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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독일,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독일시사리뷰]  이성춘 목사, 프랑크푸르트국제교회/ 17회

성경보다 시대정신에 따라 사는 기독교인들…

어쩌면 다가오는 수십년 동안, 세계의 다른 지역에 있는 교회는 급성장 하는 반면에 유럽의 그리스도인은 계속 줄어들어 아주 극소수로 전략할지 모른다.  이런 현상이 발생하면 그것은 교회가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하나님이 가지를 손질하고 계신 것으로 보아야한다…

들어가는 말
오늘날 우리가 사는 시대는 종교 다원주의 시대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레슬리 뉴비긴(“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1989) 은,  “지난 30년동안 유럽인은 처음으로 다른 종교를 가진 다수의 사람들이 자기들 가운데 살고 있는 현실에 익숙해 졌다. …. , 다수의 유럽인들이 기독교에 대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그들이 자기네 종교에 헌신하고 있음을 목격하게 되었다.” 고 지적한다. 그는 또한 18세기 이래 유럽은 인간과 세상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에 등을 돌려버렷고 그 대신 공적인 삶과 관련하여 근본적으로 다른 관점을 수용했으며, 기독교적 관점을 사적부문을 위한 대안의 하나로 그 지위를 전락시켜버렸다고 지적한다.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1986)

오늘날 종교 간의 문제는 국가와 인종간의 문제와 상호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인종차별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종교다원주의를 마땅히 인정하고 수용해야한다는 정서적 당위성이 힘을 발휘하고 있다. 이런 종교다원주의 시대에서는 믿음이란 공적인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적인 신앙의 문제라고 구분하고, 아는 것과 믿는 것을 서로 분리시켜놓았다. 유럽, 독일에서의 다원주의 사회라는 토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최근의 기독교의 상황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1) 핍박보다 유혹에 지고, 성경보다 시대정신에 따라 사는 기독교인들
“기독교인은 핍박을 통한 것보다 유혹을 통해서 더 큰 위험의 위협에 빠진다. 고난은 종종 교회의 성장으로 이끌어지지만, 유혹은 교회를 내면으로 부터 약하게 한다.” 이런 관점을 음악가이며 복음전도자인 루쯔 쇼이플러(발덴부억/삭센)가 헨솔트스헤어 공동체협회와 굳젠하우젠(마텔프랑켄)에 있는 헨졸트스훼헤의 공동체 – 사회봉사 – 어머니 집의 오순절 컨퍼런스에서 가르쳤다.   
그리스도인들은 세계의 여러 곳에서 고난을 받고 있는 형제, 자매들을 기억해야하며, 그들과 연대감을 가져야한다. 다양한 고난에 직면하여 사람들은 스스로 무능력하고 힘없는 자가 된다. 그러나 뮌스터지역교회의 감독인 펠릴스 겐은,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손에 넘겨주신 권세, 곧 중보의 기도를 붙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유럽에서는 다른 지역과 같은 곳에서 일어나는 핍박이 발생하지 않는다.  신앙을 가진 자가 고난을 받거나 감옥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상황이 아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드러내 놓고 살 때, 조롱과 무시 당하게 되며, 이것들은 정신적인 상처로 이어진다.  더 많은 유혹과 상처로 넘어지는 경우들이 많이 발생한다.  
루쯔 쇼이플러는 많은 목회자들이 복음전도와 대중적인 평이한 설교를 거부하고 있으며, 성경 공부보다 시대연구에 더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5월 15일은 교회력을 따라 오순절 주일이었다. 오순절을 맞이하여 독일 기독교인들은 성령을, 영의 분별력의 은사가 다른 어떤 것보다 더 필요하고 중요한 것임을 확인하고 있다. 사람이 영의 분별력을 소유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조명해 주시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성경을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쇼이플러는 오늘날 많은 현대인들은, 예수를 따를 때에,  자신들이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하고, 그렇게 되는 것을 알고 있기에, 더 이상 예수를 따르려고 하지 않는다고 한다. 기독교인도 자신들이 믿는 믿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못하고 숨기고 살아간다.

2) 믿음을 따라서 공공생활을 살아가기가 어려워지는 시대  
오늘날 유럽에서는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기독교의 믿음을 맞추어 살아가고자 하면, 공공생활에서 많은 어려움들을 갖게 된다. 이런 상황을 오스트리아 빈의 구드룬 쿠글러 의원 (ÖVP) 이 사례들을 수집하였다. 그녀는 서유럽에서 발생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에 대하여 더 이상 우호적이지 않고, 관용을 가지지 않는 사회의 모습, 기독교인들에게 대한 공격의 사례들을 수집하였는데, 이미 3,500 경우가 넘어섰다. 그래서 유럽에서 전통적으로 기독교의 왕국으로 지속되어 왔던 토대, 기반이 무너지고, 기독교인들이 믿음의 자유와 믿음의 실천을 제약받지 않고 실천하기가 실제로 어려워지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의사가 자신의 믿음의 소신을 따라 낙태 시술을 해주지 않으면, 의사로서의 허가를 결코 받을 수 없다. 약사도 반드시 낙태를 위한 약을 판매해야한다. 독일에서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들이 학교에서 실시하는 성교육 교과과정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할 경우에, 감옥에 가게 되어있다. 바덴 뷰어텐베르그의 교과과정이 지나치게 성교육을 포함하고, 성별을 남녀만으로 구분하지 않고, 동성애를 허용해서오는 구분까지 확대하여, 화장실도 중성이 들어가는 화장실로 만들어 놓고 있는 실정이다. 믿음을 따라서 성경적으로 자녀들을 가르친다고 홈 스쿨을 하는 부모들이 청소년국에 의해서 자녀들을 접근하지 못하게 되고, 감옥에 가거나 벌금형을 받게 된다. 이렇게 해서 극단적인 예가 되기는 하지만, 성경적인, 신앙적인 세계관으로 자녀들을 양육한다고 미국으로 난민신청을 하여 떠난 가정도 있다. 법조인들은,  기독교인들이 사회활동을 통해서 자신의 좋은 재능을 기여할 수 있음에도,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비난, 조롱을 받을 것에 대한 불안함 때문에 사회활동, 공공영역에서의 믿음의 양심을 따라 사는 일들을 시도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기독교인들은 사회의 일들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언급하거나 적절한 행동들을 취해야한다. 쿠글러는, 유럽에서의 이런 사회, 정치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이 더 용기를 가지고 나아가야하며,  기독교인으로서 소극적인 자세로 사회기관이나 정당 등에서 탈당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입당하고 참여함으로 조직과 그 활동들을 바로 세워가야 한다고 촉구하였다. 기독교인들이 날마다 인터넷이나 신문에서 단 한 문장이라도 신앙에 따른 자신들의 입장을 표현하여, 현실사회에 적절하게 대응해야 하는 공적인 영역에서의 신앙생활을 회복해 가야할 것이다.

3) 믿음의 사적인 부분과 공적인 역활 사이에서
기독교인이 가족과 직업과 이웃관계를 통해서 자동적으로 공동단체로 결합되어가면서, 동시에 믿음의 생활의 대부분이 개인의 삶의 영역으로 축소되고 있다. 마부룩의 교육과 연구의 센터에서 사회변화의 연구프로그램의 책임자인 토비아스 팍시스 교수는 믿음은 개인적일 수 있지만, 결코 사적인 것은 아니라고 표현했다. 기독교의 믿음은 개인적인 믿음과 공식적인 삶, 곧 사람 전체에게 관련되는 것이다. 믿음은 내세에 관한 개인의 신앙만이 아니라 전 사회와 우주의 샬롬을 포함한 하나님 나라의 회복에도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기독교의 신앙을 따라 살 때에,  핍박을 받는 나라가 있기에,  믿음은 결코 사적인, 개인적인 영역으로만 축소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활동도 되는 것이다.
예수님 자신도, 스스로 고난받고, 억압되고 소외된  삶을 살았고,  또한 그 사람들을 위해서 긍휼, 사랑, 분명함으로 헌신했다고 팍시스는 지적하고 있다(요 17,15.18).   초대교회의 기독교인들은 이런 모범을 따라서 살았으며,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이런 전통에 서있는 것이다. 그래서 공공 조직 속에서 말과 행동과 이웃사랑의 행함 속에서 간섭하며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바로 기독교인들이다. 기독교인들은 내세에 소망을 둔 개인적인 사람으로만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삶을 함께 살아가는, 개인의 변화와 사회의 변화를 활동적으로 이루어가는 사람들이다.  
뉴비긴(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요)은 다음과 같이 기독교인들이 공적인 영역에서의 삶을 이루어가야 한다고 정리해 주고 있다:  “교회지도자들이 윤리적, 정치적, 경제적 문제와 관련하여 그 입장을 발표할 때에, 각 분야에서 개인의 희생을 무릎쓰고 믿음에 입각하여 공적인 삶의 어려운 이슈를 붙들고 씨름해서 나온 정련된 신학의 도움을 받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기반을 더욱 든든히 쌓아야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든 교회에서 평신도들이 평일에 직업현장에서 겪는 경험을 서로 나누고 그런 세속적인 일을 복음에 비추어 그 의미를 발견하도록 격려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에만 우리는 서구 문화가 나누어 놓은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을 다시 하나로 묶을 수 있다. 그럴 때에만 교회는 그 본연의 선교적 역활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4) 난민의 분리수용인가,  종교자유와 관용의 우선적인 홍보인가?
독일 복음주의 협의회는, 기독교 난민들을 난민수용소에서 더 잘 보호해 주어야 하며, 그들을 분리 수용해야 한다고 촉구하였다. 그 이유는 5월 9일 베들린에서 기독교 도움기관인 오픈도어의 난민수용소에서의 모슬렘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핍박사례 발표에서 제시되었다. 기독교인 난민들이 수용소에서 자주 모슬렘 난민들과 모슬렘 안전요원들에 의해서 공격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기독교인이 피해자들이 4만명에까지 이르고 있다고 한다. 이 문제에 대하여, 독일사회에서 주어진 정보와 해결방안에 대하여 오랫동안 다양한 입장들이 주어지고 있다.
고난받는 기독교인 형제들과의 연대감을 표시하고 이런 형제들을 분리수용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하여, 문제해결을 위한 좋은 해결방안이 아니라고 커어스틴 이나 헤리베어트 하어테 등과 같은 정치가들이 주장한다. 그들은, 모든 난민들에게, 종교적인 이유로 차별하는 일들이 용납되지 않는다고 명백하게 주지해야 한다고 한다. 베스트팔렌 교회의 위원장인 안네테 쿠어슈스(빌레렐드)도, 독일에 살고자 원하는 모든 난민들은 이 나라의 공개적인 사회를, 종교와 의사표현의 자유와 남녀의 동등한 권리 등이 타협될 수 있는 것도 양보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을 반드시 인정하도록, 분명하게 가르쳐져야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문화의 환경에서 이 나라로 온 사람들에게 이런 사실이 반드시 분명한 어조로 오리엔테이션이 되어야한다는 것은 적절한 주장이었다.
복음주의 협회의 사무총장인 하르크무트 스테엡(슈튜트가르트)는 이런 방식은 현재의 상황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독일교회협의회와 바이에른 주교회의 총회장인 베드포드 스트로흠(뮌헨)는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기독교인들이 난민의 수용소에서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것은, 용납될 수없는 일이다. 그러나 종교별로 숙소를 분리해서 운영해야 한다는 것은 그는 더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볼커 카우더는  난민들을 종교와 국가에 따라 분리하여 수용하는 것은 독일사회와의 난민들의 통합을 어렵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모든 사람들이 관용적이 되어야 함을 반드시 배워야한다. 카우더는 자신의 믿음을 다른 사람이 알아차리도록 헌신하는 기독교인들을 칭찬하였다.   
의원인 헤리베르트 히르테는, 다른 난민 그룹들,  알레비텐, 동성연애자들, 여성들이 보호를 받게 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난민들을 종교나 교파를 따라 분리하여 수용하는 것을 반대했다. 자신의 고향에서 그들의 믿음을 인하여 핍박은 받았던 기독교인들이 이곳 독일 난민수용소에서 또 다시 잘못 취급되어지는 일들이 발생해서는 안되는 일이지만,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쉽지 않은 일인 것이다.  

5)  현지 적응의 유럽화와 국가와 인종중심의 게토화의 평행사회
국제 알파와 오메가라는 오순절 교회(함부르크)가 79명의 이란 사람과 아프칸 사람들에게 5월 5일에 시민공원의 호수에서 세례를 주었다. 봄에 이미 196명이 새롭게 세례를 받았고, 앞으로 60명이 6월에 세례를 받게 된다. 2015년말에 250명의 교인이었던 교회가 이제 450명이 넘어섰다. 베를린의 삼위일체교회는 현재 교회안에 500명의 난민들이 출석하고 있는데, 그중의 4분의 3은 이란 사람들이고, 4분의 1일은 아프카니스탄 사람들이다. 350여명이 곳프리드 마르텐목사가 직접 세례를 준 사람들이다. 이 교회에는 러시아계 독일인 기독교인들이 포함된 독일 사람들이 200명 출석하고 있다. 이 두교회는 난민들로 구성된 대표적인 교회들이다.
개신교 자유교회(침례교, 오펜부억)의 이란에서 온 시아막 아민만슈어목사는 외국인들도 독일 교회에 가야한다고 주장한다. 독일에 이민자로 와서 기독교인이 된 외국인들은 개별적인 교회를 세우지말고, 이미 존재하는 교회에 등록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회람서신에,  외국어로 이루어지는 유럽, 독일현지의 교회와  분리된 별도의 평행구조의 교회의 출현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다.  이런 이민교회는 주변의 현지교회와 교제가 없는 게토를 이룰 것이고, 이민자들이 현실적으로 독일어를 배고우고자 하는 필요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믿음의 내용과 윤리적인 질문들이 상호 교류도 없이, 답변되어짐도 없이 지나가게 되고, 독일의 지역교회와 외국인 교회 사이의 거리는 매일같이 멀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슬람 국가는 아랍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이슬람 종교는 모하메드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아랍어로만 들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엄격한 이스람의 가르침에 따르면, 코란경은 번역되는 것이 불가능하고 해석만 가능하다고 한다. 기독교에서는 성경을 모든 방언으로 번역되어지고 있다. 교회가 탄생하던 그 오순절에,  여러나라에서 온  다양한 사람들이 자기네 언어로 복음을 들었다. “동방교회는 이것을 일컫어 언어의 세례라고 부르는데, 이를 기초로 시릴과 메소디우스 같은 그리스인 선교 개척자들이 슬라브 민족을 회심시키기 위해 성경과 예배 의식을 슬라브 언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오순절을 근거로 우리는 하나님이 언어를 수용하신다고 확실히 말 할 수 있다.”(뉴비긴, 다윈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나가는 말
볼커 카우더는 많은 모슬렘 사람들이 모스크에서 기도하는 것이 그에게 염려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더 이상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그들은 그들의 믿음이 거의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파키스탄 출신의 오스트리아의 베스트셀러 작가이면서 인권옹호자인 사바티나 제임스(33)는, 독일에서 오늘날, 길거리에서 코란을 나누어주는 살라피스텐을 보는 것이, 산상수훈을 설명하는 기독교인을 발견하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라고 지적한다.
뉴비긴(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은 “그리스도인이 어느 정도의 다원성은 환영하되 다원주의는 거부해야한다고 믿고 있다. 다원적 사회는 단색적인 사회보다 훨씬 다양한 경험 그리고 그런 경험에 대한 아주 다양한 반응과 더불어, 우리가 가진 이 믿음으로 충분한지를 시험할 수 있는 풍부한 기회를 제공해 주기 때문에, 그런 사회를 환영할 수 있고 또 환영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또한 “어쩌면 다가오는 수십년 동안, 세계의 다른 지역에 있는 교회는 급성장 하는 반면에 유럽의 그리스도인은 계속 줄어들어 아주 극소수로 전략할지 모른다.  이런 현상이 발생하면 그것은 교회가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하나님이 가지를 손질하고 계신 것으로 보아야한다.(요 15,1이하) 그런 일이 발생하면 많은 고통이 따를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내 아버지는 정원사다”라고 우리를 안심시키신다. 그 분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잘 알고 계심으로 우리는 그분을 신뢰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를 자아성찰과 회개와 새로운 헌신으로 부르는 소리임에 분명하다. 이는 염려할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며 자신이 시작하신 일을 온전히 이루실 것이기에”라고 그의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을 마무리 하는데, 필자도 그의  언급을 인용함으로 이 칼럼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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