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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크시론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유크시론 181호]  이창배 발행인

우리가 대한민국이다.

이 때가 바로 지금이다. 이렇게 모두가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뒤숭숭하며, 어지러울 때, 망연자실해 있는 사람들의 감정을 들쑤시는 각종 선동적 기사들이 넘쳐나는 이 때에 “공법과 정의가 무엇인지”교회가 솔선수범으로 행동으로 보여야 할 때이다.

어둡고 답답하다. 마음이 침울해진다. 계절탓인가, 날씨탓인가? 햇빛 없는 독일의 우중충한 거리풍경처럼 마음이 내리깔아 앉는다. 한 여름 내내 그렇게 무성했던 나무들마다 하나 둘씩 낙엽이 떨어져내리면서 앙상한 가지들이 속절없이 드러난다. 길섶에 수북히 쌓여가는 낙엽들이 지나는 바람에 여기저기 나뒹굴어 흩어지고 있다. 나무는 어떤가? 마치 깊숙이 감추어 두었던 속살이 드러나 부끄러운지, 더 이상은 가릴 수도 없을 서너개 잎새를 붙들어두고자 애를 쓰는지, 지나는 바람에도 부들부들 흔들거린다. 더 없이 애처롭게 보인다. 하루종일 그렇게 부대끼다 이윽고 어두어지는 저녁을 맞이한다.

지금 조국 대한민국에서 펼쳐지고 있는 양상이 곧 어두침침해 지는 저녁을 맞이하는 늦가을의 풍경과 같다. 그저 답답하고 뒤숭숭해 어떤 일도 쉽게 손에 잡히질 않아 그저 그렇게 몇일을 보냈는가 보다. 만사 의욕이 다 떨어지고만 것일까?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펄펄뛰는 세상언론들의 취재경쟁이 정도를 지나쳐 점입가경(漸入佳境)이건만 왠지 흥미가 슬그머니 사라지고 만다. 이제 그 만큼 나이를 먹은 까닭인지는 몰라도 봇물이 터지듯 쏟아져나오는 각양 세상물정의 야박함에 거슬려 서운함이 한편에서 일어남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사태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국가의 최고통치자요, 지도자가 아닌가?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해서라도 이번 일로 야기된 모든 불법과 의혹에 대해서 시시비비를 따지는 것이 마땅하다. 법으로 공의롭게 판단을 할 사법부가 있으니 엄연히 그 의혹을 일점일획도 남기지 않고 밝혀내 국민에게 납득을 시켜야 한다. 이번 사태를 야기시킨 그 결과의 엄중함을 당사자들에게 물어야 할 터에 무슨 토를 달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답답하고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차라리 이 모든 게 나의 부덕의 소치라며 모든 책임을 내가 떠맡고, 그 자리를 물러나겠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지도자다운 용기는 진정 없는 것일까? 결단코 침묵이 금이 될 수 없음은 명약관화한데 금쪽같은 시간은 흐르고 있다.

누가 정말로 애국자인가?
누가 정말로 국가와 국민을 사랑하는 사람인가? 이번 일로 나 또한 나 자신을 살피게 됐다. 과연 나는 정말로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고 있는지, 그런데 부끄럽게도 내 안에는 그런 애국심이 손톱만큼도 존재하지 않았음을 알게 됐다. 부끄럽다. 입으로는 수없이 그렇게 말했을 것이고, 마음으로도 나는 나의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노라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왔을 것이다. 이성은 지금도 그렇게 여기고 있다. 그렇기에 작금의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불의와 부정에 참을 수 없는 공분을 느끼며, 이꼴이 되도록 작살난 국가를 위해 분통을 터뜨리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애국심이라는 것일까?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은 이기심이고, 감정에 충실한 반응일 뿐이다. 나는 없고, 전부 남에게 초점이 모아져 있다. 너 때문이다 라고. 그러나 성경은 무어라고 말씀하는가?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마7:3) 하나님 앞에 선 나의 모습은 그야말로 눈에 “들보”가 낀 장님이 아닌가? 그런데 장님이 어떻게 남의 눈에 낀 티끌을 볼 수 있단 말일까?

“내 눈 속의 들보와 남의 눈 속의 티끌”은 과장법적인 표현이지만, 이 말씀의 핵심은 남의 눈에 있는 티끌을 보기 이전에 나의 눈에 있는 들보를 먼저 보라는 교훈이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와 다를 바 없다. 그러니 자기 자신에게는 관대하면서도 남에게는 추상같이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무서운 경고가 아닐 수 없는 말씀이다.

그런데 참 외람되게도 과연 우리나라 정치 지도자들 가운데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먼저 보는 사람은 누군가? 오히려 내 눈의 들보는 감추려들고, 다른 사람 눈의 티끌에 대해서 쌍심지를 켜는 비뚤어진 마음을 가진 이들이 너무 많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사람들이 마치 국가와 국민을 위한다는 논리를 곧잘 되뇌이면서도 그 궁극은 나 잘되자는 식으로 점철되고 만다. 줄서기와 줄타기로 대두되는 정치문화의 단면을 보면 알만도 하다. 비단 정치인 뿐이겠는가? 사회지도자, 종교지도자, 모든 분야에서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우리들은 그 동안 너무 안이하고, 무관심하고, 무책임하게 정작 공의로운 국가를 만드는 일에서는 되도록 멀찍이 등돌리고, 눈감고 산 것에 대해서 최소라 할지라도 반성의 기회로 삼아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기도할 책무를 다하자!
최근 국제성시화운동본부, 세계중보기도센터에서는 이러한 기도제목을 보내왔다. “물론 대통령의 중대한 실수는 반드시 바로잡아야할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국가의 안녕과 직접 연관된 국정의 안정과 안보의 문제입니다.  작금의 사태를 악용하여 정치적 입지를 얻으려거나 북한의 도발적 행위들로 악용될 우려가 크기에 대한민국의  안녕을 위한 긴급한 기도를 당부합니다.”

사실 나라와 국민이 모두 믿었던 기대감이 무너지고, 국권이 땅에 떨어진 작금의 상황 앞에서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어렵고 힘든 때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해야 할 것은 당연한 책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려가 앞서는 것은 그 어떤 교계 지도자가 있어서 앞에 나서 “정의란 무엇인지” 진정성을 가지고 흐뜨러진 민심에 옳고그름을 호소할만한 이가 없다는 점이다. 누구를 옹호하고 아니고의 문제를 떠나서 교회가 그만큼 정의에 대한 뚜렷한 소신도 확신도, 용기도 없다는 반증이다. 그렇다면 대소 무론하고 교회가 이 때에 침묵하면 안 된다. 먼저 우리 교회의 치부와 불의와 불순종을 깨끗히 씻어내는 미스바 회개 운동을 오늘날에 이끌어내야 한다.

아모스 5:24절,“오직 공법(justice)을 물같이, 정의(righteousness)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라는 이 말씀의 의미를 되새겨보면, 곧 하나님의 자녀들이 공의와 정의를 실현하지 않으면, 모든 생활에 불공평하게 판단하며 불의하게 행동하면서 예배드리는 것이나, 기도하는 것이나, 찬송하는 것을 받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뜻이 얼마나 확고한 것인지를 알게 된다.

이 때가 바로 지금이다. 이렇게 모두가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뒤숭숭하며, 어지러울 때, 망연자실해 있는 사람들의 감정을 들쑤시는 각종 선동적 기사들이 넘쳐나는 이 때에 “공법과 정의가 무엇인지”교회가 솔선수범으로 행동으로 보여야 할 때이다. 오늘 날 우리가 디아스포라로 해외에 있다고 할지라도 결코 국외자가 아니다. 우리가 대한민국이다.

[이달의 말씀] 호세아 10:12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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