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오피니언 > 유크시론 > 세상은 우리를 통해 다시 희망을 볼 것
유크시론

세상은 우리를 통해 다시 희망을 볼 것

[유크시론 182호]  이창배 발행인

작은 예수가 되자.

교회가 얼마를 수입하고 얼마를 지출했느냐 하는 규모의 대차대조표보다 더욱 소중한 가치가 있다. 그 가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내 주님으로 삼고 그분을 따르고 있는 가이다.

어두움이 스산하게 내리고 있다. 아직은 저녁이라고 할 수 없는 오후 4시경인데 차가운 한기와 함께 어둠이 땅에 깔리고 있다. 12월만 들어서도 이토록 해가 짧아진다. 먼발치 아득하게 먼 들녘, 그 위로 가득 메운 짙은 회색 구름 틈새로 조금 열린 서쪽 하늘색이 붉어지는 듯하더니만 이내 깊은 어둠에 잠기고 만다.

지루하리만치 올 한 해 열한 장의 달력을 넘기고, 이제 한 장을 남겨놓은 탁상 달력이 무언가 묻는 듯 눈에 들어온다. 과연 이 한 장의 달력이 넘겨지기 전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하고 말이다. 누가 그렇게 시작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빨간색으로 표시된 날짜는 전통적으로 주일이고, 그 날을 제외한 주중 군데군데 빼곡히 메모를 적어둔 날들은 이미 짜인 일정이 있고, 그나마 듬성듬성 이빨이 빠진 듯 비어있는 날이 있는데, 이날은 무언가 정말로 소중한 시간을 위해 애써 비워놓고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어떤 기대감이 여전히 자리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껏 지나쳐 보낸 열한 장의 달력에도 여전히 빈칸이 남아 있고 이미 지나쳤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나마 기대와는 늘 거리가 먼 어정쩡하거나 얼토당토않을 그런 일들만 잔뜩 생겼던 까닭에 그나마 끄적거린 메모조차 남길 수 없는 쓸데없는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제 남은 빈칸에 대한 기대감이 더욱 커지는 것이나 아닐지…. 그런데 예상하건대 올해도 역시 그럴만한 뜻밖의 일은 생기지 않을 것만 같다. 항상 나의 기대와는 왕왕 다른 결과가 주어진 경험 탓 일 수 있겠다.

하기는 설령 나에겐 그랬다 쳐도 다른 이들에게는 전혀 다른 상황이 전개되지 말라는 법도 없으니 한쪽으로만 치우칠 필요는 없겠다. 어느 사람들에게는 마음이 뜨거워지고 들끓어 올라 가만히 있을 수 없을 일이 될 터이고, 하지만 어떤 이에겐 이상스럽게도 이전보다 마음이 차분해지고, 담담해지는 그런 현상이 생겨남이 새삼스러운 것도 아닐 터이다. 그러니 각각 생각이 다르다는 것은 이상스러울 것도 없다. 하지만 적어도 내겐 그렇게 기대해야 할만한 일보단 그 반대로 실망과 낙심을 가져다줄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욱 커짐이다.

기대하고 소망하는 일은 늦게 온다

이런 말이 있다. 정말로 기대하고 소망하는 그런 일은 쉽게 오질 않는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어느 날 불쑥 찾아오고 말 그런 일들은 애당초부터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진정으로 기대하고 열망하는 그런 일은 결코 우연이나 행운 따위에 편승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7-8).

쉬운 말로 하자면 콩을 심은 곳에서 콩이 나고, 팥을 심은 곳에서 팥이 나는 것이 진리이다. 단언컨대,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시편 126:5). 땀을 흘리며 씨 뿌리는 자, 기쁨으로 거두리로다가 아닌 눈물 흘리며 씨 뿌리는 자가 결국 거두게 될 것을 말씀하신다.

왜 눈물이어야 되는가? 인간의 눈물에는 애정, 안타까움, 간절함, 정성, 사모함, 진정성이 들어있다. 절대 거짓이 통할 수 없는 진심이 그 안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같은 육체에서 나오는 액체이지만 땀과 피는 감정에서 배어 나오지 않고도 흘릴 수 있다. 육체의 노동에서, 동기부여가 달라도 누구든지 애를 쓰면 흘릴 수 있는 액체에 불과하다. 그래서 눈물의 소중함을 말씀하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을 보자. 자기가 눈물을 흘리며 씨앗을 뿌리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남의 밭에 들어가 수확을 하려는 거짓 농부의 모습이 보이질 않는가? 문제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누구보다 빨리빨리 거두려 한다는 데 있다. 모름지기 아마도 땀을 흘리는 정도의 수고는 했을 수 있겠다. 그러나 그 기회에 자기의 유익을 극대화하려는 저의를 드러내놓기를 부끄러워하질 않는 그 뻔뻔스러움에 도리어 마음이 식어버리질 않는가?

사실 진정한 농부라면, 적어도 경망스럽게 아무렇게나 씨를 내던지듯 마구 뿌려대질 않는다. 또한, 씨를 뿌린 후 내버려 둔 채 놔두고 있다가 추수 때에 알곡이 나올 것을 기대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거둘 때까지 노심초사하며 궂은 날은 궂은 날대로, 볕이 뜨겁고 좋은 날은 좋은 날대로, 울 때도 있고, 웃을 때도 있어 그 날이 오기까지 참고 견디며 기다리지 않겠는가? 이렇게 기다리는 시간이 어떻게 짧다고, 쉽게 오는 것이라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을까 싶다.

진정한 농부, 눈물로 씨를 뿌린다

진정한 농부가 되자. 대중영합주의(Populism)로 온통 도배가 되다시피 하는 오늘날 대중매체를 보면 볼수록, 아니 이에 편승한 정치지도자들의 정치적 편의주의, 기회주의적인 모습을 보면서 이 시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눈물을 흘리는 농부가 되어야 한다고 마음을 곧추세우지 아니할 수 없다. 실제의 땅을 흙갈이하지 않더라도 이 세상을 흙갈이해야 하는 농부로 사는 것이 당연하다. 눈물로 씨를 뿌리고 기쁨으로 추수를 하는 삶의 농부가 되어야 하는 것으로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의 도전이 된다면 얼마나 신선한 모습이 될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6). 어둡고 혼돈에 휩싸인 비참한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진정 하나님이셨고, 그분은 진정 사람으로서 그 생애를 눈물로 시작해 눈물로 마치셨다. 세상의 온갖 화려함과 떠들썩거림과는 동떨어진 한적한 산동네, 그것도 지천으로 깔린 돌과 바위로 이뤄진 베들레헴 외곽의 어두컴컴한 지하동굴, 거기 조그만 가축의 우리를 보금자리 삼아 태어나셨다. 우정 세상 변방에서의 삶을 택하셨고, 그렇게 눈물로 시작해 눈물로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 이것이 좁은 길, 좁은 문을 향해 눈물로 기경(起耕) 하는 성도의 모습으로 자리매김이 되도록 모든 교회가 심기일전 해야 할 이유이다.

이제 교회들은 한 해를 결산하고 새해를 맞이할 채비에 바쁘다. 그러나 교회가 얼마를 수입하고 얼마를 지출했느냐 하는 규모의 대차대조표보다 더욱 소중한 가치가 있다. 그 가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내 주님으로 삼고 그분을 따르고 있는 가이다. 그 삶이 표준이 되고, 원칙이 되는 변혁을 위해 목회 적 삶을 살았는가, 그 고독한 길을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제자의 삶으로 표출이 됐는가이다. 이처럼 우리가 작은 예수가 될 때 세상은 다시 희망을 보게 될 것이다.

이달의 말씀 ㅣ 시편 126:5-6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READ  잊어버린 THIS, 다시 찾아야 할 THIS

Leave a Reply

Be the First to Comment!

Notify of
wpDiscuz
Previous Next
Close
Test Caption
Test Description goes like this
Social Media Auto Publish Powered By : XYZScript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