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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에게 바치는 경의 (early 16th)

[아트저널]  박심원목사/ 예수마을커뮤니티교회 담임/ 12회

조르지 다 카스텔프란코, Zorzi da Castelfranco, 이탈리아/ 필명: 조르조네 (Giorgione)

시인이 앉은 맞은편에 큰 바위 얼굴이 내려다보고 있다. 화가의 의도적 계산일 것이다. 큰 바위 얼굴은 인자하게 내려다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같다.

러시아의 한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다. “피로써 시를 써라.” 시를 쓴다는 것은 압축된 시어 몇 개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과 인생을 녹여 써야 한다는 의미이다. 한 시인은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글을 쓰신다면 시를 썼을 것이라 단정하곤 했다. 두꺼운 내용의 소설일지라도 몇 줄의 시로써 압출할 수 있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셨던 기간에 직접 글을 쓴 것은 요한복음 8장에 두 번 언급되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라며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 물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외에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군집하였다. 주님은 그들의 질문에 답하지 않으시고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글을 쓰셨다. 글을 쓰는 모습에 주변 상황은 쥐죽은 듯 조용해 졌다. 침묵을 깨고 일어나셔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라치라’ 하시곤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셨다. 첫 번 글은 회중을 조용하게 만들었다면 두 번째 글은 회중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떠나가게 했다.

내가 느끼는 시의 원형이다. 회중을 집중시킬 수 있는 압축된 언어와 서로를 시기하고 자기 이익만을 생각하는 이 시대에 그 압축된 시어가 양심을 두드리는 방망이가 되게 하는 것이다. 내게 시를 가르쳐 주신 고강 ‘김준환’ 선생은 ‘시는 마음에 담기는 것이기에 마음으로 써야 한다.’ 고 가르쳐 주셨다. 예술 분야에서 시와 미술은 그런 의미에서 서로를 닮았다. 시는 언어를 최대한 아껴야 하기에 압축된 시어를 사용해야 한다. 그러면서 많은 이야기가 함축해서 담아야 한다. 그림도 그러하다. 선 하나에 의미가 담겨 있고, 점 하나에 인생을 담아야 하며, 선과 점은 사람의 영혼을 사로잡을 뿐 아니라 과거와 현재, 미래의 아름다운 균형을 이룬다. 시는 과거와 미래를 예고 없이 드나들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는 예언적 작품이 된다. 그림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균형 예술이 된다. 시가 그림이 되고 그림은 다시 시가 되는 순환을 통하여 보장된 미래를 점유 할 수 있는 통찰력을 길러 준다.

그림 앞에 선다는 것은 현대적 시각으로 과거로의 여행인 셈이다. 누군가 말했다. 여행은 떠나는 것이 아니라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림에 그어진 점과 선, 색의 조화를 따라가다 보면 과거로 갈 수 있는 문이 열린다. 과거는 낯선 곳이다. 모든 인류가 과거를 지나온 정거장인 것 같이 느낀다. 그래서 지난 시간을 꿈과 같다 하여 춘몽이라 부르곤 한다. 나폴레옹에게 특별한 역할을 담당하는 병사가 있었다고 한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병사는 나폴레옹을 향해 이렇게 말해야 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승리의 영광도 지나갈 것이며, 패배의 순간도 지나갈 것이다. 그러니 본질을 기억하라는 의미가 담긴 말이다. 원래 이 말을 처음 한 사람은 솔로몬으로 알려져 있다. 백전백승했던 아버지 다윗의 영광을 기념하기 위해 반지를 제작했다. 솔로몬은 반지 안쪽에 이 말을 기록하게 했던 것이다. 그의 말은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인간이 살아가는 것은 현재의 시간뿐이다. 기억 속에 남겨진 과거가 아니라 기억 밖의 역사에만 흐릿하게 남겨 있는 과거로 간다는 것은 자칫 길을 잃을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영국의 역사학자 ‘E. H 카’ 의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 에서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다.” 라고 했다. 과거는 기억 속에만 존재할 뿐이지 현실에서 그것을 바꿀 수는 없다. 과거를 기억 속에 남겨 그것을 다시 미래로 연결해 주는 것은 인간만이 가지는 능력일 것이다. 그림이나 글로써 현대를 그려내고 기록한 것이 훗날에 과거를 회상할 수 있는 역사적 흔적이 되는 것이다.

당시에 그려진 그림과 글을 통하여 삶의 중심적 철학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된다. 16세기 초엽 이탈리아 화가 ‘조르조네’ (Giorgione)에 그려진 ‘시인에게 바치는 경의’ 는 시대적 상황이 마치 생활뉴스와 같이 당시의 일상의 생각들이 그림에 녹여져 있다. 시인은 존중받았다. 이유는 단순한 글쟁이가 아니라 글에 예언적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시인들이 노래한 것은 훗날에 이뤄지는 것이며 국가의 길흉이나 찬란한 영광의 메시지가 시에 담겨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아무나 시인이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시인은 곧 국가로부터 월계관을 받을 만한 지도자적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왕과 같은 자리에 위치한 시인에게 바치는 경의는 그 사람에 관한 영예가 아니라 시인에게서 나오는 시적 통찰력 때문이다. 현대에도 글 한편이 시대적 영웅을 만들어 내기도 하지만 중세기 시대 시인의 위치는 현대의 시각으로는 상상할 수 없다. 시인이 앉은 맞은편에 큰 바위 얼굴이 내려다보고 있다. 화가의 의도적 계산일 것이다. 큰 바위 얼굴은 인자하게 내려다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같다. 가시 면류관을 쓰고 인간을 위해 고난당하심을 표현하기 위해 바위 틈새에 자랄 수 없는 나무들이 앙상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영광을 받는 시인의 모습은 결코 기쁘지 않다. 그가 쓴 월계관이나 감미로운 연주자의 음악이 그를 기쁘게 할 수 없는 이유는 인간이 가진 시기심과 미움, 신앙적 배도 때문일 것이다.

시인 앞에 세 마리의 동물들이 자유롭게 거닐고 있다. 치타, 공작, 뿔만 보이는 사슴이다. 결코 함께 거닐 수 없는 존재들이지만 서로에게 헤를 끼치지 않는다. 화가는 꿈꾸었을 것이다. 인간의 욕망이나 이기심이 사라진 상태, 다시금 그리스도 심장에 못을 받는 일이 없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가 꿈꾸는 것은 마치 이사야11장에 묘사된 먹이사슬을 초월한 천국이었을 것이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사11:6-8)

자기 이익이 있을 때는 면류관까지 마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 자신이 바친 면류관에 침을 뱉을 수 있는 것이 인간이 가진 거짓된 욕망과 배도일 것이다. 그래서 화가는 그림을 통하여 중세시대를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중세 시대뿐 아니라 21세기 최첨단 과학 시대를 사는 오늘날의 문제이기도 하다. 어떠한 철학도 종교도 가지지 못하는 짐승도 한 울타리에서 행복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는데 철학을 가지고 있고 거룩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인간은 배신과 배도를 밥 먹 듯 한다. 가장 믿어야 할 사람임에도 사람에게 상처를 받는 일이 더 많아지는 세상이다. 누가 월계관을 쓴 시인의 얼굴에 미소를 머금게 할 수 있겠는가? 영광의 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기쁜 일이긴 하지만 웃지 못하는 시대상을 화가는 근심에 가득한 시인의 모습을 통하여 대변한다. 위대한 시인에게 바치는 경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언제나 내 삶을 지켜보시는 큰 바위 얼굴과 같은 그리스도 앞에 부끄럽지 않게 사는 삶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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