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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교회개혁” “도시개혁” 그리고 “새로운 기독교 문명”

[프랑스포커싱]  채희석 목사/ 파리 모두 제자교회/ 18회

칼뱅이 제네바 사역을 통해 남긴 유산 (1) :

칼뱅이 개혁자로서 온 인생을 드려 헌신한 25년간의 제네바 사역을 통해 그 시대와 오늘날에도 남긴 영적 유산은 “교회개혁”뿐만이 아니라 “도시개혁” 더 나아가 “새로운 기독교 문명”을 창시하는 것에 있었음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교회 회복을 위한 루터의 종교개혁
16세기 종교개혁은 근본적으로 그 당시 악폐를 행하는 부패한 교회를 순수한 원래의 목적에 맞게 회복시키고자 하는 교회 <내부자> 운동에서 시작되었다. 루터는 먼저 구원에 대한 교회의 역할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면서, 사후 죄인이 받을 고통을 감해준다는 교회의 상업화된 면죄부 남용을 <95개 조항의 반박문>에서 지적했고, 영혼의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얻어진다는 이신칭의 진리를 <로마서 1장 17절 주석>을 통해 밝혔다. 더 나아가 교회의 잘못된 권위에 대해서도 지적을 했는데, 만인제사권이 모든 신자에게 부여되며, 성서 해석권도 교황에게만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독일 귀족에게 고함>이란 책에서 주장했다. 또한 그는 교회 성례전의 오류도 지적하면서 주님께서 명하신 성례전은 오직 침례(세례)와 성찬뿐임을 <교회의 바빌론 유수> 책에서 강조했다. 교회 사제와 신자 간의 수직적 예속관계도 지적하면서, 마치 교황을 교회의 최고 권위로 여기고 신자들을 사람에게 예속시키는 문제를 제기하고, 그리스도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 속에 있을 뿐 어느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음을 <그리스도인의 자유> 저서에서 피력하였다.

이처럼 루터와 함께 교회 개혁을 이루고자 한 종교운동은 어디까지나 종교적이고 신학적인 것이었다. 다음 세대에 계속되어 일어나는 종교개혁도 신학적으로 새로운 것이기 보다는 반복적인 것이고 보다 완성된 모습으로 진행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교회개혁 차원에선, 어떤 의미에서,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의 처음 의도는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1521년 로마교회로부터 출교를 당한 후, 신성 로마제국으로부터도 권리와 특권을 상실한 루터와 이단으로 간주된 종교개혁자들의 교리는 철저하게 로마교회 내에서 배척되었기 때문이다. 루터는 어쩔 수 없이 천주교와 구별된 경쟁적인 교회를 세울 수 밖에 없었다. 선제후 프레드리히(Friedrich) III세의 보호를 극적으로 받았지만, 활동 영역엔 제한 받은 입장이었고, 비록 그의 저서는 국경을 넘어 전파되었지만, 루터 자신은 공간적으로 작센이라는 곳에 제한될 수 밖에 없었다.

세상을 향한 칼뱅의 종교개혁
이런 배경은 루터교가 프랑스와 같은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또 다른 종교운동으로 진입되는 첫 단계 역할을 하는데 불과했다는 점을 부분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 프랑스 종교개혁자 칼뱅(Jean Calvin)은 근본적으로 루터의 종교적 신학적 개혁에 영향을 받은 자이다. 하지만 16세기 유럽 종교개혁에서 칼뱅이 루터와 더불어 그 시대 영성의 쌍벽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루터에 비해 다음과 점에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루터의 주장은 교회 밖의 세상을 변혁하고자 하는 성육신화된 메시지가 되기에는 거리가 있었다. 이유는 그는 당시 세상을 주어진 그 자체로 보았기 때문이다. 반면 칼뱅은 세상도 개혁의 대상으로 보았다. 그는 종교개혁의 범위가 교회를 넘어서 세상을 향하게 만들었다.

루터에 의한 관권개입적 종교개혁은 주로 교회에 한정된 개혁에 머물렀고, 제세례파 등이 추구한 급진적 개혁운동은 개인 영성이란 주관적 측면을 강조하는 한계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칼뱅은 새로운 신학, 새로운 인간, 새로운 사회라는 보다 폭 넓은 틀에서 개혁을 추구했다. 한 마디로 칼뱅은 영혼의 구원 후 도래할 새로운 문명 창시에도 도전을 했다고 프랑스 역사학자 에밀 레오나 (Emile G. Léonard)는 통찰하고 있다. 이는 2세기 후 개혁주의 신앙을 지녔던 철학자인 루소 (Jean-Jacques Rousseau,1712-1778)가 한 말 중에도 함축되어 있다: “칼뱅을 오직 신학자로 간주하는 자들은 그의 놀라운 재질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칼뱅이 개혁자로서 온 인생을 드려 헌신한 25년간의 제네바 사역을 통해 그 시대와 오늘날에도 남긴 영적 유산은 “교회개혁”뿐만이 아니라 “도시개혁” 더 나아가 “새로운 기독교 문명”을 창시하는 것에 있었음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제네바 <교회개혁>을 통해 성취된 개혁교회 모델.
칼뱅은 진실로 많은 재능을 가진 자였다. 인문학자, 법학자, 논전자, 시의원 등 여러 역할을 감당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신학자이자 목회자였다. 신학자로서 그는 성서 주석에 매진하여 대부분의 성경책 주석서를 저술했고, 목회자로서 성경을 주야로 가르쳤으며, 열정이 넘치는 설교를 수도 없이 많이 했다. 기록으로 남지 못한 천여 개의 설교를 고사하더라도, 오늘날까지 1500편을 설교가 기록되어 남아 있는 것이 이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또 그는 <기독교 강요>를 비롯하여 중요한 여러 신학 책을 저술하였다. 특히 교회의 본질, 역할, 예배, 성례, 기도, 영적 훈련, 교리문답, 목회적 권면, 미신의 악폐, 등에 관한 주옥 같은 책들은 새로운 개혁교회가 만들어 지기 위한 신학적 성경적 터전을 제공하는데 기여했다. 1559년 4권으로 편집된 <기독교 강요> 최종판 “창조주이시며 세상의 주권자 하나님을 아는 지식(1권), 구약의 율법과 신약의 복음에 나타나신 구속주 하나님 곧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2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참여하는 길: 그 유익과 효과(3권),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보호하시기 위해 주신 수단인 교회(4권)”은 칼뱅의 온전한 개혁사상을 잘 정리해 주고 있다.

칼뱅에게 있어서 <진정한 종교>란 하나님의 택정하심(election)에 관한 영원한 법, 성부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의 그리고 성령의 은사 위에 기초를 두는 것으로, 그의 저서는 이런 종교를 찾는 자에게 지침서가 되었고, 이는 곧 모든 우상, 미신, 광신, 불경건이 제거된 <진정한 교회>를 이해하도록 인도하였고, 교회개혁의 초석이 되었다. 칼뱅 자신에게 있어서 교회 개혁은 모든 개혁의 출발점이 된다. 특히 부패한 그 당시 로마 카톨릭교회의 구습에서 벗어나 교회의 본질을 찾고 예배를 새롭게 개혁하는 것이 그의 첫 사명이기도 했다. 하지만 로마카톨릭교회에 의해 강요된 성례와 전통을 버리고 새로운 교회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은 쉽지만 않았다. 성도들 가운데에서는 하나님과의 내적 관계만을 강조하고, 교회 예배를 통한 신앙의 표현을 경시하거나 최소화하려는 신비주의 유혹도 있었다. 이에 대한 칼뱅의 입장은 단호했다. 성서의 가르침과 초대교회의 사례를 통해 신실한 예배를 회복하는 것을 최우선 순위로 두고 개혁 방향을 잡아나갔다. 그에겐 올바로 믿는 것과 교회제도를 재정비하는 것은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진정한 예배라기 보다는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로서 드린 미사의 미신적이고 우상숭배적인 종교의식제도를 배격하고, 그 대신 하나님의 말씀이 드러나도록 4가지 예배 형태를 조화롭게 적용하고자 했다.

– 그것은 강해식 설교(lectio continua),
– 성경에 나타난 구원에 대한 약속을 성도들이 오감으로 느끼고 이해하게 만드는 성례전 (세례와 성찬),
– 하나님 은혜에 의존하는 신앙의 표현으로써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개인적으로 드리는 기도,
– 영혼을 고양시키기 위해 멜로디와 성경구절이 긴밀하게 연결된 시편 찬양 등이다.

제네바 교회를 재조직하려는 첫 시도가 1537년에 칼뱅의 협력을 받은 화렐에 의해 추진되고, 이는 종교적인 틀 안에서 제네바 시를 통합하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다. 즉 교회가 신앙이 의심스러운 자에게 성찬 불허를 하는 권한을 갖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만다. 일부 제네바 시민들이 교회 권력에 출교를 명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갈등은 심화되어 급기야 화렐과 칼뱅은 1538년 봄에 제네바에서 추방된다. 하지만 1541년 9월 칼뱅을 재 초청한 제네바는 칼뱅이 제시한 정치와 종교 간의 관계를 수용하고, 그로 하여금 새로운 교회제도를 세우도록 허용한다. 하지만 칼뱅은 과거 경험을 교훈 삼아 방법을 달리한다.

그는 1542년에 발간한 <교리문답>(Catéchisme)에 기초한 신앙 교육을 앞세운다. 새로운 교회제도는 시당국과 사전 조율되어 작성된 <교회조직 지침서>(Ordonnances ecclésiastiques)에 근간하여 적용된다. 이는 일종의 교회 헌법(constitution)과 같은 것으로, 차후 칼뱅주의 교회들에게 예배 방식 구상하고, 교회 치리 및 이를 담당하는 장로회의(Consistoire)를 만드는데 가이드 라인을 제공하게 된다. 또한 같은 해에 칼뱅은 <교회 예배양식에 관한 지침서>를 만들어 주중 또는 주일예배 시 기도와 성례전(세례, 성만찬) 그리고 결혼 예배 시 사용하도록 하였다. 이 두 가지 지침서는 제네바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와 관련 교회력(calendrier liturgique)을 작성하는 데 서로 보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물론 모든 예배 절차와 방식이 칼뱅이 원하는 대로 다 채택된 것을 아니었다. 칼뱅이 구상하고 최종적으로 채택한 계획에는 이미 1533년에 채택된 쯔빙글리식 전통이 고려가 되었다. 예를 들면, 매주 성만찬 예식을 원했던 칼뱅의 생각과는 달리, 결국 일년에 4회 (유월절, 오순절, 9월, 성탄절)로 기존의 전통(년 3회)을 존중하여 수정 보완되었다. 성만찬 집행도 칼뱅은 원래 오직 목사에 의해 떡과 포도주가 나누어지길 바랬지만, 이전 전통을 고려하여 떡은 목사가, 포도잔은 장로들이 나누도록 하여 만인제사장 정신이 반영되도록 조정하였다. 이 밖에 년 4회 시차적으로 군형 잡히게 배분된 성례일 사이마다 <회개화 화해>, <목회자와 장로의 자숙 및 성찰>, <성만찬 설교>, <성도들 영적훈련> 등을 위한 예배를 갖도록 조직했다. 그리고 1550년부터는 모든 축제를 폐지하고 오직 주일만을 휴일 지정하였고, 제네바 시에 잇던 3개 교회가 번갈아 가면서 매일 예배를 드리며, 수요 기도모임과 주일 기도모임을 주관하게 하였다. 칼뱅이 사역한 지 10년이 되는 해(1552)에 비로서 새로운 교회의 틀이 잡히고, 또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565년에 <위그노 시편 찬양집>(Psautier Huguenot) 최종본이 편찬된다.

이처럼 칼뱅은 1564년 5월 27일 임종할 때, 오직 목사라는 유일한 자격으로서, 동료 목사들과 마지막 시간을 보내며 고별한다. 제네바 교회를 개혁한 그의 사역은 한편으로 작은 시작에 불과한 하나님의 사역일 수도 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론 위대한 일, 즉 제네바 교회와 제네바 도시를 통해, 온 유럽과 온 세상에 하나님 통치의 빛나는 영광을 밝히는 사역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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