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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크시론

내 자리를 찾아 준 “나의 약함”

[유크시론 177호]  이창배 발행인

유월에 감싸는 하나님의 은혜…

이제 돌아보니 참 길고도 먼 시간을 돌고돌아 제자리로 온 것 같다. 있어야 할 그 자리, 한 때나마 험란한 인생여정을 걸었던 종을 불러준 그 자리, 그 본연의 자리가 눈에 선해진다.

며칠 동안 바람불고 비오고, 짙게 구름 낀 날써더니 어제는 요란한 천둥과 번개가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하며 엄청난 빗줄기로 창문을 세차게 때리고는 지나갔다. 이내 아침이 되어서야 파아란 하늘과 하얀 뭉게구름이 두둥실 하늘에 떠 바람결에 흘러가듯 지나는 모습을 보게 됐다.
투명한 햇살이 눈부시도록 비쳐오며, 언제 그런 일이 있어냐는 듯 방안 어두운 구석까지도 환하게 비춘다. 그동안 벌써 책상머리 컴퓨터와 책장에 한켜 쌓여있는 먼지가 보인다. 청소한지 얼마나 됐다고, 툭툭 털었더니만 이윽고 햇빛 사이로 피어나는 먼지의 출렁거리는 나부낌에 급히 손사래를 치고선 방의 창문을 활짝 열었다.
바깥 상수리나무, 그 잎사귀를 지나는 바람소리가 왜 그리 조용조용한지 살짜기 잎새 위를 스쳐지나는 바람이 간지럽이기라도 할 듯 얼굴로 다가온다. 가만이 생각해보니 근간에 새소리를 들어본지도 오래인 것 같다. 풀벌레 소리도 들려올 듯 한데, 어쩐지 조용하기만 하다. 하도 동네가 조용하니 아마도 저들도 아예 숨을 죽이고 사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벌써 초여름을 알리는 6월이다. 공기는 상큼한데 왠지 더위는 없다. 한국의 소식은 뜨겁던데 늘 그랬듯이 유럽, 아니 이곳 독일은 그늘에 앉은 느낌이다. 몸에서 촉촉히 배어나는 땀도 없고, 후덥지근 몸을 달구는 습도도 거의 없다. 하늘을 희뿌엿게 덮은 황사도 없고, 공해도 없는, 그래서보면 이같은 기후가 또 어디에 있을까 그저 사람 살기에 좋은 것으로 치면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있을까 싶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독일생활이 시간이 꽤 갔어도 지겨움을 못 느낀다. 이곳 삶이 피폐하고, 고달프다면 진즉 떠났어도 여러 번이 되고도 남았을텐데, 여직 삶의 터전을 뿌리치지 못함은 그래서인가 싶다. 그러니 이땅에 대고 고맙다고 인사라도 하려나, 정히 그러지 못하니 표정이라도 밝게 상큼하게 살아가야겠다고 마음에 다져본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숨막힘
지난 두달은 내게 있어서 참 고되고 길었다. 난데없이 병치레를 했으니 집식구들의 고통도 말이 아니었다. 왜 갑작스레 몸이 아프게 됐는지 그 이유는 알만 하겠는데, 그 시작된 근원을 모르니 병원에 가도 무대책이고, 의사를 만나도 뚜렷한 해결책이 없어 답답하기만 했다. 한국과는 달리 독일에선 종합검사가 없다. 한국 병원에서라면 과한 비용이 문제긴 하지만 일단 입원하고서 하루 정도만 코스를 돌면 종합검사가 이뤄지고, 그 결과표를 받을 수 있지만, 이곳의 시스템은 영 다르다.
완전 응급환자가 아니라면 주치의 의사가 끊어주는 진료의뢰 서류를 가지고 해당 전문병원을 일일이 찾아가서 다시 진료일정을 잡아야 차례가 온다. 그러니 그것도 내 맘대로, 원하는 시간에 되는 것이 없다. 아파도 참으며 기다려야 한다. 어떤 병원에 전화를 하면 한 두달은 어림도 없고, 적어도 세달 그 이후라야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니 정작 아픈 환자는 이렇다할 약도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온 몸으로 아픔을 견뎌야 하니 참 고약하다. 그 가운데 시간이 두달이 갔지만 여전히 검사를 받아보고픈 몇가지 종목은 언제 이뤄질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이러는 과정 가운데 조금씩 알게모르게 건강을 회복시켜 주신다는 것이다. 물론 일시에 불같은 역사가 일어나 단 한순간에 고쳐지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면 좋겠지만, 나같은 이에겐 점진적이고 지속적인 치료방법을 주셨는가 싶다. 그 조금씩 나아지는 것을 느끼게도 하고, 남들로 알게도 하신다. 그러니 이것으로 내 안에 누구도 할 수 없는 회복력을 주신 은혜인 것을 깨닫는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이러한 지리한 과정을 통해서 이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육체의 질병이란 가시가 얼마나 고통스럽고, 또한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약하게도, 미련하게도 하는지를 알게 됐다는 사실이다. 다른 이의 아픔에 대해서 함께 동감하지 못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저 아픈이를 위해서 겉치례적인 기도로 내 역힐을 다했다고 넘겼던 적은 또 얼마인가? 새록새록 깨닫는 바가 많았으니 이 또한 은혜가 아니고 무언가. 그래서 이제는 내가 약할 때 곧 그 때가 강함이라는 고린도전서 12장 10절의 말씀이 생생해 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

내가 약할 그 때
사도 바울이 “사단의 사자”라고까지 표현할만큼 이 “육체의 가시”는 분명히 그에게 매우 고통스러웠던 것이 틀림이 없을 테고, 그것이 육체의 고질병이라던지 안질, 말라리아, 언어의 장애, 간질 등 그 어떤 것 중에 하나라고 추정할지라도 그 결론은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라는 최종고백이다. 하나님께서는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달라’는 바울의 기도에 응답하시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하시지 않던가. 그러고보면 성경을 가까이 두고도 마치 까막눈 처럼 본 것은 아닌지 적잖히 고민스러운 시간이 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정말로 큰 은혜는 그 동안 소홀했던 말씀읽기와 묵상에 푹 빠졌다는 것이다. 늘 바쁘다는 핑계로 체계적으로, 또 일관되게 성경을 정독해 본 그럴만한 시간을 못가졌었다. 늘 그것이 마음에 결려서 언제 한번 성경 삼매경에 들어가야 하겠다하는 식으로 스스로의 위안을 삼았고, 그나마 단편적인 읽기만을 해 오다가 이번 기회로 아침, 점심, 저녁으로 틈만 나면 성경을 손에 잡고 말씀을 읽는 즐거움에 빠졌다는 것이 얼마나 좋던지, 비로소 고백이 나오건데, 나를 되찾아 준 것이 바로“나의 약함” 이었다.
이제 돌아보니 참 길고도 먼 시간을 돌고돌아 제자리로 온 것 같다. 있어야 할 그 자리, 한 때나마 험란한 인생여정을 걸었던 종을 불러준 그 자리, 그 본연의 자리가 눈에 선해진다. 그래서 마음이 감동이 된다. “나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고마와” 찬송가 가사처럼 나의 나된 것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그 동안의 여러 사역도, 목회도, 문서사역도 모두 나의 정력을 쏟고, 열정을 쏟아온 열매라고 고집해 온 자만과 가식이 너무도 쉽게 무너져 내림을 경험했다. 그 무엇보다, 그 어떤 것보다 가장 소중하고, 가장 귀한 것은 곧 아버지 하나님과의 나누는 친밀한 교제가 있는 자리이다. 그 자리를 찾으니 참 기쁘다.

이달의 말씀 ㅣ 고후12:9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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