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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16세기 종교개혁을 위해 선택된 칼뱅 (2)

[프랑스포커싱]  채희석 목사/ 파리 모두 제자교회/ 17회

새로운 사역지 <스위스> : 역사적 배경과 의미

1533년 니꼴라 꼽 파리대학 학장의 연설문에 연루되어 루터 사상을 방조한 혐의로 은둔 생활을 하던 칼뱅은, 1534년 “벽보 사건”으로 프랑스를 떠날 수 밖에 없게 된다. 그 다음 해의 단 한번 여행을 제외하고선, 더 이상 프랑스로 돌아 올 수가 없는 상황 속에 처한다. 칼뱅은 자신의 학문을 위해 스트라스부르그로 가고자 했으나, 전쟁으로 인해 1534년 말에 잠시 스위스 바젤로 피신하게 된다.

프랑스에서의 종교개혁은 초기부터 천주교와 정치권에 의해 많은 제한과 핍박을 받으면서, 소르본의 집요한 억압과 파리의회의 반대로 <르페브르 데타플식의 초기 프랑스 종교개혁>은 1525년부터 한계에 달하게 된다. 루터 개혁사상도 마찬가지로 어려움에 봉착한다. 1519년부터 루터 사상이 들어오지만 1521년 소르본에서 정죄받고 이단으로 취급되고 만다.

특히 1534년 일부 극단주의 개혁자 (Antoine Marcourt)에 의해 무분별하게 추진된 교황의 권력남용과 미사를 반대하는 소위 <벽보사건>(affaire des placards)으로 인해 프랑스 왕권이 개혁세력에 등을 돌리는 심각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이것은 프랑스 종교개혁의 한계일 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개신교인은 죽을 수 밖에 없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몰릴 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

이런 위기의 상황에, 예상치 못하게 제 삼의 개혁의 길이 열리게 된다. 그것은 프랑스나 독일이 아닌 다른 국가 <스위스>이다. 이곳에서 감추어진 놀라운 종교개혁의 열풍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칼뱅은 조국 프랑스에서 죽음의 위협을 받았기에 거의 대부분의 삶을 도망자 신분으로 스위스에 살면서 종교개혁에 전념하게 된다. 그의 소명은 프랑스에 국한되지 않고, 스위스 제네바에서 오히려 역경 속에서도 꽃을 피우게 된다. 칼뱅은 그 곳에서 전무한 완전한 종교개혁을 이루면서, 새로운 기독교 문명을 창시하게 된다. 칼뱅이 스위스에서 소명을 감당하도록 만들어준 3가지 초기 환경 요인은 다음과 같다.

– <스위스 종교개혁의 아버지> 츠빙글리의 개혁 시작(1523년)과 요절 (1531년),
– 영적 특공대와 같이 열정을 가진 프랑스 개혁자 화렐의 전초 작업 (1523년 이후),
– 제네바 시가 때마침 공식적으로 개혁사상을 채택 (1536년).
이런 배경에서 프랑스 개혁자 칼뱅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새로운 종교개혁의 길을 스위스에서 걷게 된다.

츠빙글리에 의한 취리히 종교 개혁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면죄부 남용을 핵심 주제로 95개조 반박문을 신학적 논쟁을 위해 발표한 후, 곧바로 유럽 전역에서 천주교회와 교황의 권력 남용에 이의를 제기하는 루터 사상이 종교개혁의 불씨로 퍼지게 된다. 95개 반박문 중 41개 항목이 로마교황으로부터 정죄를 받았고(1520), 곧 이어(1521) 루터 자신도 출교를 당했지만, 개혁사상 확산 추세를 막을 수 없었다.

이런 시기에, 스위스 취리히(Zurich)에서는 울리히 츠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의 주도로 루터의 종교개혁과 유사한 개혁이 1522년에 채택된다. 그는 사제로서 취리히, 글라루스, 아인지델른 교구 설교자이기도 했지만 에라스무스와 같은 인문주의자들과 교제하면서, 성서로 돌아가자는 개혁사상에 참여하게 된다. 츠빙글리는 <스위스 종교개혁의 아버지>로서, 루터와 같이 종교개혁의 선두 주자로 인정 받는다.

그는 1522년 취리히에 종교개혁을 일으킬 때, 루터와 유사하게, 천주교에 저항하며, 동시에 유아세례를 비판하는 재세례파에 대해서도 저항한다. 그는 루터와 함께 <마르부르크 회담> (colloque de Marbourg)에 참석하여 다양한 형태의 개혁운동 연합내지 통일성을 추구한다. 그는 루터와 모든 면에서 일치하였지만, 단 한 가지 다른 입장을 취했다면, 그것은 <성만찬>에 관한 것이다.

루터는 기본적으로 천주교의 화체설(transubstantiation)과 흡사한 공재설(consubstantiation: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성찬떡과 포도주와 실제적으로 공재한다)을 취했다. 하지만 츠빙글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이것이 나의 몸이다”하는 말을 상징적인 표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성찬식에 참여하는 자의 마음 속에 거하는 것이지 또 다른 희생제물이 되어 실제 성찬떡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찬은 다만 예수님의 죽음을 상징하고 기념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이 주장은 후에 칼뱅의 상징주의(symbolism)로 연결된다.

츠빙글리는 천주교의 사제 독신주의를 부인하고 결혼을 하였고, 1525년엔 미사를 폐지한다. 그는 구원에 이르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무익하나, 하나님의 은혜로는 가능함을 찬양한다. 더 나아가 일상 생활 속에서 복음의 메시지가 표현되는 것이 중요함을 루터보다도 더 많이 강조하였다. 그가 추진하는 개혁운동은 스위스 여러 도시에 영향을 미쳤고, 특히 베른(Berne, 1528)과 바젤(Bâle, 1529)에서 확대되었다. 하지만 그는 불과 나이 47세에 (1531년) 스위스 개신교 자치주와 천주교와 결탁한 산림 자치주와의 카펠(Kappel)전투에서 사망한다. 결과적으로, 그의 종교개혁 추진은 중도에 미완성으로 막을 내린다. 그의 신학적인 영감과 종교개혁을 위한 사역은 결국 젊은 프랑스 개혁자 칼뱅에 의해서 이어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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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렐에 의한 여러 도시에서 종교개혁

귀이욤 화렐(Guillaume Farel, 1489-1565)은 칼뱅보다 앞서 스위스 종교개혁에 헌신한 대표적인 프랑스 신학자이다. 파리 소르본에서 신학 공부를 했지만, 루터 사상에 영향을 받은 복음주의자와 교제하게 된다. 그 후 16세기 프랑스 종교개혁의 전신 역할을 한 모(Meaux)그룹 회원이 되어, 브리소네 주교와 르페브르 데타플과 더불어 성서 연구와 천주교 내에서 개혁에 가담했다. 그는 매우 활동적이었고 정열적인 설교로 두각이 나타나곤 했다. 하지만 그는 천주교 내부에서의 개혁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천주교회와 결별하고, 1523년 스위스 바젤로 떠난다. 사실 그의 급진적인 개혁 성향은 츠빙글리의 것과 더욱 부합되었다.

하지만 그는 바젤에 오랫동안 머물지 못했다. 1524년 에라스무스 정쟁으로 인해 바젤에서 쫓겨난 후 몽벨리아 (Montbeliard, 16세기 당시, 독일 신성로마제국의 통치 하에 있었던 도시공화국처럼 개신교 종교개혁을 받아들인 도시) 영주의 초청을 받아 목회를 한다. 그는 자신의 교구 교회에서 불어로 설교를 하였다. 이 도시는 영주(Ulric de Wurtemberg)의 신앙에 따라 루터교를 신봉하고 있었고, 화렐은 이곳에서 복음을 전하며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는 그곳에서 손에 간편하게 들고 다닐 수 있는 소책자를 출간한다. 이는 <주기도문>, <사도신경> <십계명> 등을 불어로 번역한 것이며, 신앙을 지키고 개인적인 명상을 할 수 있도록 예배를 위해 편집된 책이다. 이 작은 책자에 개혁신앙의 본질, 성경의 기본적인 가르침인 오직 믿음 그리고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 예정론 등이 함축되어 있었다. 또 이 책은 어떤 의미에선 불어로 된 최초의 개혁신앙 가이드 책이기도 하다. 그는 자기 생애에 8권의 신학 교리에 관한 책을 저술한다.

그 후 (1527년) 화렐은 스트라스부르그(Strasbourg)에서 부처(Martin Bucer)와 같은 개혁자들과 교제를 하다가, 1528년엔 스위스 베른(Berne) 도시 불어 관할구 시민을 개혁주의 이름으로 얻게 된다. 뒤이어 불어권인 바젤(Bâle)도 결국 1529년에 개혁사상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 밖에도 에글르(Aigle), 느샤텔(Neuchâtel), 모라(Morat), 그랑송(Grandson), 오르베(Orbe) 등 스위스 불어권 (Suisse romande)에서 개혁주의가 전파될 수 있었던 주된 원인은 1526년 이후 특공대원처럼 열성적으로 복음과 개혁사상을 전파한 화렐의 공로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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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912-calbin개혁사상을 받아들인 제네바

반면 제네바는 다른 도시국가에 비해 가장 뒤늦게 개혁사상을 받아들인 도시 공화국이다. 1525년경 타지에서 온 일부 독일 상인들에 의해 개혁사상이 처음으로 전달이 된다. 1533년에 이르러선 제네바의 대다수의 중산층이 개혁사상에 대해 우호적으로 돌아서는데, 이는 베른 시민이면서 동시에 제네바 시민권을 가진 자(combourgeois)들로부터 지지를 받은 프랑스 개혁자 화렐의 설교와 활동이 작용한 것이다. 하지만 제네바가 개혁사상을 공식적으로 수용한 것은 칼뱅의 영향을 받은 후인 1536년이 되어서야 이루어진다. 여기에는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다. 제네바는 천주교 세력을 배척하고자 했는데, 그 이유는 적대 관계에 있었던 인접 지방국가 사브아(la Savoie)가 천주교를 신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사브아는 론강과 알프스 산맥 사이에 있는 지방국가로, 레망 호수 남부에서 현재 남불에 위치한 도핀 지방국가의 북부에 걸쳐 있었다).

1536년 5월 21일 제네바 시민이 종교개혁을 확정적으로 채택한 후 기대했던 것은 종교개혁 자체뿐만이 아니라 정치 혁명에 있었다. 그 당시 제네바는 신성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아온 한 공국(principauté)으로서, 제네바를 통치하였던 시장(prince-évêque, Pierre de la Baume)을 축출하길 원했다. 그 이유는 그가 천주교 사브아 가문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제네바 시민은 1536년 초 개혁교 도시 베른과 협력하여 결국 사브아 세력을 축출함으로써, 제네바는 독립적인 도시 공화국이 되었다. 그 당시 제네바의 인구는 만여 명에 불과했다. 인접 도시인 프랑스의 리용과 경제 면에서 경쟁관계에 있었지만, 제네바는 스위스의 핵심 도시국가로서 전략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다. 바로 이 도시에서 칼뱅의 종교개혁 사역이 시작되게 된다.

칼뱅과 제네바와의 첫 만남

1533년 니꼴라 꼽 파리대학 학장의 연설문에 연루되어 루터 사상을 방조한 혐의로 은둔 생활을 하던 칼뱅은, 1534년 “벽보 사건”으로 프랑스를 떠날 수 밖에 없게 된다. 그 다음 해의 단 한번 여행을 제외하고선, 더 이상 프랑스로 돌아 올 수가 없는 상황 속에 처한다. 칼뱅은 자신의 학문을 위해 스트라스부르그로 가고자 했으나, 전쟁으로 인해 1534년 말에 잠시 스위스 바젤로 피신하게 된다. 그곳에서 프랑스 개혁교인들을 핍박하는 권력자들의 비난에 응답하고자 <기독교 강요>를 라틴어로 집필하기 시작한다. 1535년엔 사촌 올리베탕(Olivétan)이 불어로 번역한 성경에서 신약의 서문을 쓴다. 성경 원어에서 번역된 첫 불어성경이 느샤텔(Neuchâtel)에서 출판되었는데, 이는 이미 1530년 11월 화렐에 의해 느샤텔 주민들이 개혁주의에 호응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1536년 3월 드디어 <기독교 강요>(Institution religionis christianae) 라틴어 초판이 바젤에서 출간된다. 작은 소책자로 출판된 이 책은 개신교를 이해할 수 있는 대표적인 참고서적이 되어 출판된 지 9개월만이 매진될 정도로 인기가 있었고, 개혁자로서의 칼뱅의 인지도가 올라가게 된다. 그 당시 스위스, 프랑스 지성인 사이에선 오직 그의 책만이 화자에 오르곤 했다. 이 작은 포켓북에서 젊은 칼뱅은 개혁사상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성경에 기초하여, 무엇이 진정한 신앙인지, 진정한 예배인지, 진정한 경건인지를 명료하게 그리고 확신 차게 가르치고 있었다. 이로서 그는 종교개혁의 한 스승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서재에 묻혀서 연구하는 자였기에, 지속적인 신학 공부를 위해 스트라스부르그로 가고자 한다. 때마침 제네바는 개혁주의 입장을 1536년 5월 21일 채택한다. 하지만 모든 것이 준비가 되지 못한 상태였다. 특히 새로운 개혁 백성을 가르칠 성경학자이자 영적 지도자가 필요했다.

같은 해 7월 칼뱅은 사정 상 제네바를 경유하여 스트라스부르그로 가고자 했다. 제네바에 칼뱅이 도착한 사실을 안 화렐은 개혁을 위해 강권적으로 그를 붙잡고 제네바 <성경 교수> (lecteur en la Sainte Ecriture)로 남게 만든다. 그는 젊은 지성인이자 개혁자인 칼뱅에게서 제네바 종교개혁을 위해 예비된 천재적 자질을 발견한 것이다. 후에 칼뱅은 화렐의 강요는 “조언이나 권면이 아니라 신의 이름에 의한 강렬한 기원 같아서, 마치 하나님이 나의 길을 정지시키기 위해 위로부터 손을 내미시는 것 같았다”라고 회상한다. 여기에 다시 한번 하나님의 소명이 칼뱅에게 임한 것이다. 하지만 불과 2개월 전에 개혁주의가 제네바에 채택된 지라,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해야만 했다. “누군가가 설교는 하지만, 그게 다였다, 우상을 찾아 불에 태웠지만, 진정한 개혁은 아직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모든 것이 소동 속에 있었다” 라고 칼뱅은 28년 후 임종을 맞이하면서, 목사들에게 고별사를 전하면서 상기한다.

결론적으로, 스위스 종교개혁은 독일보다 늦게 시작이 되었지만, 정치적으론 보다 독립적(independent)이었고, 신학적으론 보다 급진적 (radical)인 종교개혁을 달성하게 된다. 여기에는 스위스 종개혁의 아버지 츠빙글리를 위시하여, 열정적 개혁자 화렐, 그리고<기독교 강요> 책 속에 개혁신앙을 밝히고 그 신앙을 실천한 칼뱅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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