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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16세기 종교개혁을 위해 선택된 칼뱅 (1)

[프랑스포커싱]  채희석 목사/ 파리 모두 제자교회/ 16회

종교개혁자로 인정 받기 전까지 칼뱅의 삶

칼뱅은 1509년 7월 10일 프랑스 북부 파카르디 지방의 유명하고 오래된 주교의 도시 누아용(Noyon)에서, 정직한 중산층 가문에서 5남 중 차남으로 태어난다. 그에겐 신앙심 깊은 아버지 제라 코뱅 (Gérad Cauvin)과 어머니 쟌느 르프랑 (Jeanne Lefranc)가 있었다. 어머니는 어린 칼뱅에게 카톨릭 신비주의 영향을 끼쳤다.

왜 우리는 아직도 칼뱅을 주목해야 하는가?

독일의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그에서 핵심적으로 교황의 면죄부 남용에 이의를 제기하고 신학적 논쟁을 일으킨 95개조 반박문이 16세기 종교개혁의 시발점이라면, 프랑스의 장 칼뱅은 1536년 <기독교 강요>(l’institution chrétienne)를 저술하면서, 개신교 신학과 영성을 형상화하고 조직화하여 진정한 종교개혁을 유럽 전역에 점진적으로 구축해 나갔다고 말할 수 있다. 칼뱅은 16세기 종교개혁자 1세대 중 후발자이면서, 동시에 루터 이후 본격적인 종교개혁을 온 유럽에 실현시키는 시대적 소명을 책임 있게 감당한 자이다. 그는 천주교 신학의 지배를 받아온 유럽 중세사회에서, 성경의 의미를 재발견하고, 그 가르침으로, 새롭게 형성되는 복음주의 기독교 공동체를 제시하였다. 그것은 기존 종교 체제에 대한 불의한 반발이 아닌 기독신자로서의 정의로운 요구였다. 이처럼 그는 중세 기독교의 미신과 불안과 속박으로부터 해방된 복음주의 신앙을 지키려 했다.   


당시 제네바와 프랑스는 칼뱅에 의한 개혁운동의 현장이요 거점이었다. 비록 종교개혁자로서 인생의 대부분을 조국을 떠나 인접 국경지역에 위치한 제네바에서 사역하였지만, 그는 종교개혁이 프랑스에서도 실현되길 한시도 잊지 않고 간구했다. 칼뱅은 정치 혁명가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지정학적인 차원에서 조국의 정세와 왕권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즉 프랑스의 기독교가 회복되기 위한 최선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프랑스 왕권이 복음으로 돌아와 종교개혁을 받아들일 때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것은 그가 품은 조국을 향한 하나님 안에서의 소망이었다. 그는 자신의 임종 후 8년이 지나서야 조국에서 일어난 <성 바르테레미 대학살>(1572년, le Massacre du Saint Barthélémie), 즉 정권이 개입된 개신교인 말살(génocide)을 목격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개혁사상에 대해 천주교와 왕권이 결탁하여 철저한 핍박이 시작되는 현실을 주시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고국의 위그노가 (요한복음 3장에 남의 시선을 의식해 밤늦게 홀로 예수를 찾아온 종교지도자) 니고데모(Nicodème)처럼 숨어살면서 신구교 간 타협된 삶을 살기보다는, 순교로 핍박을 이기거나, 조국을 떠나 망명의 길을 선택하여 적극적인 신앙의 삶을 살 것을 권유하였다. 칼뱅은 프랑스 기독교 역사 상 가장 특별한 상황 속에서 마치 “프랑스 위그노 교회의 주교내지는 수장”으로 마지막 생애를 살았다.

칼뱅은 신학적 업적만을 쌓는 지적인 개혁자이기보다는 프랑스와 유럽 사회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실질적 개혁을 통해 변화될 비전을 가지고 실천한 <현장의 개혁자>였다. 교회사에서 전무한 광대한 성경연구와 주석서 등 59권 전서(Calvini opera omnia)를 출간했다. 또 수많은 목회서신과 지침서를 통해 유럽 교회 개혁개척과 발전에 기여했고, 제네바와 프랑스에선 개혁교회 조직화를 이루어냈다. 그가 세운 제네바 아카데미를 통해 유럽 각국의 수많은 목회사역자들이 양성되어 흩어졌다. 제네바 아카데미에 대해 존 녹스 (John Knox)는 “사도시대 이후 이 땅 위에 존재했던 그리스도의 가장 완벽한 학교였다”라고 평가할 정도이다. 이처럼 그는 중세기독교에 대해 단절의 한 획을 그었다. 그리고 그는 아직도 우리 시대 교회에게 “개혁”을 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생애를 간략하게나마 다시 한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종교개혁자 칼뱅 이전 칼뱅의 삶 (1509-1531)

칼뱅은 16세기 종교개혁이 발생할 때 루터 이후 가장 큰 역할을 한 자이다. 당시 종교개혁 사상을 배우려면 스트라스부르그(Strasbourg, 당시 독일 도시로 종교개혁파들의 주요 활동지요, 종교핍박을 받는 프랑스인들에겐 피난처)에 가서 루터 개혁파들을 만나면서 신학 공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칼뱅은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칼뱅이 종교개혁자의 반열에서 비로서 알려지기 시작된 시점은 “기독교 강요” 라틴어 초판을 발간한 후부터이다. 그의 나이 불과 27세였다. 그가 아직도 거의 무명 인사일 때, 개신교 종교개혁의 핵심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그 시대에 있어서 커다란 관심을 갖게 만든 신학서적을 발간한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우리가 모르는 칼뱅이 있지 않을까?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종교개혁자 칼뱅 이전의 칼뱅”(Calvin avant Calvin le réformateur)을 모르는 것이 아닐까?

그러면 칼뱅이 종교개혁자가 되기 전의 삶과 모습은 어떠했을까? 칼뱅은 1509년 7월 10일 프랑스 북부 파카르디 지방의 유명하고 오래된 주교의 도시 누아용(Noyon)에서, 정직한 중산층 가문에서 5남 중 차남으로 태어난다. 그에겐 신앙심 깊은 아버지 제라 코뱅 (Gérad Cauvin)과 어머니 쟌느 르프랑 (Jeanne Lefranc)가 있었다. 어머니는 어린 칼뱅에게 카톨릭 신비주의 영향을 끼쳤던 신앙심 깊은 자였다. 하지만 그의 나이 불과 6세 때에 어머니는 세상을 떠난다. 6-7세가 되었을 때, 칼뱅은 상류층 집안의 자녀들이나 다닐 수 있었던 누아용의 카페트 초등학교(collège des Capettes)에서 라틴어 입문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1523년도까지 그 학교를 다닌다. 이는 비록 기초 수준이지만, 그의 아버지는 그 당시 유럽 지식계층 언어인 라틴어를 배우는 소년 칼뱅에게 이미 총명함과 우수한 지적 능력이 있음을 발견한다. 12세가 되면서, 칼뱅은 성직자가 될 때 머리 한 가운데를 둥글게 깍는 삭발례(tonsure)를 받았는데. 이는 성직자 지망생의 첫 단계이기도 하다. 그리고 성당의 한 채플에서 소속된 소년사제(chapelain)가 된다. 하지만 칼뱅은 결코 후에 카톨릭의 어떤 수도회에 가입하거나, 정식 사제가 되진 않는다. 그는 일년 남짓한 기간에 소년사제의 역할을 하면서 천주교 내부의 모습을 체험하게 된다.

14세가 되어 파리(Paris)에 올라가 엄격한 교육으로 이름이 있던 몽테귀(Montaigu)학교에서 4-5년간 철학부에서 다양한 인문학 공부를 한다. 졸업 후 아버지의 권유로, 사제가 되기 위한 신학공부보다는 오를레앙(Orléans), 부르즈(Bourges)에서 로마법학과 인문주의를 5-6년 공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법학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삐에르 드 레스투왈(Pierre de l’Estoile), 앙드레 알씨아 (André Alciat) 등 저명한 교수를 통해 법학과 역사비평을 배울 뿐만 아니라, 당대 최고의 헬레니즘 사상가인 구텐베르그 출신 멜시오 볼마(Melchior Wolmar)교수를 통해 루터 사상을 이미 접하게 된다. 베제(Bèze)에 의하면, 칼뱅은 오를레앙과 부르즈에서 공부하는 동안, 단순히 법학만을 공부한 것이 아니라, 성경을 자립적으로 공부하였다. 비록 신학교에 발을 들여 놓지는 않았지만, 이 기간 동안 그는 스스로 신학과 성경을 심도 있게 연구한 것이다. 특히 볼마 교수를 통해 <헬라 문학>을 배우며 신약 원본을 이해하며 성경신학의 깊이를 더해 갔다. 칼뱅이 어느 시점에 회심한 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는 법학을 공부하는 동안 이미 개혁사상을 나누는 복음주의 그룹에서 교제하며 설교도 하였다.

종교개혁가의 길로 접어들게 만든 마지막 사건들(1532-1536)

첫 번째 사건은 아버지의 출교와 죽음이다. 칼뱅은 누아용 사제와 갈등을 겪으면서 결국 출교 당한 후 1531년에 사망한 아버지 죽음을 계기로 자신의 행보에 중대한 방향전환을 한다. 그의 아버지는 이미 사망했지만 이단으로 정죄를 받게 되자 (1534년), 칼뱅은 누아용에서 받는 모든 성직록(일종의 성직 장학금)과 인연을 끊는다. 이는 동시에 천주교와의 결별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공부 방향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오를레앙에서 법학 학위를 받은 후(1532), 그는 평소 심중에 두었던 공부, 즉 성경언어 및 문학에 열정을 쏟는다. 1532년 칼뱅은 오를레앙에서 파리로 올라온 후 한편으로 강의를 하고 다른 한편으론 불과 2년 전에 창립된 프랑스왕립학교(Collège Royal de France)에서 성경언어를 더욱 더 배운다. 특히 삐에르 다네스(Pierre Danès)의 헬라어 강의를 들었고, 히브리어 교수 프랑수와 바타브르 (François Vatable)와는 주석이 달린 구약을 출판할 정도로 그는 성서언어인 히브리어와 헬라어에 정통하게 된다. 동시에 그는 1532년에 라틴어로 쓴 첫 저서 “세네카의 관용 주석서” (Commentaire sur de Clementia de Sénèque)를 통해 이미 높은 수준의 라틴어와 희랍철학에 정통했음을 보여주었다.

한편, 칼뱅은 자신보다 앞서 오를레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스트라스부르그에 가서 마르텡 뷔세(Martin Bucer)에게 개혁사상을 습득한 사촌 삐에르 로베르(Pierre Robert), 일명 올리베탕(Olivétan)과 오래 전부터 교제하였다. 알프스 발도파 신도들의 후원을 받아 올리베텡은 작크 르페브르 데타플의 불어성경(1530)을 토대로 최초로 신구약 원본에 기초하여 수정 번역한 불어성경 소위 “올리베텡 성경”(1535)을 출판한다. 칼뱅은 이 기념비적인 성경에 서문을 쓸 정도로 권위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처럼 칼뱅의 성서언어 실력과 인문학, 철학, 법학 등의 다양한 지식은 후에 그가 수많은 주석서를 쓴 성서학자요, 종교개혁을 대표하는 신학자요, 그 당시 최고의 인문학자요, 또 현대 철학의 선구자로서, 하나님께 귀히 쓰임 받을 수 있는 그릇이 되게 만들었다.

두 번째 사건은 1533년 11월 1일 만성절, 칼뱅이 품고 있었던 개혁 사상이 그 당시 친구이자 인문주의자요 파리대학 학장인 니꼴라 꼽(Nicolas Cop)의 개학식 연설문을 통해 표현된 사건이다. 칼뱅이 콥 학장을 위해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연설문은 일종의 산상보훈과 같은 형식으로, 에라스무스, 루터의 사상이 내포되어 있고, 개혁의 중심 사상인 <이신칭의> 등이 담겨있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이 연설문을 통해 칼뱅은 공개적으로 자신이 개혁사상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표현했다는 점이다. 그 당시 전쟁으로 왕이 부재한 틈을 노려, 소르본과 파리국회는 꼽 학장과 그 추종세력에 대한 즉각적인 핍박을 하게 된다. 꼽은 외국으로 피신했고, 칼뱅 역시, 파리를 탈출한 후 여러 곳을 다니며 은둔생활을 한다.

세 번째 사건은 그로부터 일년이 흐른 1534년 가을, 소위 미사의 종교적 남용을 고발하는 <대자보>가 파리와 왕의 거처인 암부아즈 (Amboise)에 까지 발생한 사건이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왕은 1534년 11월에서 1535년 7월에 이르기까지 개신교에 대한 강력한 처벌로 대처한다. 이 일로 인해 칼뱅은 프랑스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1535년 1월 칼뱅은 스트라스부르그를 가기 위해 먼저 스위스 바젤(Bâle)에서 은신처를 찾게 된다. 그는 이곳에서 각고의 노력을 다하여, <기독교 강요> 라틴어 초판을 1536년 3월에 발행한다. 그는 서문에서 프랑스 왕 프랑수와 1세에게 책을 헌정하며, 진정한 개신교 신앙은 <대자보 사건>을 일으킨 광신적 교도와 다르다고 변증한다. 프로테스탄트는 왕의 권력에 저항하는 자가 아닌, 신앙으로 사는 자임을 변호한다. 칼뱅은 그의 생애에 25회 차례나 <기독교 강요>를 보완 편집하였다. 첫 판은 6장에 불과했지만, 1559년에 완성된 마지막 판은 80장으로 구성된 것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그만큼 <기독교 강요>는 그가 평생을 두고 완성한 기독교 신앙 교육을 위한 대표작이었다.

저항할 수 없는 소명의 길

이처럼 칼뱅은 <기독교 강요>를 통해서 명실공히 종교개혁자의 반열에 올라섰고, 종교개혁을 위해 부름 받은 소명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그가 이 소명의 길을 스스로 선택했다고 속단하기보다는 피할 수 없는 상황 속으로 인도 되었기에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보는 것이 더 올바른 판단이 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의미에서 <급작스러운 회심>(subita conversio)이 아닌, 연속된 일련의 상황이 그로 하여금 점진적으로 확신을 갖게 했고, 결국 인생의 전환을 이루는 회심, 하나님의 소명을 그 상황에서 영접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소명은 단 한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여러 사건을 통해 그에 임했다고 볼 수 있다. 칼뱅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런 말을 남겼다: “나의 한계를 넘어선 이 소명이 가시적으로 있기에 이에 대해 끝까지 저항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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