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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행

마르틴 루터의 출생과 성장

[루터&종교개혁] 김현배 목사/ 베를린 비전교회/ 1회

종교개혁의 생수: 마르틴 루터의 출생과 성장

“Und wenn ich wüsste, dass morgen die Welt unterginge, würde ich doch heute ein Äpfelbäumchen pflanzen”_Martin Luther/ 내일 세계의 종말이 오더라도 나는 적은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겠다_마틴 루터..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
사람들은 중세시대 1,000년을 타락하고 부패한 암흑기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여러 가지 신학적, 교회적, 윤리적 악습들이 난무하고 진리가 어두워지고 교회가 타락한 시대였기 때문이다. 교황이 온 유럽을 다스리고 있던 중세시대는 교황의 권세가 대단했다. 당시 교황권의 지배를 받던 모든 사람들이 교황 제도와 교황의 부당한 요구에 대해 불평했다. 독일 교회도 교황의 통치 아래서 결코 편안함을 느끼지 못했다. 개인에 대한 자유를 사랑하는 독일 사람들은 교황제도로부터 해방을 이루어 자유와 독립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기를 원했다.

이처럼 중세는 교회의 부패와 교황의 권위로 가득했다. 빛이 어두움에 갇혀 버렸다. 하지만 어두움을 물리칠만한 구원의 빛은 보이지 않았다. 하나님은 타락한 이 시대를 청산하시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은 구약 시대 때 아브라함, 모세, 다윗과 여러 선지자들을 선택하셨던 것처럼, 영국 교회 부흥을 위해 존 위클리프, 존 낙스, 17세기 청교도들과 언약도들을 부르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어두운 중세시대를 마무리하시기 위해 독일의 한 젊은이를 부르셨다.

구워 먹을 수 없는 백조, 마르틴 루터의 출생

1372년에 프라하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존 후스는 ‘거위’라는 뜻이다. 그 당시 후수가 설교할 때면 거위가 떠든다고 조롱했다. 1415년 콘츠탄츠 공의회에서 후스가 이단으로 정죄 받고 화형 당할 때, 그는 “오늘 당신들은 한 마리의 거위를 태우지만 100년 뒤에는 백조 한 마리가 나타날 것인데, 당신들은 그 백조를 결코 구워 먹지 못할 것이다”고 예언했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유럽을 지배하고 있었다. 종교개혁시대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어디선가 큰 빛이 필요했다. 이러한 때에 ‘구워 먹을 수 없는 백조’,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1483년 11월 10일, 과거 동독의 작센 지역인 아이슬레벤(Eisleben)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한스 루더(Hans Luder)와 그의 어머니 마가레테(Margarete)는 정직하고 부지런하며 경건한 사람들이었다. 본래의 성은 루더(Luder)였으나 후일 루터(Luther)라고 바꾸었다. 루터는 그 시대의 관습에 따라 출생 다음날인 11월 11일 성 베드로-바울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았다. 그가 세례 받은 날이 교회력으로 ‘마르틴’ 성자를 기르는 날이어서 세례명으로 마르틴(Martin)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성 베드로-바울교회는 루터가 유아세례를 받은 세례대가 원형으로 보존되어 있다.   

혹독한 교육훈련을 받은 소년 루터

루터가 태어난 지 6개월 쯤 되어 루터의 부모는 약간의 돈과 재산을 가지고 고향을 떠나 큰 광산지역인 만스펠트(Mansfeld)로 이사하여 정착하였다. 루터의 어린 시절은 혹독한 가난과 싸우던 시기였다. 그의 부모는 교육받지 못한 하급 신분으로 경제적 여건이 좋지는 않았지만 루터는 촌스러운 자신의 배경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평소 루터는 “나는 농부의 아들이며 (ich bin eins Bauern), 나의 아버지, 할아버지, 그리고 선조들은 모두 정직한 농민들 이었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곤 했다. 하지만 그는 일생동안 농민들의 사상과 감정과는 대립해 있었다.
종교개혁을 위한 루터의 훈련은 엄격한 부모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당시 교육 기술의 주요 수단은 체벌이었다. 루터의 부모도 매우 엄격한 훈육으로 교육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의 부모는 루터가 약간만 잘못했어도 혹독한 체벌을 했기 때문에 그는 힘겨운 젊은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아무리 루터의 어린 시절이 혹독했다 할지라도 그는 부모의 훈육이 오직 사랑 안에서 행해졌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경건한 기독교인 어머니 마가레테는 그를 어릴 적부터 철저한 신앙생활을 하도록 가르쳤다. 루터는 요리문답과 십계명, 사도신경, 주기도문, 그리고 라틴 문법과 독일어 찬송을 배웠다.
루터는 1488년부터 1496년 까지 만스펠트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공부했다. 이 학교에서 루터는 글과 노래, 라틴어를 배웠다. 모든 책이 라틴어로 쓰였기 때문에 루터는 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라틴어 공부를 시작했다. 그런데 루터는 라틴어 동사의 인칭변화와 명사의 격변화를 제대로 외우지 못해 회초리로 맞기도 했다. 당시 교사들은 어린이들을 구타하면서 라틴어 초급 문법을 가르쳤다. 훗날 루터는 학교에서 매를 맞으며 교육을 받았다고 회고하면서, 그 학교는 ‘어린 영혼의 파괴자’라고 묘사했다. 소년 시절 루터는 만스펠트와 막데부르크(Magdeburg), 그리고 아이제나흐(Eisenach) 등지에서 교육 받았다.
만스펠트에는 어린 루터가 부모와 함께 살았던 집이 있는데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루터가 공부했던 초등학교는 현재 여행 안내소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루터가 어린 시절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다녔던 성 게오르크 교회가 있으며, 교회 건물 입구 위에는 소년 루터상이 매달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루터 거리에 조그마한 광장처럼 보이는 곳에 루터 기념 우물(Lutherbrunnen)이 있다. 이곳에는 1913년 폴 쿡호프(Paul Kuckhoff)에 의해 건립된 소년 루터의 기념동상이 있다. 이 동상에는 루터의 삶에서 가장 의미가 있는 세 장면이 새겨져 있다. “1장면, Hinaus in die Welt (세상으로 나가다): 루터는 13세에 만스펠트를 떠나게 된다 2장면, Hinein in den Kampf (전쟁 속으로): 루터가 비텐베르크에서 반박문을 박는 모습. 루터의 이 방망이질은 세상을 변화시켰다. 3장면, Hindurch zum Sieg (승리를 향하여): 종교개혁자의 모습을 띈 루터가 성경을 번역하고 있다.”
특별히 소년 루터의 동상이 있는 그 아래로 물구멍이 있어 물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치 주님이 주신 생수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활력을 불어 넣어준 것처럼, 루터로부터 솟아나는 개혁의 생수는 결국 유럽을 살려 낸 것이다.  

신앙에 눈뜨며 광명의 빛을 느끼기 시작한 청소년 루터

아버지 한스는 루터가 법학을 공부하여 만스펠트 백작의 법률고문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 교육에 집념이 강한 아버지는 13살 된 루터를 아이제나흐에 있는 라틴어 학교로 전학시켰다. 독일의 중부 튜링엔의 아담한 도시 아이제나흐는 루터의 외갓집이다. 루터 당시 4,500명의 인구 중 400명 정도가 수도사내지는 수녀들이어서 성직자들의 서식처로 불리어졌다. 이곳에서 루터가 청소년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 학교에서 루터는 종교, 도덕, 정확한 문법, 라틴어, 논리학, 웅변술, 시, 음악 등을 배웠다. 이런 과목들은 장래 루터가 신학자로서 활동과 종교개혁을 수행하는데 효과적인 기본 도구들이 되었다. 또한 청소년 루터는 음악을 좋아하고 목소리가 뛰어났다. 그는 명문 귀족 집들을 찾아다니며 노래를 부르고 류트(lute)를 연주하면서 생활고를 해결했다.
어느 날 특별한 일이 일어났다. 아이제나흐에서 가장 부유하고 상류 귀족인 우르술라 코타 (Ursula Cotta) 부인은 루터의 아름다운 노래에 감동되어 자기 집으로 초대하였다. 루터는 코타 부인의 사랑스런 섬김 속에 하숙생으로서 코타 집에서 기거를 하게 되었다. 광산촌 서민 출신이었던 루터는 부유하고 교양 있는 귀족들의 상류세계를 접할 수 있게 되었고, 학생으로서 루터는 이곳에서 1498년부터 1501년 까지 살았다. 루터가 학창시절에 행복하게 살았던 이 루터하우스는 후에 아이제나흐의 목사관으로 쓰여 지다가 지금은 루터의 학창시절과 그 생애, 지역교회의 역사를 기념하는 박물관으로 사용되어지고 있다. 루터하우스는 이 도시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독일 전통가옥 중 하나다.
또한 루터가 살던 집 옆의 거리 구석에는 작은 사과나무 한 그루가 심겨져 있고 그 밑에 다음의 글이 쓰여져 있다. “Und wenn ich wüsste, dass morgen die Welt unterginge, würde ich doch heute ein Äpfelbäumchen pflanzen”_ Martin Luther (내일 세계의 종말이 오더라도 나는 적은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겠다)는 구절과 루터의 이름과 문장이 적혀있다. 우리가 대부분 이 말이 스피노자 (Spinoza, 1632-1677)가 한 말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은 루터의 말이었다. 스피노자는 루터보다 뒤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기억해 보면 스피노자가 인용했으리라 본다. 루터의 표현이 원조인 셈이다.
또한 이 도시에는 1498년 마르틴 루터가 청소년 시절을 보낸 게오르겐 교회(Georgenkirche)가 있다. 루터는 이 교회에서 약 3년 동안 소년성가대원으로 노래를 불렀으며, 그 당시 폰 카이저베르크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서 신앙에 눈이 떠졌다. 그 후 루터는 광명의 빛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이슬레벤에서 태어난 종교개혁자 루터의 가슴에 서서히 진리의 불이 붙기 시작했다. 그 불이 중세의 어두움을 밝히게 된다.


kimhyunbae
필자 김현배 목사 소개
김현배 목사는 베를린 비전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총신대학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후, 영국 런던신학교와 웨일스 복음주의 신학대학교에서 청교도와 부흥에 대해 연구하였다. 총회세계선교회(GMS) 파송 독일 선교사이며, 유럽성시화운동본부 상임회장으로 사역하고 있다. 저서로는 “영국 부흥의 주역들”(CLC)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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