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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

에드워드 6세, 메리 1세, 엘리자베스 1세

[유럽에서 보는 유럽이야기]  김학우 목사/ 마드리드 사랑의 교회 담임/ 66회

튜더왕조, 바다 건너 약소국 영국을 일으키는 역할 담당

영국의 튜더 왕가(House of Tudor, 1485-1603)는 헨리 7세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실질적인 인물은 무려 여섯 아내를 갈아치운 헨리 8세가 그 중심에 서 있다. 헨리 8세는 1547년 세상과 하직하면서 유언으로 빼어난 지성을 자랑하는 세 자녀에게 왕위 계승권을 남겨 주었다. 해묵은 원한과 살육 가운데서 거짓말 같이 헨리 8세의 유언과 같이 세 사람은 차례대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영국교회를 개혁한 요시야, 에드워드 6세

1547년 1월 28일, 헨리 8세는 38년의 왕위를 끝내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여섯 아내와 결혼 했고 그 중 두 명을 단두대로 보냈으며, 영국 국교회를 창설해서 스스로 수장이 되었다. 헨리 8세는 사망하기 전에 에드워드 6세(Edward VI, 1537-1553, 재위 1547-1553)를 왕위 계승 제 1 순위로 정했으며, 다음으로 장녀인 메리, 차녀인 엘리자베스 순으로 확정했다. 아울러 에드워드가 성인이 될 때까지 섭정 위원회가 정사를 돌보도록 칙령을 내렸다. 에드워드는 헨리 8세와 세 번째 부인, 제인 시모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유일한 아들로 10살 때 왕위에 올라 6년 간 재임했다. 실제로 에드워드는 그의 외삼촌인 서머싯 공작 에드워드 시모어의 섭정을 받았다. 그는 짧은 통치 기간 동안 교회개혁에 힘썼다. 이런 이유로 그를 “어린 요시야(Josiah)”라고 불렀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개혁을 주도한 인물은 왕실을 관장하는 켄터버리 대주교였던 토마스 클랜머였다.
1549년 에드워드는 42(39개)개 교리를 제정하여 영국교회의 질서를 확립하였다. 대표적으로 “성직 수임규칙(Ordinal)”을 들 수 있다. 목사의 임무가 “회중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성례를 집행하는 자”로 정의되었다. 즉 목사는 제사를 집례 하는 사제(Priest)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이며, 성례를 집행하는 자로 규정하였다. 이것은 로마교회 사제주의로부터의 신학적인 개혁이었다. 다음으로 “공동 기도서”의 재정이다. 1552년 개정된 “제 2기도서”는 개신교의 성격을 반영한 것으로, 예를 들어 “미사”라는 단어가 삭제되고, 죽은 자를 위한 기도가 폐지되었다. “제단”이란 명칭을 “성찬대”로, “신부(Priest)”라는 용어 대신 “성직자, 목사 (Minister)”로 변경하였다. 그리고 신앙고백서의 작성이다. 이 신앙고백서는 개신교적인 성격을 명확하게 잘 보여주는 것으로, 클랜머와 존 녹스, 마르틴 부서 등과 같은 개혁자들의 도움으로 작성되었다. 이 고백서는 로마교회의 주된 교리인 성자숭배, 면죄부, 화체설, 연옥과 같은 교리에 대하여는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것으로 규정했다. 스코틀랜드 개혁자 존 녹스는 “에드워드는 영국을 통치한 역대 군왕들 가운데서 최고로 독실하고 덕성스런 왕이었다.”라고 평가했다.

영국교회를 피로 물들인, 메리 1세

헨리 8세(Henry VIII, 1491-1547, 재위 1509-1547)는 튜더 왕가의 시조인, 아버지 헨리 7세(Henry 7, 1457-1509, 재위 1485-1509)의 차남임에도 불구하고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것은 헨리 8세의 형인 아서가 에스파냐 아라곤 왕의 공주, 카타리나(캐서린)를 신부로 데려와 결혼한 지 6개월 만에 요절하였기 때문이다. 헨리 8세는 왕이 된 바로 그 해에 과부가 된 형수, 카타리나를 제 사람으로 만들었다. 애석하게도 카타리나는 헨리가 최고로 갈망하는 한 가지를 줄 수 없었으니, 그것이 바로 사내아이였다. 카타리나는 여섯 명의 자녀를 낳았지만, 유일한 생존자는 메리 공주뿐이었다. 메리 1세(Mary 1, 1516-1558, 재위 1553-1558)는 에드워드 6세가 세상을 떠난 후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메리는 왕위에 오르기까지는 수많은 역경과 수모를 견뎌야 했다. 메리는 둘째 왕비, 앤 불린에 의해서 공주로서의 자격 박탈은 물론 왕위 계승권까지 빼앗겼고, 심지어 이복 여동생인 엘리자베스의 시녀로 일하는 등 굴욕적인 대우를 받기도 했다. 훗날 헨리 8세의 여섯 번째 왕비인 캐서린 파에 의해 간신히 공주의 신분이 복권되었다.
메리는 자신의 아버지가 어머니를 강제로 이혼시킴으로 자신이 법적인 사생아가 된 것에 대하여 분노와 원한을 갖기에 충분했다. 메리가 왕권을 잡은 후 종교개혁을 일으켜 영국 국교회를 세웠던 아버지와는 달리 어머니의 나라, 스페인의 혈통답게 로마교회를 신봉했다. 따라서 영국을 로마교회의 품으로 되돌려 주는 것이 그녀의 목표였다. 1554년, 의회는 헨리 8세와 에드워드의 종교개혁을 무효화하고 과거로 돌아가기로 결의했다. 반면 영국교회를 개신교 쪽으로 개혁을 주도한 토머스 클랜머를 비롯 워체스터, 리들리 같은 고위 성직자 등 약 300명(284명)을 처형하였다. 이런 이유로, 영국인들은 그녀를 “피의 메리(Bloody Mary”라고 부르고 있다. “여자가 원한을 품으면 오 유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라는 말이 영국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산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라고 했던가? 메리가 세상을 떠난 지 며칠도 되지 않아 메리 여왕이 5년 동안 추진하고 합법화 했던 정책들은 가혹한 비난에 직면했다. 왕국의 주인을 추도하는 분위기는 찾을 수가 없었고, “메리”라고 하는 그의 이름은 공포내지 혐오감으로 기억되었다. 대신 메리 집권기에 박해를 받은 이들은 일약 순교자의 반열에 올랐다. 존 폭스의 저서인 “교회법과 유적들(Acts and Monuments of the Church)”이란 책은 “폭스의 순교자 열전”으로 알려져 대중적인 인기를 모았다. 폭스는 메리 여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파했다. “이 땅이나 다른 어느 땅에서도 메리 여왕의 통치기 만큼 신의 분노가 여러 증거로 드러난 적이 없으리라. 젊은 나이에 요절한 것이나 불운한 사건(아이를 낮지 못한 것)이 그 증거이다.” 메리는 로마교회의 수호국인 스페인의 왕 펠리페 2세와 결혼했지만 후사를 남기지 못했다.

영국교회의 갈등을 매듭지은, 엘리자베스 1세

헨리 8세는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카타리나와의 이혼과 그녀의 시녀인 앤 불린과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자, 그는 영국교회가 로마 교황청에서 분리를 선언하고 “나는 영국 왕인 동시에 영국교회의 수장이다.”라고 선언한 것이 오늘의 영국 성공회의 시작이 됐다.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1 1533-1603, 제위 1558-1603) 헨리 8세와 둘째 부인 앤 불린 사이에서 태어났다. 엘리자베스는 모후가 처형당한 후 이복 언니 메리가 왕이 된 치세에 왕위 계승권을 잃는 등, 끊임없는 견제를 받았지만 그 시련들을 잘 극복했다. 1558년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왕으로 지명됐다는 통보를 받는 순간 무릎을 꿇고 라틴어로 된 시편 118장 23절을 읽었다.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It is the Lord’s doing, and it is marvellous in our eyes)”
영국은 이전까지 유럽의 바다 건너 약소국에 불과 했지만, 튜더 왕가로 인해 훗날 세계를 석권하고 대영제국으로 전환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튜더 왕가보다 종교와 권력투쟁으로 소용돌이 친 왕가도 드물 것이다. 헨리 8세는 로마교에서 성공회로, 에드워드는 개신교로, 그리고 메리 때는 또 다시 로마교회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러다가 엘리자베스 때는 로마교와 개신교 중간인 성공회의 성격을 취했다. 엘리자베스는 결혼을 했으나 자녀를 얻지 못하므로 스코틀랜드 왕을 모시어 영국의 왕으로 삼으라는 유언을 남기고 45년 통치를 마감하고 세상을 떠났다. 당시 스코틀랜드 왕은 제임스 6세로, 영국의 왕이 되면서 제임스 1세(James 1, 1566-1625)로 이름을 바꾸어 영국과 스코틀랜드를 동시에 통치하였다. 이것이 오늘의 웨일즈와 함께 U.K 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2000년 뉴욕타임스는 엘리자베스를 지난 1천 년간 가장 탁월했던 지도자 중 첫 번째로 선정했다. 400년이 지났음에도 엘리자베스가 조명을 받는 것은 사생아에서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가 된 드라마틱한 삶 때문만이 아니다. 그보다 그녀는 가장 심각했던 신구교간의 종교적 갈등을 해소하고, 밖으로 가장 영국을 위협하던 스페인의 함대를 무력화시키므로 파산 직전에 있던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탈바꿈하였기 때문이다. 토마스 칼라일(1795-1881)의 말보다 엘리자베스 1세 시대를 잘 표현한 말도 많지 않아 보인다. “셰익스피어를 인도와 바꾸지 않겠다.”

참고/ 튜더 왕가(House of Tudor) 또는 튜더 왕조(Tudor dynasty)는 잉글랜드 왕국(1485년 – 1603년)과 아일랜드 왕국(1541년 – 1603년)을 다스렸던 다섯 명의 군주들을 배출한 집안을 말한다. 전반적으로 튜더 출신 군주들의 통치 덕분에 그전까지 유럽의 바다 건너 약소국이었던 영국은  특히 문화사 방면에서는 엘리자베스 1세의 치세기간은 특별히 ‘엘리자베스 왕조’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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