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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제자도

[아트저널]  박심원목사/ 예수마을커뮤니티교회 담임/ 14회

제자가 된다는 것은 …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교리적이며 종교적인 의식인 아닌 삶으로 표현되고 증명되어져야 한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스승을 온전하게 닮는 것이다. 걸음이가 닮아야 하고, 말하는 것이 닮아야 하고, 표정 짓는 것이 닮아야 하고, 먹는 것과 생활의 모든 일상이 닮아야 하는 것이다. 이론적인 가르침을 전수 받는 것이라면 제자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현대인들에게 스승과 제자도가 무너졌다. 학교를 다니는 것은 위대한 스승을 만나기 위함이 아니라 학문의 통로가 되는 기술적인 과정을 이수하기 위함일 뿐이다. 스승의 그림자를 밟지 않았던 시대가 있었지만 그것은 잠시 잠간의 역사 속에 발자취를 남겼을 뿐이다. 스승님 앞에 큰 절을 올리고 무릎을 꿇고 가르침과 교훈을 받았으며 심지어는 종아리까지 걷어 올려 매를 맞을 수 있는 스승의 위치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이거나 그 이상의 존경의 대상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스승의 존재가 화려하게 만개했던 꽃이 시들어 버린 것처럼 그 흔적만이 남겨져 있을 뿐이다. 꽃의 목적은 열매로 연결되어야 하는데 스승의 꽃은 제자로 말미암아 그 열매가 맺혀지는 것을 거부하는 시대가 되었다.
한 시대를 호령하는 어진 왕이 있었다. 유일하게 있는 왕손의 손자는 왕의 사랑을 독차지하기에 왕 이상의 권력을 가지게 된다. 모든 사람들이 철없는 왕의 손자 앞에 굽실거렸다. 손자의 생활은 막무가내로 살아가는 왕궁의 악동이 되었다. 왕은 손자의 버릇을 고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손자를 지도하는 선생이 가정 방문을 하신다는 전갈을 받는다. 방문하시는 날 왕은 정중하게 왕궁의 정문까지 달려 나가 왕의 손녀뻘 되는 어린 여선생을 맞으며 허리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손자는 그러한 할아버지 모습이 의아했다. 모든 사람들이 왕 앞에서 허리를 숙이는데 자신이 왕이 자신이 무시했던 선생 앞에 허리를 숙이는 모습이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래서 손자는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왕보다 선생이 더 높아’ 지혜로운 왕은 대답했다. ‘선생은 훌륭한 왕을 키워낼 수 있는 사람이란다. 할아버지는 왕위를 물려줄 순 있어도 훌륭한 왕이 되게 하는 것은 선생의 몫이란다.’ 가르친다 하여 모두가 스승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스승이 된다는 것은 그가 먼저 누군가의 충실한 제자가 되어야 한다. 고리 하나가 다음 고리를 물고, 그 고리는 또 다른 고리를 연결하여 거대한 체인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현대의 사회적 풍토가 스승이 사라진다는 것은 세상의 악함만이 결과는 아닐 것이다. 시대를 품고 이끌어야 할 교회가 거룩한 제자도를 상실한 결과일 것이다. 어렸을 때 난방장치는 오직 아궁이로 땔감을 집어넣었을 때 방구들에서 전해지는 열기였다. 저녁에는 비교적 이불을 차버릴 만큼 따뜻하게 잠을 청하지만 새벽이 되면 구들은 식어 한기를 느끼게 된다. 잠결에 본능적으로 할 수 있는 행동은 이불을 감싸 안는 것뿐이다. 아무리 이불을 온 몸으로 감쌀지라도 차가워진 방구들은 따뜻해질 수 없다. 누군가 아궁이로 나가 다시 땔감을 넣고 불을 지펴야 한다.
성숙하지 못한 자는 결코 살을 에는 겨울 찬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아궁이로 갈 수 없다. 단순하지만 새벽에 불을 지피는 것은 불편하고 고된 일이다.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섬김으로 훈련된 현숙한 어머니뿐이다. 나무를 가져다 불을 지피는 소리를 듣는 순간 아직 온기가 전해지지 않을지라도 심리적 안정으로 추위를 이겨내게 된다. 내가 느끼는 제자도는 바로 스스로 자신을 움직여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자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온전하게 주시기 위함이다. 주님이 거룩한 불을 지펴주셨고 우리는 잠시 그 불로 안일함 속에서 행복해 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교회는 그 빛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부어주시는 영광을 즐겼다. 아궁이의 불은 식기 시작했다. 교회는 세상을 이끌어 가고 세상을 책임져 가야 했던 자리에서 벗어나 이제 세상이 교회를 향해 돌을 던지고 교회를 걱정하는 시대가 되었다. 누구도 다시 아궁이로 달려가 거룩한 불을 지피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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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가 된다는 것은 기독교 교리를 화려한 교수법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주님의 제자로서 철저한 삶을 살아야 한다. 결코 종교적 이론만이 제자가 될 수 없고, 또한 제자를 만들어 낼 수 없다. 언제 부터인가 교회는 초대교회로부터 내려온 제자도의 연결고리가 빠져있고 끊겨져 있게 된다. 제자도의 회복은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사람이 만들어놓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뛰어 넘어 스승의 본질이신 영원한 생명의 주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제자의 길이 무엇인지 알려주신 그 진리의 말씀의 첫출발지로 되돌아가야 한다. 베네치아 색채주의 회화의 거장이라 불리는 ‘자코포 틴토레토’ (Jacopo Tintoretto, 1518 – 1594) 그림 한 폭에 그 답이 숨겨져 있다. 1575-80년, 장장 5년의 기간 동안 그려진 그리스도께서 제자의 발을 씻기시는 장면(Christ washing the Feet of the Disciples)이다. 런던내셔널갤러리 9번방에 커다랗게 한쪽벽면을 장식하는 그의 그림에 선다는 것은 마치 한 작가의 생각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 고민을 나누는 것과 같다.
화가는 자기 생각과 관점을 화폭에 담아낸 것이기 보다는 시대적 고민과 역사가 소금처럼 녹아 담겨있게 된다. 그래서 그림을 본다는 것은 시대의 벽을 뛰어 넘어 과거사 뿐 아니라 미래를 연결해 주는 연결고리가 되는 것이다. 교회는 세상의 중심이었다. 적어도 초대교회는 그렇게 생각했고 그것이 사실임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제자의 발을 씻기시는 장면은 요한복음 13장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16세기 중엽의 교회 상황은 제자도를 잃어버린 거대한 종교집단에 불과했던 것이다. 제자도의 본질을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더 이상의 신앙이기 보다는 종교집단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제자도의 본질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다. 종교적 이론이 아닌 삶으로 그 뜻을 따라 사는 닮음이 제자도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제자들과 마지막 성찬을 나누셨다. 그 소중한 자리에서 제자들의 발을 정성스레 씻기셨다. 그 장면을 화폭에 담아낸 것은 제자도를 상실한 이유를 고발하려 한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모습을 횃불을 들고 내려다보는 가룟유다의 모습이 주목된다. 그는 불을 밝히며 까지 제자 베드로의 발을 씻기는 모습과 그리스도의 섬세한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결국은 제자의 길을 버리고 스스로 독단의 길을 걷고 종말을 맞게 된다. 화가가 그림에 조명을 비추듯 초점을 맞춘 것은 중세의 교회 성직자들이 마치 가룟유다의 길을 걷고 있음을 고발하려 한 것이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종교집단이 주는 이득과 권리, 명예를 내려놓아야 한다. 발을 씻기신 목적은 발을 씻기는 그 상황이 아니라 그 후의 가르침이 중요하다. 오늘날 세족식을 흉내 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몸소 보여주시려는 것은 세족식 이후에 그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요13:12-15)
세족식의 중요한 가치는 발을 씻기는 행위가 아니라 그러한 제자의 삶을 살게 하시려는 그 정신을 이어받는 것이다. 본질을 잃어버린 것은 중세교회뿐 아니라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교회에도 동일하게 적용 된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교리적이며 종교적인 의식인 아닌 삶으로 표현되고 증명되어져야 한다. 경건의 능력을 상실한 중세교회, 그것을 본받고 물질만능주의 노예가 되어 가는 현대 교회를 향한 화가의 외침이 화석처럼 종교적으로 굳어져가는 내 작은 마음을 찢어 깊이 있게 스며든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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