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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저널

성전 장사꾼의 상을 엎으신 그리스도

[아트저널]  박심원목사/ 예수마을커뮤니티교회 담임/ 11회

El Greco (1541-1614), Christ driving the Traders from the Temple 1600

‘엘 그레코’는 무엇을 말하려 했던 것일까?
그림 위 왼쪽에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후에 쫓겨나는 장면이 실루엣처럼 묘사되어 있고, 위 오른쪽에는 그리스도께서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성전을 정화시키신 역사적 의미를 한 장의 그림에 담아냈다.

문명의 발전은 인간의 몫이다. 그러나 모든 문명의 원 재료는 조물주께서 창조해 주신 선물이다. 현대 문명을 이룰 수 있었던 본질들은 실상 인류가 시작할 시기인 아담 때부터 존재해 왔다. 문명이 발전한다는 것은 새로운 물질을 창조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창조된 만물 중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해 내어 조합해 내는 기술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은 창조(creation)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창조된 세계 속에서 새로운 물질을 발견하여 조합해 낼 수 있는 창조적(creative) 능력이 있을 뿐이다. 인간이 가진 능력이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낼 수 있는 창조의 능력이 아니라 창조된 세계를 재편집하는 것에 있다. 그래서 아는 것이 힘이 되거나 능력이 되는 것이 아니라 편집해 낼 수 있는 것이 새로운 지식이며 능력이 되는 것이다.

역사의 흔적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게 되면 인류는 무한대의 발전을 한 것 같이 보이지만 본질적인 것은 과거에서 현대에 이르기 까지 변화되지 않는 중심축이 있음을 알게 된다. 발전된 것은 문명이지만 변화지 않는 것은 인간이 추구하는 본질적인 선이다. 인간의 본질은 발전되는 것이 아니라 문명의 세계를 만들어 내고 그 세계에 적응할 뿐이다. 혹이 천 년 전으로 돌아간다 할지라도 그 때 가진 인간의 기본적인 본질이나 현대인들이 가지는 인간의 본질인 선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 본질적인 것을 표출해 내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문명은 인류의 시간과 관련되어 있다. 인류의 시작부터 존재했던 시간은 현대적인 사고방식으로 원시 문명이라 할 수 있다. 그 원시 문명의 시대에도 현대 문명을 이룰 수 있는 모든 재료들은 존재해 있었다.

인류가 발전한다는 것은 결국 문명을 발전시킨 결과이다. 문명이 발전될수록 순수했던 인간성은 파괴된 세계에서 살아야 하는 아픔을 동반하게 된다. 이러한 아픔을 문명의 이기적 그림자라 부르게 된다. 그림자 없는 문명은 만들어 질 수 없다. 즉 문명의 발전은 파괴를 동반하게 된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음식을 먹었을지라도 인체 안에서 찌꺼기가 발생하여 배설해 내야 하는 것처럼 인류의 편리함을 위해 만들어진 모든 문명 도구들이 만들어 지는 만큼 파괴를 동반하는 현실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인간이 가지는 제한된 창조적 능력의 한계인 것이다. 새로운 물질을 발견하게 되면 그만큼 한 공간은 파괴되는 것이 문명이기의 내면세계이다.

그렇게 문명을 발전시켜 오는 동안 인간은 끊임없이 본질을 찾기 위해 노력해 왔다. 역사적으로 그러하고, 종교적으로 그러하고 철학적으로도 그러하다. 문명의 발전을 통하여 인간의 본질을 찾으려 했다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문명의 발전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이 서로 보완하며 발전 시켜 온 것이다. 그러하기에 어느 한 쪽 역사만 들여다볼지라도 다른 차원의 세계를 알 수 있게 된다. 이를 테면 현대 문화 사조를 이해하려면 대중매체 중에서 영상 매체를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특히 영화는 그 시대의 문화 사조를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는 보고인 셈이다. 영화는 역사는 아닐지라도 역사를 유추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숨겨져 있다. 영화만큼 중요한 매체는 그림이다. 저명한 화가들의 그림은 마치 과거로 갈 수 있는 타임머신이 되어 주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내셔널갤러리는 역사를 거슬러 과거로 갈 수 있는 타임캡슐이 되어 준다. 백 년 전으로, 천 년 전으로, 그 이전의 세계로 갈 수 있는 상상력을 제공해 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과거로의 여행은 아무에게나 허용된 것이 아니다.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한다. 볼 수 있는 눈이란 역사적, 시대 문화적 의식이 있어야 하며, 그것이 성경 내용을 바탕으로 그려낸 그림이라면 일반적 해석이 아니라 성경적으로 해석해 낼 수 있는 영적 시안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림은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며, 아는 만큼 해석해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림은 단순하게 시대적 배경을 묘사해 내는 역사적 산물은 아닐지라도 화가의 고민과 시대적 사조가 그림 구석구석에 숨겨있다. 그것을 발견해 내는 것은 그림 속에 숨겨진 또 다른 이야기가 된다.

중세 시대의 화가 중에 한 주제를 지속적으로 화폭에 담아낸 화가는 그렇게 많지 않다. ‘엘 그레코’는 반복해서 그리스도의 성전정화 (Christ Cleansing the Temple)장면을 화폭에 담아냈다. 그의 본명은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플로스’(Domenikos Theotokopoulos)이지만 그리스인(The Greek)이란 의미인 ‘엘 그레코’로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길 원했다. 그는 그리스 크레타 섬에서 태어나 이탈리아 비잔틴 양식의 이콘(icon)화 전문 화가가 되었고, 베네치아, 로마를 거쳐 스페인에서 화가의 꽃을 피워냈다. 스페인에서의 중심적 활동 할 당시 교회인 로만카톨릭이 가장 왕성하게 세력을 확장해 갈 무렵이었다.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 불리는 종교개혁자들의 무리에는 합류하지 않았지만 당시의 교회가 개혁해야 함을 직시하고 있었다. 교회를 향한 그의 바람을 화폭에 담아냈는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성전정화였다.

성전 정화를 통하여 ‘엘 그레코’는 무엇을 말하려 했던 것일까? 무엇이 그리 간절하였기에 반복해서 그리스도께서 성전 정화 시키는 장면을 화폭에 담아 낸 것일까? 그리스도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하는 상을 엎으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제사에 필요한 양이나 비둘기파는 상을 엎으셨다. 그리고 외국에서 온 사람들을 위해 환전을 해 주는 상을 엎으셨을 뿐 아니라 아무도 성전 안에서 제사용 기구를 가지고 다지지 못하게 하셨다.(요2:13-16) 이는 제사를 중지시킨 것이다. 성전 문을 닫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을 다시 한 번 응하게 하신 것이다.(말1:10) 그리스도의 성전 정화는 다시는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는 창조주의 심판에 가까운 행동이셨다.

그리스도의 분노하심은 심판과 같은 것이다. 자신을 희롱하고 채찍질 하고 십자가에 못 박을 지라도 그리스도는 저항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용서해 주셨다.(눅23:34) 그런데 그리스도의 공생애 중에 몇 번의 화를 내셨는데 그중 하나가 마태복음 21:12에 나오는 성전정화에 관한 것이다. 왜 그렇게 화를 내셨던 것일까? 평범한 분노가 아니라 심판주로서의 심판을 하신 것이다. 그 이유를 화폭에 담아낸 것이다. 그림 위 왼쪽에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후에 쫓겨나는 장면이 실루엣처럼 묘사되어 있고, 위 오른쪽에는 그리스도께서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각각 다른 표현인 듯 하지만 예수께서 성전을 정화시키신 역사적 의미를 한 장의 그림에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남의 결과는 곧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에 대한 예고였다. 인간은 끊임없이 타락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인간이 아무리 완벽한 문명을 발전시켰다 할지라도 그 문명은 타락한 인간의 속내를 숨길 수 없는 것이다. 그곳이 에덴동산일지라도 인간은 완벽할 수 없는 것이다. 일반적인 죄에 대한 개념은 상대적이라 생각하게 된다. 사회적 환경이 죄인을 만들어 낸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죄관은 종교적이며 문화적 관습에 온 철학적인 죄관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다른 차원이다. 죄란 사회성이나 문화적 환경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면세계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를 예수께서 자세하게 예를 들어 설명하셨다. 율법의 달인이라 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셨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 그러면서 사람 속에 있는 것을 열거 하셨다.(마15:1-20) 설혹 산 속에서 평생 홀로 살아서 어떠한 문화도 접촉하지 않았을지라도 그 내면에는 더러움이 있는 것이다. 다만 그 더러움이 사회적 문화를 만나서 표출되지 않았을 뿐이지 죄의 속성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인 것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위에 세워진 하늘 기관이다. 교회가 세워진 장소는 하늘이 아니라 죄악이 관영한 이 땅이다. 그런데 그 교회를 세우고 주관하는 일은 사람이 해야 한다. 가장 완벽한 하나님 나라의 기관을 가장 흠이 많은 인간이 세우고 관리하고 운영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교회는 끊임없이 개혁하지 않으면 인간의 죄 된 속성이 드러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교회가 가장 많이 타락한 시기는 중세시기였다. 물론 현대 교회도 타락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교리적 타락이 없다. 교회의 중심인 사람이 말씀으로 살지 못한 타락인 것이지 교리를 바꾸어서 진리의 본질을 바꾸는 일은 건전한 교단에 속한 교회에서는 찾을 수 없다. 중세교회는 개인적인 경건한 삶을 있었을지 모르지만 교리적으로 진리를 변형시켰다.  

교회가 타락했다는 것은 윤리적 도덕적인 타락 그 이전에 교리적인 변형인 것이다. 예수님 당시 성전이 타락한 것은 성전의 목적인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 세워졌는데 성전을 인간의 욕망이 가득한 강도의 소굴로 만든 것이다. 예수께서 그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에서 매매하는 행위를 금지시키신 것은 거룩한 개혁이었던 것이다. 성전 개혁은 결국 성전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성화로 그려낸 화가들은 반복해서 그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엘 그레코’는 반복해서 성전 정화에 관련된 내용을 화폭에 담아냈다. 그것은 중세 교회를 향한 강한 개혁 메시지를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그림으로 고발하는 것이다. 성전의 타락, 교회의 타락은 율법시대나 중세시대의 문제가 아니라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된 인간의 타락문제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는 그것을 먹음으로 타락한 것이기 보다는 그것을 먹기 전에 먹음직하고 보암직하여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던 (창3:6) 욕망이 먼저 존재했던 것이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인 인생의 욕망으로 표출되는 것이다.(요일2:16) 그러한 욕망이 성전과 교회를 타락시키는 원인이며, 그것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화가는 성전정화 하는 그리스도의 심정을 화폭에 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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