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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프랑스 종교개혁의 산실 “모(Meaux)그룹”

[프랑스포커싱]  채희석 목사/ 파리 모두 제자교회/ 15회

루터보다 앞선 프랑스 종교개혁의 산실: 모(Meaux)그룹

사실, 루터에 의한 독일 종교개혁이나 위클리프나 웨슬리에 의한 영국 종교개혁에 대해선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천주교 국가인 프랑스에서 강력한 종교개혁이 일어난 사실 자체를 아는 자는 많지 않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이유
16세기에 발생했던 종교개혁이 오늘날 유럽의 종교적 지형도를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다수 북부 유럽은 개신교 국가로, 남부 유럽은 천주교 국가로 존재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종교적 분열은 또 다른 정치적 갈등을 일으켜 오랜 세월 <종교전쟁>을 치르게 된다. 특히 16세기 프랑스에서 펼쳐진 40년간의 (위그노) 종교전쟁의 추억은 오늘날에도 사회집단의 기억 속에 지속적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 “우리 종교전쟁을 다시 시작하지 말자” (Ne recommençons pas les guerres de religions)라는 표현을 여전히 일상 대화에서 사용하고 있다.
이처럼 한 국가와 유럽의 중요한 역사 이정표가 된  “종교개혁이 왜 일어났을까?” 라는 질문에 간단 명료하게 답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다만 오랜 세월이 지난 후 그 시대의 복잡 다난했던 상황을 고려하여 포괄적인 분석을 한 역사학자, 종교학자들이 어느 정도 정리할 수는 있을 것이다. 기독교 왕국이었던 16세기 유럽에는 종말론적 의식, 교회의 부패와 성직자의 직권 남용, 페스트와 같은 전염병과 죽음의 공포 확산, 개인주의적 사회가치관 변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기독교 세계가 개혁되어야 한다는 시대적 소명이 발현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또 구원과 심판이 유럽인의 과거와 현재 미래의 삶에 심각한 결정 요인이 되고 있었지만, 교회가 올바른 역할을 하지 못할 때 사회 전체가 종교적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었고, 긍극적으로 <또 다른 기독교>(un autre christianisme)를 찾고자 하는 열망을 갖게 하였을 것이다.

프랑스 종교개혁의 시작
사실, 루터에 의한 독일 종교개혁이나 위클리프나 웨슬리에 의한 영국 종교개혁에 대해선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천주교 국가인 프랑스에서 강력한 종교개혁이 일어난 사실 자체를 아는 자는 많지 않다. 그 결과 16세기 프랑스에서 개신교가 존재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2000개가 넘는 개혁교회가 있었고, 프랑스인의 20% 이상이 개신교 신앙을 가졌던 사실을 상상도 못하는 자도 많다. 더 나아가, 프랑스의 종교개혁이 루터의 종교개혁보다 앞서 일어난 사실을 아는 자는 더욱 더 드물다. 흔히 말하기를, 루터의 종교개혁이 계기가 되어 프랑스가 그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가 교회의 면죄부 남용에 이의를 제기하고 대학 내에서 95개 항목에 대한 신학적 논쟁을 제기한 것이 종교개혁의 시조가 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또 다른 관점은 프랑스 종교개혁자 장 칼뱅(1509년 7월 10일 출생)과 더불어 시작됐다고 보는 견해이다. 칼뱅이 1536년에 종교개혁의 신학적 입장을 정리한 <기독교 강요> (l’institution chrétienne)를 저술한 전후로 개혁교 차원에서 프랑스 종교개혁의 시발점으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반적 견해와는 달리, 여러 종교역사학자들은 또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 특히 <16세기 종교개혁사>의 저자 쟝 앙리 메흐르 도빈네 (Jean Henri Merle d’Aubigné)와 장 칼뱅 연구에서 가장 조예가 깊은 에밀 두메르귀(Emile Doumergue) 교수 등 19세기 저명한 학자들에 의하면, 프랑스 종교개혁은 자국 땅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칼뱅이 아직 어린 소년일 때, 더 나아가 루터의 종교개혁이 아직 공식화되기 전인 1510년부터 프랑스에선 1525년 사이에 이미 종교개혁의 전초를 알리는 불씨가 피워졌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프랑스 종교개혁의 선구자 : 모(Meaux)그룹
프랑스 종교개혁의 근원지를 찾아가려면, 파리에서 동쪽으로 50km정도 떨어진 모(Meaux)라는 중세 종교도시를 가야 한다. 그 당시 <프랑스의 에라스무스>라는 별명을 가진 작크 르페브르 데타플 (Jacques Lefèvre d’Etaples, 1450-1537), 프랑스 최고 인문학자를 중심으로 모 성당의 주교 귀이욤 브리소네(Guillaume Briçonnet), 칼뱅을 제네바로 초청하여 제네바 사역을 함께 했던 개혁자 귀이욤 화렐 (Guillaume Farel), 당시 프랑스 왕 (프랑수와 I세)의 누이 마그리트 드 나바르(Marguerite de Navarre)의 궁중 원목이자 오로롱 주교인 제라드 루셀(Gérard Roussel), 신학자이자 명 설교자 피에르 카로리(Pierre Caroli), 프랑스 왕립대학 (Collège de France) 초대 학장인 귀이욤 뷔데(Guillaume Budé), 가장 먼저 소르본느에 의해 의심 받았던 주교 미셀 다랑드(Michel d’Arande), 후에 프랑스 왕립대학(꼴레즈 드 프랑스)의 히브리어 교수가 되어 칼뱅을 가르쳤던 프랑수와 바타브르(François Vatable), 화형으로 1525년에 순교 당한 쟉끄 파반느(Jacques Pavannes) 등 지성계나 종교계나 정치권에서 영향력을 가진 브레인들이 인문주의 개혁그룹을 형성하게 된다. 이 그룹을 <모그룹> (cénacle de Meaux)이라고 부른다. 이들의 공통된 주 관심사는 다름 아닌 <성경 연구>였다.
모그룹과 같은 기독교 인문주의(l’humanisme chrétien)는 역사 상 반복되는 단순한 영성 운동이기보다는, 기독교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구조적 변화를 추구하였다고 볼 수 있다. 즉 사후적으로 <새로운 기독교>를 형성케 한 종교개혁이 일어날 수 있도록, 근본적인 작업을 한 것이다. 이들은 소위 프랑스 개신교의 최초 저술이라고 말할 수 있는 <5 종류 해석판 시편집> (라틴어, Quincuplex Psalterium)을 1509년에 출간한 바 있다. 그들의 교회관에 따르면, 당대의 교회를 초대교회와 분리하여 보는 역사적 거리감을 인지하였고, 교회가 개혁을 통해 원천으로 되돌아 갈 때 (un retour aux sources) 비로서 그 거리를 줄일 수 있다고 여겼다. 고전과 성서원어 연구는 결국 성서주의(biblicisme)를 신봉하게 하였고, 중세 신학을 체계적으로 비판하는 입장을 취하게 만들었다. 이는, 특히 인쇄술의 발전에 힘입어, 헬라어 성경과 히브리어 성경에서 직접 국민 언어로 번역된 성경을 보급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하였다.

프랑스 종교개혁의 선구자 : 르페브르 데타플
종교역사학자들은 프랑스 종교개혁의 선구자로서 르페브르가 1512년에 라틴어로 쓴 <바울 서신 주석서>(Commentaires sur les Epîtres de saint Paul)와 그 책의 구절을 자주 인용한다. 사실 그 중에는 루터가 강조한 여러 핵심적인 내용 – 행위에서가 아닌 오직 은혜로 얻는 구원 – 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오직 은혜로 [per solam grattiam] 우리는 구원되었다. 그러나 오직 그 분만이 홀로 선하시며[solus bonus], 홀로 권세를 가지시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우리를 부활시키셨고, 이 영적인 삶은 최후 부활을 상징하는 것이다” ; “우리는 행위에서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속에서 [sed in sola Dei gratia et misericordia], 우리 스스로 영화로워 질 수 있다” (Noëlle Balley가 해석한 글을 P Cabanel이 인용). 이처럼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더 나아가 <이신칭의>로 구원 받는 사실을 밝혔던 르페브르의 성서 연구는 프랑스 개혁운동 초기에 중요한 토대가 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 루터가 5년 후에 강조한 것만큼 강력하지는 못했던 것도 또한 사실이다.
르페브르는 1522년에 <4복음서 입문 주석서>(Commentarii initiatorii in quatuor Evangelia), 1523년엔 복음과 그 외 모든 신약을 불어로 번역하였다. 저서 서문에서 책을 어떤 특정인보다는 <모든 기독교인>에게 헌정한다고 명시하면서, 모든 자가 주님의 말씀에 의존하도록 권고하였다. 특히 복음을 불어로 번역하면서 일반인들이 불편함 없이 접근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1524년 시편 번역에 이어, 구약 전권을 1528-1530년 사이 번역을 하였고, 1530년에 <순수하고 온전한 원본 말씀에서 불어로 번역된 성경> 완전 본을 출판하게 된다. 이는 루터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즉 1522년-1534년 사이에,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것 사실과 의미 있게 비교가 된다. 이처럼 르페브르의 성경번역은 프랑스 종교개혁의 모판을 만들어 주는 역할을 했다.

모그룹의 종교개혁이 미완성으로 끝난 이유
모그룹 인문주의 개혁자들은 르페브르의 성경중심적 사상에 감화를 받아, 설교와 강의를 통해 성직자들의 지식 수준을 향상시키고, 동시에 교회 내의 악습과 성물 숭배를 거부하고,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행위를 비판하였다. 이는 차후 로마 카톨릭의 미신적 예배와 정치와 연합된 부패상에 대해 급진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단계로 이르게 된다. 이로 인해 1525년부터 국민통합을 위해 종교적 통일이 필요했던 프랑스 왕과 개혁사상을 처음부터 억압하려는 소르본느 신학교로부터 박해를 받기 시작한다. 브리소네 주교는 종교재판에 회부되고, 화렐은 스위스 바젤로, 르페브르와 루셀은 그 당시 독일지역인 스트라스부르그로 피신함에 따라, 사실상 모그룹은 1525년 경에 해산된다. 비록 모그룹의 신학적 입장이 종교개혁과 같은 노선을 걷었고, 핍박을 받았지만, 로마 카톨릭 교회와의 단절을 시도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모그룹의 종교개혁 시도는 <미완성된 개혁>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또 같은 맥락에서 모그룹을 <복음주의 카톨릭> 그룹으로 명하는 자도 있다.
이처럼 프랑스 모그룹과 르페브르에 의한 종교개혁이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한 이유로, 첫째 신학적 통일성의 부재를 이유로 들 수 있다. 프랑스에서 뿐만이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볼 때, 인문주의 개혁자들은 내부적으로 다양한 신학 해석 성향을 보여, 신학적 통일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이는 칼뱅이 <기독교 강요>를 통해 개혁신앙의 신학적 체계를 세우기 전까지 지속이 된다. 또 다른 이유는 1520년도부터 프랑스에 유입된 루터 사상이 르페브르의 개혁 사상을 어느 정도 희석시킨 것도 사실이다. 1523년에 르페브르는 성경을 일반 신자들이 읽고, 가장 가난한 자라도 성경을 소유할 수 있도록, 신약을 불어로 번역하였다. 최초의 불어 성경이 인쇄되어 보급된 것이다. 하지만, 천주교 신학의 최고봉이자, 종교재판의 권위를 가진 소르본느 신학교는 이미 2년 앞선 1521년에 루터 사상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이와 관련된 모든 개혁 활동에 대해 박해를 시작한 것이다. 결국 인문주의 개혁자들은 현실적인 선택을 하여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정통교단으로부터 엄중한 처벌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모운동의 정신을 이어 받은 계승 역사
그렇다고 핍박 속에서 모운동의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 왕 프랑스와 1세의 누이 마그리트 여왕은 멀리서 모운동을 지원한 돈독한 개혁신앙을 가진 자였다. 그녀는 핍박 받는 개혁자들을 보호하였고, 그들간 교통할 수 있는 비밀 네트워크를 만들어 나갔다.  후에 칼뱅이 제네바를 중심으로 프랑스 내의 개혁교회를 조직화하기 전까지, 그녀는 거의 30년 동안 개혁자들의 보호자요, 대언자요, 지지자가 되었다. 핍박을 받았던, 르페브르, 화렐, 루셀 등 인문주의 개혁자들이 마그리트 여왕의 보호의 손길을 받았다. 그리하여, 모운동을 통한 프랑스 초기 종교개혁의 불씨가 꺼지지 않고, 그 다음 세대인 깔뱅의 사역으로 연결되는 다리 역할을 한 것이다. 더 나아가 궁중 안에서 천주교 세력에 대한 견제 역할을 하면서, 정치, 외교, 교계, 종교, 지식 사회에서 개혁사상을 지닌 자들이 활동할 수 있도록 은밀하게 지원하였다.
모운동의 개혁사상이 부분적으로 계승된 곳으로 <프랑스 왕립대학> (Collège royal de France)이 있다. 초대 학장 귀이욤 뷔데(Guillaume Budé)는 모그룹 멤버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친구 에라스무스는 뷔데를 “프랑스가 낳은 천재”라고 언급할 정도로 당대 최고 지성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프랑스와 1세 왕은 그에게 왕립도서관을 세울 것을 명한다. 이 학교는 그 당시 소르본는 신학교에서 취급하지 않거나 금지한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가르친다. 성경이 이 두 언어로 쓰여졌기 때문이고, 점차로 이 대학은 개혁에 우호적인 입장을 가지게 된다. 초기 임명된 6명의 교수 중 3명은 히브리어 교수 (François Vatable, Agathias Guidacrius, Paul Paradis) ; 2명은 헬라어 교수 (Pierre Danès, Jacques Toussaint) 그리고 1명은 수학교수 (Ornce Finé)였다.
2년 후(1532-3) 청년 칼뱅은 이곳에서 개혁사상에 열려 있는 교수들과 헬라어(Pierre Danès)와 히브리어(François Vatable)를 더 공부하게 된다. 오늘날에도 <꼴레즈 드 프랑스>는 프랑스 학문의 우수성을 대표하는 학교로서 존재하고 있으며, 모운동의 역사적 유산을 오늘날까지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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