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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행

칭의 없이 성화를 이루려한 루터

[루터&종교개혁] 김현배 목사/ 베를린 비전교회/ 3회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3)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의 문을 두드리다
1505년 7월 2일, 천둥 번개를 동반한 우뢰 사건은 루터 인생의 극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슈토테른하임에서 수도사가 되겠다고 서원했다. 2주 후 7월 17일,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 (Augustinerkloster)의 문을 두드렸다. 이 수도원은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신학자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라고도 불리우는 성 어거스틴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당시 에르푸르트에는 약 2000 여개의 많은 수도원이 있었다.

그 중에서 루터가 입문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은 규율이 엄격하고 학구적이며 개혁의식이 일어나고 있던 곳이었다. 또한 어느 수도원보다도 더 엄격한 계율과 철저한 수도 생활을 요구했다. 이러한 수도원에서 루터는 허름한 의복과 소량의 식사, 기도와 명상, 예배, 찬양, 미사, 고해성사, 매일의 의무, 음식을 조달하는 방법, 낮 시간의 노동 등에 관한 규칙들을 모두 감수할 것을 서약했다. 기독교 경건의 가장 고상한 형태인 수도원 생활에서 루터는 구원을 얻기 위해 수도사가 되어야 한다는 교회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그의 수도원 서약은 제2의 세례이자 새로운 출발이었다. 그는 법학에서 신학으로 완전히 기울어졌다.
루터는 수도원 생활을 상세히 규정해 놓은 원칙을 정확히 가슴에 새겼다. 수도원 원장이 그의 뺨 위에 입 맞추는 의식을 끝으로 1년간의 수습 수도사 생활이 시작되었다. 루터는 수도원 입교를 축하하는 행사에서 머리 중앙부를 삭발했고, 검은색의 수도원 복장을 착용했다. 수많은 수도원 규칙들을 기억하면서 새벽 일찍 일어난 루터는 종일 기도와 시편 묵상, 성가, 독서, 미사, 하루 7번의 기도회 등을 마치고 밤늦게 취침에 들어갔다. 특별히 루터는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통해 자신의 죄를 뉘우쳤다.
루터는 철저한 신앙 교육을 시키는 수도원에서 신앙의 기초를 다지게 되었다. 그는 교육을 잘 받아 나갔고, 성경을 읽었고, 기도문도 열심히 암송했다. 루터는 자기 몸에서 귀신들을 축출하려는 소망으로 금식도 하고, 스스로를 채찍질하기도 하며, 불을 지피지 않은 방의 추위도 잘 견뎌 냈다. 그는 매일 정절, 청빈, 순종, 금식, 철야, 그리고 금욕적 극기까지도 하면서 인간 스스로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 갖은 노력과 애를 썼다. 자신의 몸이 망가져가고 있었지만 루터는 그것이 자신의 선행이 쌓여가는 증거인 것처럼 생각했다.
만약에 수도사 훈련으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한다면 루터는 틀림없이 천국에 갈 정도로 엄격한 수련을 쌓았다. 당시 루터는 얼마나 수행에 열심이었는지 만성 위장병에 걸렸다고 한다. 그는 여러 수도사들 중 가장 열심 있는 수도사였다. 이처럼 루터는 자신이 구원 받는 데 있어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떠한 고행이라도 실천했다. 루터가 그처럼 몸부림치며 자신의 죄를 보상해 보려고 했지만, 그는 이 모든 수고로 인해 마음의 평안을 얻을 리가 없었다. 날이 갈수록 그는 인간의 구원문제에 대해 심한 갈등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루터는 수도원의 엄격한 계율 속에서 기도와 찬송, 말씀묵상, 그리고 검소한 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에 대한 확신을 얻고자 했다.
그러나 루터의 영혼에 대한 고뇌는 수도원에서도 해결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몸부림은 더욱 심했다. 그는 불의했고 거룩하신 하나님은 의를 요구하셨다. 그동안의 충분한 공로와 충분히 쌓은 의로운 행위로도 하나님의 의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루터의 문제는 양의 문제가 아니라 질의 문제였다. 그는 훗날에 깨닫게 되지만 당시에는 오랜 시간 동안 계속해서 성경에 없는 가르침과 관행을 겹겹이 쌓아 올리며 복음이라는 교회의 참된 보화를 은폐하고 있었다. 이러한 생활 속에서 그는 1505년부터 1511년까지 수도사로 머무르면서 수도사의 과정을 마쳤다. 이곳은 루터가 수도사로 머무른 것으로 유명하지만 젊은 루터로 하여금 신앙에 대해 매우 고뇌하게 했던 현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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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영적 스승 “요한 폰 슈타우피츠”

1506년 4월 3일, 수도원에 들어온 지 9개월이 지난 후 루터는 요한 폰 슈타우피츠 (Johann Von Staupitz, 약 1468-1524) 원장과 만남이 이루어졌다. 슈타우피츠는 32세에 튀링겐에서 수도원장이 되었다. 33세부터 성경신학 교수로서 강의를 하면서 1500년에 신학박사가 되었으며, 중세 수도회의 최고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루터는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슈타우피츠에게 자신의 크고 작은 죄를 모조리 고했다. 슈타우피츠는 일일이 열거하고 고백하고 사죄를 받을 수 있는 죄보다도 더 근본적으로 잘못된 인간의 타락한 성품이 있음을 알려 주었다. 슈타우피츠는 루터의 관심을 개인적인 죄에서 인간의 본성으로 돌려놓는데 큰 도움을 주었고 죄에 대한 고민의 문제를 말씀을 통해서 찾기를 권고하기도 했다.
그 후 슈타우피츠는 루터에게 성경 연구에 매진하도록 인도하였다. 특히 루터가 그리스 원어로 공부할 수 있게 도와주면서 성경의 원전으로 씨름하게 하였다. 그리고 에르푸르트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도록 권유했다. 결국 루터에게 정식으로 높은 수준의 신학수업이 시작된 것이다. 루터는 이 수도원 생활을 하면서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을 접하게 되었다. 후일 루터 신학의 핵심이 되는 하나님의 은총론과 성도들의 믿음을 강조하는 신학은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의 영향을 반영하는 것이다.
슈타우피츠는 고뇌하는 수도사 루터의 신앙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준 인물이다. 그는 절망의 구덩이에서 나오도록 이끈 영적 아버지요 위대한 스승이며, 사랑으로 길을 인도해 준 영적 멘토 이기도 했다. 위대한 지도자 여호수아에게는 갈렙이 있었고, 위대한 전도자 바울에게는 바나바가 있었고, 위대한 루터에게는 자신의 영적 스승인 요한 폰 슈타우피츠가 있었다.

법학도 루터가 신부가 되다  

수도사 과정을 마친 루터는 드디어 사제가 되었다. 에르푸르트 돔이라 불리어지는 성 마리엔 돔(Marien Dom)은 1278년부터 1400년까지 120여년에 걸쳐 지어졌다. 이 대성당은 에르푸르트의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있는 뾰쪽한 첨탑을 자랑하는 독일 고딕 양식의 걸작품으로 에르푸르트의 랜드마크다. 건물 전면에 있는 70 계단을 올라가면 대성당이 나온다. 성당 내부는 숨이 막히도록 화려하고 아름다운 고딕양식의 제단이 보인다.
이곳 대성당에서 루터는 1507년 2월 27일 부제로, 그해 4월 4일 가톨릭 신부로 서품을 받았다. 신부가 된 사람은 이제 성만찬을 집전 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미사의 신비가 신부 루터를 경외심으로 가득 차게 만들었다. 사제 서품을 받은 후 5월 2일에 어거스틴 수도회 소속 교회에서 첫 미사를 집전하였다. 그는 교회 제단 앞으로 나아갔다. 한 신부의 인생에서 가장 축복받은 순간이었다. 그러나 루터는 미사를 집전하면서 포도주 잔도 쏟았다. 그는 거룩하시고 높으신 하나님께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죄인이 감히 입을 열어 말을 한다는 사실에 겁이 났다. 루터는 괴로웠고 공포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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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평정을 찾지 못하는 신부 루터

사제 서품을 받고 신부로서 미사를 집전했다. 하지만 루터는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없었으며 그토록 갈망했던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했다. 루터는 인간의 행위로는 절대 의를 이룰 수 없다는 사실과 오직 그리스도의 의로우심만이 구원을 가져올 수 있음을 몰랐다. 또한 인간이 행한 최상의 선행조차도 하나님 앞에서는 냄새나는 쓰레기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16세기 루터의 치명적인 영적 문제는 계속 칭의와 성화를 혼돈하면서 칭의 없이 성화를 이루려고 애를 썼던 것이다.
18세기 존 웨슬리 역시 그가 회심 전에는 칭의와 성화의 개념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신앙의 오류를 범하기도 했다. 루터는 인간의 구원은 어떤 공로로 이루어지는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를 깨닫지 못하는데 있다. 루터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하심이 절실히 필요했다.

장래 종교개혁자로서 여러 고뇌의 과정을 거치는 루터

젊은 루터가 가장 혹독한 훈련을 받은 도시는 수도원으로 가득한 에르푸르트이다. 이곳에서 루터는 장래 종교개혁자로서 다듬어지기 위해 여러 과정을 거치게 된다. 수도원에서의 엄격한 생활은 22세 루터로 하여금 신앙에 대해 매우 고뇌하게 했던 현장이다. 다행히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영적 스승 요한 폰 슈타우피츠와 만남을 통해서 신학에 눈을 뜨게 되었다. 루터가 수도원에 들어간 지 2년 뒤, 그의 나이 24세 되었을 때 에르푸르트 대성당에서 신부로 서품을 받게 된 일은 파격적이었다. 또한 신부로서 에르푸르트 대학에서 신학박사 수업을 받을 수 있게 된 일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였다.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 장래 종교개혁자 루터는 준비되어 갔다. 루터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이 놀라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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