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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기독교의 테마공원 : 부활절 정원

[독일시사리뷰]  이성춘 목사, 프랑크푸르트국제교회/ 15회

부활절 정원 (Ostergärten)

부활절 공원은, 어떻게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했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되고, 유대교 산헤드린에서 재판을 받고, 로마 군인들에게 십자가형을 당하고, 마지막으로 부활하신 분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났는지를 보여준다.

사순절을 지내면서, 찬양과 기도와 말씀읽기 등으로 주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묵상하며 지내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일반적으로 실천하고 있는 모습이다. 독일에 사는 기독교인들은 제 5 복음서기자라고도 불리워지는 세바스챤 요한 바흐의 마태, 요한의 수난곡을 들으면서 사순절에 경건의 연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시대에는 단순히 듣고 읽고 대화하는 언어가 아닌 화면을 통해 전달되는 이미지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오늘날 인쇄문화가 영상문화로 대체되어가고 있다. 그래서 데이비드 웰스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서구 사회에서, 인쇄는 사회의 과거와 가치를 보존해왔다. 좋건 싫건 간에, 오늘날 가치는 영상문화를 통해서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되고 있다. 문화의 외투는 말을 사용하는 사람에게서 이미지를 만드는 사람에게로 넘어갔다” 고 사회의 변화를 지적해주고 있다. 이것은 지성이 무시되어서는 안되지만, 지성보다 감성에 호소하는 시대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시대적인 변화속에서 부활절정원 (Ostergärten) 과 같은 테마공원과 작은 인형들로 예수와 모세의 성경이야기를 재현시켜놓은 전시회 등은 사순절기간에 자녀들을 동반한 가족들에게 기독교의 신앙을 확고하게 해주고 있다.

I. 테마공원들
1. 부활절 정원 (Ostergärten)
부활절정원은   15년전부터 독일에서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관한, 현대화된 기독교의 선포로 정착되고 있다.  첫번째 부활절 정원은 안네테아와 루쯔 바르트와 바덴지역 교인들에 의해서 린케하임(칼수루헤) 의 교회에서 시작되었다.  이 정원은 큰 호응을 얻었고, 그 아이디어를 원하는 교회에 제공하고 협력하여,  매해 20 – 30 지역에서 부활절정원이 세워지고 있다. 이것이 시발점이 되어 바덴지역교회 안에서는 “의미공원” (Sinnenpark) 조직까지 세워졌으며, 기독교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다양한 테마공원들을 개발하며 섬기고 있다.  교회에 관련되지 않는, 오이로파 팍크 안에(Rust) “만남의 장소, 예루살렘”이란, 부활절정원을 세워 3만명의 방문자들 얻기도 했다.
부활절 공원은, 어떻게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했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되고, 유대교 산헤드린에서 재판을 받고, 로마 군인들에게 십자가형을 당하고, 마지막으로 부활하신 분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났는지를 보여주면서,  실제적인 무대를 방문자들이 관중이 아닌 참여자로 함께 만들어가며, 2천년전의 그 현장들을 다녀오는 것같이 이끌어간다. 필자도 이 린켄하임에서의 초기의 부활절정원에 어린 두 자녀들을 데리고 다녀온적이 있다.  또한 올해 3월 18일에 프랑크푸르트에서 40여분 떨어진 지역인 이두스타인에 있는 자유개신교회에서의 “부활절 정원”을 방문하여, 또 한번의 주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묵상과 역사적인 시간여행에 참여하였다.  이 때에 유치원, 초등학교 아이들이 부모님들과 함께 참여하여,  50여분에 걸친 신앙체험, 이미지와 감성터치의 예수님의 고난의 한주간을 현장적으로 체험하고, 가슴깊이 주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담고 떠나는 것을 보았다.
부활절 정원의 첫번 연출자인 바르트는 어느 누구도 왜 성금요일과 부활절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교회절기가 되는 지를 이해하지 않고는 이 부활절 공원을 떠날 수 없었다고 설명하면서, 이 프로젝트가 선교적인 의도를 얼마나 충실하게 충족시키고 있는지를 보고하였다. 각 지역의 부활절 정원의 진행자들이나 방문그룹의 인솔자들도,  방문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을 견고하게 되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고 증언한다.  이 테마공원은 복음전도 뿐 아니라 교회안에서 교인들과 사역자들을 건강하게 세워가는 귀한 열매들을 맺어가고 있다.
2.  450개의 인형으로 전시된 예수, 모세의 성경이야기
마인쯔의그리스도교회에서“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주제의 전시회가 2월 14일 부터 3월 13일까지 있었다. 이 전시회는 레나테 밀러스키가 450개의 30센티미터 크기의 인형들로(제작자 : 도리스 에글리)  모세와 예수의 성경의 역사를 재현시켰다. 이 전시회는 내용적으로 루터 10년(Luther Dekade)의 “그림과 성경”(2015년) 이란 주제와 관련된 것이다. 작년에는 루터 종교개혁 당시에 비텐베르그에서 살면서 루터의 종교개혁에 관한 모든 사상을 인쇄하고 그림으로 표현했던 쥬니어 루카스 크라나크흐의 탄생 500주년과 관련해서 종교개혁시대의 그림과 인쇄를 주제화했다. 종교개혁으로 새로운 문자언어와 그림언어가 만들어지면서 메디아의 혁명이 일어났다. 마인쯔에서 개발된 굿텐베르그의 인쇄술과 아버지와 아들인 루카스 크라나크흐의 화가로서의 조예와 헌신이 종교 개혁 사상의 보급에 큰 공헌을 하였다. 작년에 메디아를 통한 선포, 곧 그림언어들을 통한 설교에 대한 조명들이 이루어져었다.  
레나테 밀러스키는 인형의 다른 형태,  의상과 소품들을 가지고 모세와 예수님의 성경역사를 구성해서 복음의 메시지를 전달해주고 있다.  당시의 유대에서의  농사짓는 모습들 곧, 멧돌로 곡식을 가는 모습, 나귀로 짐수레를 끌면서 타고 가는 모습. 두 마리의 소로 땅을 기경하는 모습, 추수하고 토기를 구우며 살아가는 모습들과 유목민의 천막 속에서의 삶과 갈릴리 바닷가에서 어업에 종사하는 모습 등과 예수님의 생애, 곧 출생, 성장,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중요한 사역 현장 등을 재현해주었다. 방문자들은 소인국에 온 것 같은  마음을 갖게 되었고, 또 그 시대로 되돌아가 그곳에 서 있는 듯한 현장감을 받았다.  또한 박물관에 와서 관람하는 것 같은 예술성을 보게되었다. 이 전시회에 아이들이 종교교육을 받는 그룹들이 단체로 찾아오는 곳이 되었다.  필자도 가족과 함께  3월 13일 주일에 그 교회에 방문하여  10시 예배를 드리고,  이 전시회를 의미있게, 감동적으로 감상하였다.
3.  색의 대가, 성서의 해석자인 샤갈
마인쯔를 방문하며서, 샤갈의 스테인글라스로 유명한 스테파누스 카톨릭교회를 찾아간 것과 마인쯔 대성당을 방문한 것은 덤으로 주어진 큰 유익이었다. 샤갈은 푸른색을 주로 사용하여 생명과 희망과 삶의 기쁨을 표현한 색의 대가, 색의 마술가이다. 그는 또한 경건한  성서 해석자였다.  프랑스 니스에서 마지막 생애를 마쳐가면서, 독일과 프랑스의 우정의 상징, 기독교와 유대교의 화해의 상징으로 스테파누스 카톨리교회의 스텐인글라스의 성서이야기를 완성하였다. 그가 91세(1978)에 시작하여 98세(1985)에 마지막 스텐인글라스의 창을 넘기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클라아스 마이어는 이 샤갈의 스테인글라스의 작품과 관련해서“이 교회의 창문들이, 우리들에게 말을 건네게 하소서, 이 창문들은 아버지의 영광이 높여지도록, 우리의 믿음이 굳건해지도록, 기뻐하는 삶이 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집의 방문자에게 샤갈의 예술작품들이 발산하는 성경의 선포들을 깨닫도록 귀와 마음을 열어주소서. 이 작품들이 평화의 상징이 되게하시고, 이해와 화해를 외치는 하나님과 사람을 위한 사랑의 상징이 되게하소서” 라는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II. 이 방문들을 통해서 얻은 메시지들
1) 모세가 신을 벗고 하나님의 현현을 맞이하는 장면과 십계명을 받는 모습 등 출애굽에서의 장면들도 조성되어 있었다. 모세가 서 있는 곳은, 하나님의 현존으로 인해,  신발을 벗어놓아야 할만큼 거룩한 땅이 되었다. 사막에서 바짝 말라버린 가시덤불이 불이 붙었을 때에 불살라져 없어져 버리지 않고 그대로 불이 붙어 있는 것 같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면서 인간의 대접도 받지 못하고 무가치하게 되어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막에서 비바람에 시달린 것 같은 인생을 불살라 없애지 않으시고 보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난 곳이다. 하나님이 없고, 내가 있다고 했던 모세가, 나는 없고 하나님이 있다고 인식하는 현장이다. 모세와는 달리 오늘 기독교인들은 불붓는 가시덤불이 아닌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과 부활 앞에 서 있는 것이다.
2)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주님의 기도하시는 모습과 제자들이 잠을 자고 있는 모습의 장면이 눈 앞에 들어온다. 주님이 다가올 버림받음과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마주하면서, 크게 번민하고 연약해지면서 기도하시는 장면이다. 한시도 깨어 주님과 같이 있을 수 없었던, 잠을 이기지 못하는 세 제자들의 모습이, 곧 우리 자신의 모습인 것 같아서 주님 앞에서 죄송스러웠다.     
3) 베드로의 3번에 걸쳐 예수님을 부인하는 장면에 이르러서는 저 자리에 나도 역시 서있는 존재인 것을 베드로 이상을 넘어서 달리 어떻게 할 수 없는 비겁하고 연약한 자신인 것을 보게 되었다.  평소에는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였는데, 그 현장에서 무릎을 버티고 서있을 염치가 없었다. 그래서 방문한 어린아이들이 무릎끓고 앉아 있는 그 틈 사이에서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게 되었다.  이렇게 무릎 꿇었던 참여자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는 함성들을 듣는 장면에서는,  모두가 숙연해지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한발자욱 더 나아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들고 온 작은 돌들을 또한 무거운 인생의 짐들을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내려 놓았다.  
4)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주님은 그렇게 십자가에 죽으셨다.  
존 스토트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에 대한 이해의 중심으로 그 분의 탄생이나 청년시절을 택하지 않고, 그 분의 가르침이나 봉사를 택하지도 않고, 그분의 부활이나 통치, 또는 그분의 성령의 은사를 택하지 않고,  죽음 곧 십자가에 달리심을 기념하고자 했다고 지적한다. 이것으로 기독교를 반대하는 자들에게는 인간의 구세주가 십자가 위에서 삶을 마쳤다고 하는 것은 웃음거리이고 잘못된 미친 생각이라고 여길 근거를 제공했다.  
옥타비우스 윈슬로우는 “누가 예수님을 죽음에 넘겨주었는가?”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대답했다: “돈을 위하여 유대가 넘겨준 것이 아니다. 두려움 때문에 빌라도가 넘겨준 것도 아니다. 시기때문에 유대인들이 넘겨준 것도 아니다. 바로 사랑 때문에 성부께서 넘겨주신 것이다.”
롤프 쉐프부크는 창세기의 22장의 이삭의 희생의 제물에 대한 기사가 바울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했다고 지적한다. 바울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희생제물로 바치는 장면에서의 용어들 곧 “아끼지 않고,  … 내 주었다.”(창 22,12. 16,) 는 것을  수용하여 하나님 아버지가 아들 예수를 내어주신 것과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롬 8,32.)
샤갈은 스테파누스교회의 스테인글라스 창에서, 아브라함의 이삭을 제물로 받치는 그림을 형상화했다. 프랑스의 니스의 국립 샤갈 박물관의 그림에서도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물로 내어드리는 그 장면에서, 하나님이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주는 모습과 샤갈 자신과 같은 유대인들이 히틀러 시절 학살 당하는 희생도 함께 연결시켜 그려놓았다. 유진 피터슨도 이 모리아산은 예수님에게서도 완성되는 믿음의 삶의 중심이라고 인정한다. 예수님은 나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라고 기도하신 겟세마네의 기도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것과 같은, 결박과 순종을 온전히 다 받아들이신 것이다.  
존 스토트는“사도들이 부활을 설명하는 방식들을 살펴보면, 부활을 강조하였지만, 그들의 메시지를 순수한 부활의 복음 (ein reines Auferstehungsevangelium) 이라고 부르는 것은 좀 과장된 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것은 특성상, 부활은 그 자체만으로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죽음에서의 부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활을 강조하는 것은, 부활에서 무효화되고 정복당한 그 죽음에 대한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더 나아가 “부활은 인간의 판결을 하나님이 뒤 엎으신 것이다”. (Die Auferstehung war die göttliche Umkehrung der menschlichen  Urteils.)  이런 입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힌 것 외에는”그 어떤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한 것이다.(고전 2,1-2)

III  창조와 구원의 역사.  메시야 사역과 선교사역
사순절을 지내면서, 하나님에게 있어서 창조와 구원의 역사는 동일한 상황들을 전제하고 있다 (유진 피터슨) 는 것을 경험하며 살아야할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혼돈과 공허한 곳으로 부터 하늘과 땅이 나오는 또한 흑암이 깊은 곳에서 빛이나오는 과정을 통과하며 이루어진다. (창1,2절이하) 예수님도 십자가의 죽음으로부터 부활이라는 승리의 역사를 이루어갔다. 구원의 역사는, 마굿간의 말구유에 누이신 모습으로, 피난길의 난민으로, 머리 둘 곳 없는 노숙자로,  자신을 비워가며 눈 앞에 다가온 십자가의 죽음, 쓴 잔을 받아들이는 삶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예수님이 이 비워가는, 순종하는 모습 속으로 십자가의 죽음을 통과하였을 때에,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이름으로 영광을 받게 된 것이다.  
우리의 인생에서 있어서도,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상황들을 아파하면,  빛의 세계, 평안의 세계로  옮겨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우리 인생은 깨어진 삶, 죄로 부서진 영혼의 파편과 조각들로 그대로 버려지고 포기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모여져서 새로운 모자이크가 되고, 유익하게 되는 새로운 삶의 자리, 구원의 자리로 이끌어지는 것이다.
눅 24:44-48은 주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메시야적 사역과 모든 족속에세 전파해야할 선교적 사역이 결합되어 있는 본문이다. 주님이 고난 주간에 이루어주신 메시야적 사역은 곧 우리의 선교적 사역을 필요로 하신다.
유진 피터슨은,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자가 혼돈으로 엉망이된  그곳으로 들어가 ‘아무 것도 빼 놓지 않는’새 창조,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고- 그 사람들을 구원의 재료로 사용하는 새 창조를 이루어가는 일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죽음을 통과한 부활의 역사는 새로운 역사, 새 창조를 이루어간다. 성 캐서린은,  천국으로 가는 길은 줄곧 천국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주님만이 ‘나는 길이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인 것이다. 줄곧 천국의 삶을 살면서,  죄사함을 받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되는 선교의 헌신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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