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오피니언 > 유크시론 > 지금 솔직하게 이야기해보자
유크시론

지금 솔직하게 이야기해보자

[유크시론 180호]  이창배 발행인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기 전에…

더 어둡고 캄캄한 밤이 오기 전에, 엄동설한이 오기 전에, 더 늦기 전에 지금 부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응답해야 할 때이다.

이윽고 어둠이 깃드는 저녁,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지는 해를 보며 문득 낮의 길이가 새삼 짧아졌음을 느꼈다. 한 여름 내내 밤 9시를 넘겨서야 이내 어스름해지던 풍경이 저녁 7시대로 짧아진 것이다. 제법 서늘해진 찬 공기가 열린 창 틈으로 들어와 방안에 가득찬다. 차가운 기운 때문인지 몸이 움츠러 든다. 서둘러 창문을 닫고 보니 어느새 컴컴해진 도로에 흐릿 흐릿 가로등이 켜진 것이 시야에 들어온다. 시월이 시작 되누나.
지난달 유크 창간 15주년을 맞이하면서, 각별한 감회가 넘친 것에 감사드린다. 미처 생각을 못했던 일들로 정신없이 수개월을 보내고나니 막상 다가오는 시간들이 참 귀할 데가 더할 나위없다. 소중한 시간이다. 소슬바람에 낙엽 날리듯 그리 보낼 수 없는 시간인 것을 뒤늦게 깨달은 사람인양 마음이 분주해 짐을 느끼게 된다. 이렇게 작은 시간이라도 더욱 붙잡고 싶은 것은 마음인데 물 흐르듯 흐르는 시간의 빠름을 따라잡을 수 없음이 못내 아쉽기만 하고보니 절로 한숨이 나오고만다.
하지만 그래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각오가 있다. 아니 자꾸만 각오가 무디어질수록 오기가 발동 된다. 날이 지고 어둠이 잠기면 그럴수록 밝은 불빛이 필요 하듯 어두워가는 세상에 등불 하나가 되는 이 소명을 결코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스한 온기를 머금은 남녘바람이 사그러지고 제법 차가워지는 소슬바람이 불어오고, 북녘바람에 사위가 얼어붙는 그런 세상이 되면 될수록 따끈한 한 잔의 보리차를 한 컵 가득 담아 건네주는 고마운 손길이 되어 켜켜이 시루떡 모양 차갑게 얼어붙은 마음, 냉기서린 영혼들을 녹여야 할 큰 사랑에 빚을 진 자가 된 까닭이다.
이렇게 미묘한 공기의 흐름 속에도, 자연의 변화 가운데에도 깊고 큰 의미가 담겨져 있는 법이거늘 어찌 이 세대가 비정하고, 무정한 체 말라비틀어진 자기중심에 푹 빠져 버렸을까?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눅 7:31-32)

이 세대, 무감각 병의 문제
저마다 요구하는 것은 크고, 자기를 먼저 내어놓으려는 희생에는 거리가 멀다고 느껴지지 않는가? 그런데 멀게 볼 필요도 없이 가깝게 보더라도 그렇다. 오늘을 사는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아주 심각한 병 그것이 무엇일까? 소위 말하는‘무감각 병’이다. 무섭도록 하나님이 내린 저주의 상징 문둥병의 핵심을 빼어 닮았다. 그 천형의 본질은 무감각이다. 그래서 죄를 짓고도 무감각하고, 회개하라고 외쳐도 무감각하다. 다른 사람이 자기 자랑을 하면 그 꼴을 못 봐주고 그대로 못 넘긴다. 하나님의 말씀이 넘쳐도 삶에는 변화가 없다. 그래서 이 세대가 또한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 아이들처럼, 애곡해도 가슴을 치지 않는 아이들처럼 됐다고 말하지 못할 이유가 상실된 것이다.
비단 교회의 문제는 성도의 문제이고, 성도의 문제는 역시 목회 지도자의 문제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싶다. 곧, 이 세대야말로 우리의 모습을 정직하게 비춰주는 거울인 셈이다.
보자. 자기를 먼저 돌아보고 탓하고 변화해 보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의 특징 은 자신으로 인해 생긴 문제를 가지고 교회를 탓하고, 교우를 탓하고, 목사를 탓하는 공통점을 가진다. 그리고 한결같이 주변에 이야기하기를 교회 안에 사랑이 없다고 말한다. 달리 말하자면, 자신으로 말미암아 죄의 담이 높아져 하나님의 사랑을 가로막고, 성도의 사랑도 다 막히고 있는데, 오히려 교회 안에 사랑이 없다한다.
하지만 무엇이 진실인가? 실상은 ‘무감각 병’그것이 문제이다. 더 이상 복음의 능력도, 십자가의 능력도, 그 어떤 하나님의 말씀에도 그대로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는 중증이다. 거기로부터 오는 공허감이 온통 그 영혼을 휘감아버리고 말았다. 이 무서움을 어찌 그대로 간과해 버릴 수 있겠는가?  이렇게 곪아터져버리기 직전의 종양 말기처럼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대가 너무도 위태롭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모양은 좋은데, 경건의 능력은?
이미 썩은 속내는 차마 말하지 못하고, 그냥 겉치레에 그치고마는 어떤 모임들은 그저 그렇게 지나고나면 공허함 만이 남는다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4:12). 이 능력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세상을 향해 외치고, 힘차게 행진해야 할 마당에 그 소리가 그 모임의 작은 공간조차 넘어가지 못한다. 낯간지럽지만 공허한 울림 뿐이다. 진정한 개혁정신은 실종된 체 왜 모여야하는지조차 모를 공허하고 허탈한 모임이라면 이제는 거두어야 한다.
알기에도 내년 루터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새해에는 무언가 제법 굵직한 행사들이 여럿 준비되고 있다. 아니 또한 기존 끌어온 여러가지 모양의 행사들까지 즐비하다. 그런데 알아야 할 것은, 모양은 좋은데 경건의 능력은 어떨지 과연 그것이 궁금하다.
그 궁금증은 이렇다. 정말로 세상을 바꿀만한 원동력을 어디서부터 되찾아야 할지 성찰은 했는가? 적어도 이 세대 ‘무감각 병’그 중증에 빠진 자들에게 어떤 도전을 주자는 것인지,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인지 어느 누가 진지하게 머리를 맞대었는가이다. 그런데도 불문가지로 최고 수준의 퍼펙트한 진행, 현란하고 눈부신 조명빨로 집중된 무대, 최고 설교가들의 매끄럽고 세련된 스피치, 유명 엔터테인먼트급의 찬양, 방송 미디어를 동원한 멋진 이벤트 한방으로 끝내 줄 것을 기대한다면 이는 너무 비관적이다.
물론 개인적인 취향일 수 있다.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이 그 방향대로 추진한다고 해서, 그냥 몇몇 내부자들을 만족시켜주고, 그 잔치와 성과를 통해 그럴듯한 자기 과시와 자랑에 그치고 말 것이라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하지만 이제는 솔직하게 이야기 해보자. 이제 모든 것을 원점에서 다시 살펴보자. 누가 누구를 탓하며, 누가 더 공의롭다고 말할 자격은 아무에게도 없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진실한 목자의 자리로 회귀할 수 있을까? 어찌하면 교회가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는 교회로 회복될 수 있을까? 이제까지 걷고 있는 이길이 좁고 협착한 길이 맞을까? 겸손히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진지한 고민을 나누는게 먼저 할 순서이고, 유럽 한인디아스포라교회들이 지향할 방향이 아닌가 묻고싶다. 더 어둡고 캄캄한 밤이 오기 전에, 엄동설한이 오기 전에, 더 늦기 전에 지금 부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응답해야 할 때이다.

이달의 말씀 ㅣ 마태복음 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READ  그 메시지, 시대의 소리에 귀 기우리라

Leave a Reply

Be the First to Comment!

Notify of
wpDiscuz
Previous Next
Close
Test Caption
Test Description goes like this
Social Media Auto Publish Powered By : XYZScript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