
지금도 서재의 창문을 통해 내다보이는 가로수에는 그 가느다란 가지마다 싹이 나오려고 움이 트고 있는 게 보인다. 길가에는 봄을 알리는 이른 꽃들이 노란색, 보라색 꽃봉오리를 터뜨리고 있다. 차가운 바람에도 아랑곳없이 노란색 수선화 꽃들은 여기저기 피어나고 있잖은가? 그러니 몸은 움츠러들망정 계절은 이제 봄을 맞이하라고 재촉을 하고 있는 모양새다.
햇살이 맑은 오늘 오후 서재에서 멀리 보여지는 건너 맞은편 산 동네의 모습은 어쩜 늘 같은 풍경이지만 불과 며칠 전에 본 모습과 사뭇 느낌이 다르다. 확연히 다른 점은 시야에 들어오는 풍광이 한결 부드럽고, 따스하고, 화사한 느낌이 담겨져 있다는 차이다. 눈에 보여지는 원경은 화사하기만 해도 막상 그 사이에 채워진 바람은 샘바람, 꽃샘바람, 소소리바람, 그 이름처럼 차갑고 쌀쌀맞게 옷깃을 파고드는 고약함이려니, 그래도 마음은 자꾸 4월로 기울어만 간다.

부활의 참 소망을 그리며
한 겨울 내내 물기 없이 바싹 매말랐던 수목에 물기가 돌며 새싹을 내는 그 모습은 참 아름답다. 싱그럽다. 아니 감동적이다. 하얀 목련이 화들짝 피어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매일 나무 밑을 서성거린다. 이내 피어난 하얀 눈송이 같은 활엽수 나무 꽃잎이 바람에 휘날려지는 이 찬란한 날이 오면, 봄날의 찬가를 함께 부를 수 있는 동무라도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모두가 고향을 떠나온 나그네요, 본향을 향해 갈 곳을 정한 디아스포라로 사이좋게 어깨동무하며 험란한 인생여정을 도란도란 대화로 주고받으며 사랑스레 어깨를 감싸고 함께 완주해 줄 친구 되어 늙어가노라면 또 얼마나 좋으랴.
그리도 어둡고 침침했던 기나긴 겨울철을 외롭게, 고독하게, 서럽게, 춥게 보내고 이제 화창한 봄날로 돌아온 지금 마당에 서서 땅속에서 피어나는 꽃망울 하나에도, 바람에 일렁이며 싹눈을 움틔우는 나무가지의 흔들림에도, 차가운 일기 가운데 한점 바람에 실려온 따스한 햇빛의 온기에도, 아무런 감동도 없고, 미동도 없이 무감각해진 그대로라면 그보다 서러울 것 없을 터인 데, 행여 내 주위로 그렇게 살아가는 이 있을까 마음이 무너진다.
올해 부활절을 지키며 더도말고 덜도말고 부활의 참 뜻을 되새기며 할 수 있는 한 십자가 복음의 원천에 더욱 깊게 발을 담그는 그런 교회가 되고 싶고, 한 사람의 진실된 목사가 되고 싶다는 열망이 피어난다.
화려함을 추구했노라면 이미 지나간 옛날이라고, 예리함과 정교함을 추구했노라면 그 또한 멀어진 지 오래라고, 롱펠로우의 <인생예찬>의 한 토막이 떠오른다. “아무리 즐거워도, 미래를 믿지 말라! 죽은 과거는 과거 속에 묻어 버려라! 행동하라, 살아있는 현재에 행동하라! 안에는 심장이, 위에는 하나님이 있다. 위인들의 생애는 우리를 깨우친다. 우리도 장엄한 인생을 이룰 수 있다고…”
결국 남길 게 무엇인가? 롱펠로우는 말한다. “또한, 떠나가면서, 우리 삶 뒤켠으로 세월의 모래톱에 발자국을 남길 수 있다고… 그 발자국… 아마도 다른 이, 곧 인생의 장엄한 대양을 항해하던 고독하고 조난 당한 한 형제가 그 발자국을 바라보고 심기일전할 것이다. 그러니, 우리 곧추 일어나 일해 나가자…”멋지지 않은가?

깊은 침묵에서 부활로
그렇다. 가슴 뛰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 솔직히 그런 열망이 시간이 갈수록 더욱 마음 깊은 곳에서 끓어오른다. 결코 젊은이들에게만 있는 그런 특권이 아니라 남은 생애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꿈꾸는 사람에게는 피어나는 꽃과 같다.
우리들이 디아스포라로 살아가는 나그네된 땅 이곳 유럽에서 이제는 지난 앙금을 털어내고, 다시 새로운 열정을 뿜어내는 그런 소성(蘇醒)의 기운이 확산이 되어지는, 디아스포라 교회들에게서 그 반가운 소식을 듣고 싶다. 이렇듯 만물이 소생하는 봄날, 부활의 절기를 맞이하며 저 깊은 심원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공유하고 싶다.
무한대의 애증(愛憎)에 사로잡혀 살아가던 한 인간이 끝내 회복되기까지 그 짧은 문장에 담은 긴 이야기를 요셉의 삶을 통해 돌아보게 된다. 창세기 37장부터 시작되는 요셉의 이야기는 한 집안의 평화로운 생활이 붕괴하는 자리로부터 출발한다. 곧, 신앙인의 집안, 야곱의 집, 즉 이스라엘(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의 집이다.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살아가는 신앙 공동체이다. 이 신앙의 공동체, 이 모습이 교회라면 그 안에서 약속을 받고 살아가는 가족들의 평화가 왜, 어떻게, 붕괴하는지? 그리고 무너진 다음에 어떻게 회복되는지? 그 과정에서 요셉을 통해 보여주는 완전한 침묵의 시간이 초점이다. “내 뜻과 내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이다. 온전한 내려놓음이 무엇인지를 보이며 그 쓰디쓴 인내의 열매가 얼마나 단 것인지를 마무리 해 보이며, 이스라엘 공동체의 회복, 그 대미를 장식해 준다.
오늘 날에도 그 의미는 결코 낯설지 않다. 남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들, 관계가 무너진 가운데 고통하며, 깊고 깊은 애증(愛憎)에 얽매인 채 상처투성이로 인해 쉽게 화해하지 못하고 끙끙대며 가슴앓이를 하며 살아가는 디아스포라 교회공동체들에게 놓여진 그 현상들이 아닌가? 여기에 진정한 부활의 생명이 들어와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우리는 지금 어디쯤 서 있는가? 도단평야인가? 아님 보디발의 집인가? 컴컴한 지하감옥인가? 이 깊은 침묵에서 부활로 나아가야 한다.

이달의 말씀 ㅣ 창세기 45:7-8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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