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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크시론

그 메시지, 시대의 소리에 귀 기우리라

[유크시론 178호]  이창배 발행인

사회적 불가능성에 도전하라 교회여…

오늘날 이 차가운 세대가 냉소를 띄우며 바라보는 교회의 모습에서 우리는 과연 반성할 것이 무엇인가를 명확히 아는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일까?
교회라는 신앙공동체가 어떤 사회적 불가능성을 돌파하고자 보이는 노력조차도 , 그 기미조차도 없이 연못 위에 뜬 부평초처럼 부질없이 겉돌고만 있는 게 아닐지? 그저 손놓고 막연하게 “마라나타”에 기대어 살고 있는 건 아닐지? 이 시대에 들어난 메시지에 귀를 기우려 보자.

이따금 볼 때마다 알 수 없는 전율을 맛 보곤 하는 엔터테인먼트인 복면가왕이란 TV프로가 있다. 그 프로에 등장하는 기상천외한 가면과 의상들이 하나 하나 제작자와 가면을 요청하는 출연자와의 교감에 의한 개성이 들어있고, 함축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이나 그 이름에 까지 해학적인 스토리텔링이 되는 것에서 흥미를 가졌다. 그러나 정말로 이 프로에 매력을 느끼게 된 것은 너무도 단순한 이유에서이다. 출연자들이 부르는 노래에서 때론 진정성을 느끼게 되고, 감정이 이입에 빠져들어 나도 모르게 눈물을 찍어내는 감동을 받기 때문이다.

얼굴을 가면으로 덮었다는 의미가 무얼까? 남들이 나를 알아볼 수 없는데서 오게 되는 자신감이 곧, 자신을 뛰어넘는 능력으로 이어지게 하는 걸까? 그 반대로, 저마다 사람에게는 편견이라는 게 있다. 내가 늘 보고, 듣고, 느꼈던 그 생각의 범주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복면이라는 매개가 그 편견을 속수무책으로 만들어버리는 통쾌함을 준다. 그래도 그 가운데 가장 백미가 되는 것은 실력이다. 오직 실력이라는 가창력으로 승부를 가리게 된다. 노래를 듣는 사람에게 편견없이 오로지 노래에 집중하게 만들어 주고, 그가 들은 노래의 실력을 가려 이긴 자와 진 자를 선택하게 된다. 그래서 더욱 흥미진진한 대결이 매 무대마다 이뤄지는 것이다.

사실 엔터테인먼트 프로를 오랫동안 거의 보지 않았던 필자에게 거기에 출연하는 가수들이거나, 연예인들의 이름과 얼굴은 별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노래도 모르고, 무얼 얼마나 잘하는지 아무런 정보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복면을 썼거나, 안썼거나 별다른 차이를 느낄 수 없지만, 그런데 정작 가면을 쓴 출연자들은 그 순간을 위해, 그 짧은 몇분간의 무대를 위해 혼신의 힘을 쏟는 모습에서 어떤 경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다른 어떤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오로지 그 시간 준비한 노래에 빠져 열창을 토해내는 그 모습에서 나도 모르게 감동에 빠진다. 어느 때 그 세밀한 감정의 터치가 눈물샘을 자극해 준다. 이런 음악적인 매력에 대해서 흠칫 놀라운 생각으로 몸서리를 쳤다. “아~ 이리도 대중가요의 노랫말에 쉽게 빠져들다니~”탄식이 흘렀다.

참 감동이 없는 시대의 설교자

실상 요즘은 참 감동이 없는 시대란 생각이 들지 않던가? 자기 스스로 감동을 받는 것도, 남에게 감동을 자아내도록 동기부여를 하는 것도, 모두 어렵다. 그런 면에서 필자는 설교자이고, 설교자이기에 가지는 고충이 있다. 설교자는 그 듣는 청중들을 대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펼쳐내는 전달자, 곧 메신저이다.

“설교자는 자기의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설교자의 책임은 성도들을 말씀의 세계로 끌어들여 하나님과 대면(對面)하고 하나님의 음성(音聲)을 듣게 하는 것이다. 때론 엄위하신 하나님, 때론 인애(仁愛)하신 아버지, 때론 때리시며 책망하시는 아버지, 때론 애간장이 녹도록 불쌍히 여기시며 위로하고 싸매시는 하나님, 때론 영혼이 저려오는 십자가의 눈물로써, 때론 형언할 수 없는 십자가의 영광으로, 때론 말할 수 없는 성령의 탄식으로, 때론 그리스도의 모든 보화로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우리 영혼은 오열하며 깨지고 다시 세우심을 받아 삼위 하나님께 영광(榮光)의 찬송(讚頌)을 드리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할 수 있는 인간(人間)의 언어 (言語)는 존재하지 않는다.”(설교자는 누구인가/한국설교연구원)

그렇다. 설교는 결코 엔터테인먼트가 될 수 없다는 구분이 분명하다. 내가 눈물을 흘리며 들었던 대중가요의 감동처럼, 그렇게 내 설교로 대중을 설득시킬 수 있을까? 눈물을 흘리며 열광하고 반응하며, 환호하는 청중들을 기대할 수 있을까? 그렇게 호소력을 가질 수 있을까? 차라리 ‘꿈깨’가 맞다.

예수님은 최고의 설교자이셨다. 하지만 그분의 하늘나라에 관한 진리의 말씀보다 군중들의 관심은 신비하고 초자연적인 기적과 병 고침과 오병이어를 비롯한 표적에 더욱 구미를 당겼다(요 6:26-30). 훨씬 쉬운 감각, 충동에 반응했다. 이런 현상은 오늘날 경우에도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청중들은 심각하고 복잡한 것을 싫어하고 사색하기보다는 느끼는 것을 훨씬 선호하는 데 이런 경향을 박노해 시인이 짧은 노랫말로 잘 묘사했다.

“말로 설명해 봐, 잊어버릴 테니 Tell me, I will forget/ 눈앞에 보여줘 봐, 기억할지도 몰라 Show me, I may remember/ 날 감동시켜 봐, 이해하게 될 거야 Involve me, I will understand”

날 감동시켜 봐, 이해하게 될거야

오늘 우리가 서있는 시대적 현주소를 안다는 것은 자동차의 네비게이션에 목적지의 주소를 입력시키는 것만큼 중요하다. 이번 파리에서 가진 한디포 포럼에서 필자는 유럽 상황을 발제했는데, “A.D.1-3세기 동안에 그리스도 인들은 이방인들과 종종 적대적인 로마 제국 안에 살면서 자신들을 이방인 거류민(paroikoi)으로써 자신들이 동일한 문화에 속한 다른 사람들과는 달라야 한다는 것을 알았고, 구별된 사람들로 살아가도록 양육하는 목회적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는 내용을 소개했다.

이렇게 형성된 초대교회공동체는 로마제국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매력적인 표지(sign)가 됐는데, 그 이유는 바로 “고대세계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 남자와 여자, 노예와 자유인,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사이에 세워진 장애물들을 무너뜨린 이른바, “사회적 불가능성(Sociological impossiblity)” 을 돌파한 것이다. 이는 당시 사회구조 속에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었던 일들이 복음으로 형성된 새로운 공동체 안에서 가능하게 된 일”로부터 시작됐다. 이러한 서기 1-3세기의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오늘날 교회가 할 수 있다면 벤치마킹이라도 해야 할 것이다. 그 주요 골자는  “사회적 불가능성을 돌파한 것” 에 있다.

오늘날 이 차가운 세대가 냉소를 띄우며 바라보는 교회의 모습에서 우리는 과연 반성할 것이 무엇인가를 명확히 아는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일까?
교회라는 신앙공동체가 어떤 사회적 불가능성을 돌파하고자 보이는 노력조차도 , 그 기미조차도 없이 연못 위에 뜬 부평초처럼 부질없이 겉돌고만 있는 게 아닐지? 그저 손놓고 막연하게 “마라나타”에 기대어 살고 있는 건 아닐지? 이 시대에 들어난 메시지에 귀를 기우려 보자.

이달의 말씀 | 벧전 2:11-12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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