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오피니언 > 시사칼럼 > 칼뱅의 도시, 제네바는 어떻게 개혁되었는가?
시사칼럼

칼뱅의 도시, 제네바는 어떻게 개혁되었는가?

[프랑스포커싱]  채희석 목사/ 파리 모두 제자교회/ 19회

칼뱅이 제네바 사역을 통해 남긴 유산 (2) :

제네바는 주 후 3세기부터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며, 6세기에 들어서면서 로마카톨릭교회가 자리를 잡게 된다. 중세 내내 제네바 시에 천주교 주교가 군림했지만, 실제 모든 권력은 시당국이 점유했던 도시국가였다. 종교개혁이 발생하기 전, 제네바 시는 잦은 소요, 도박, 사교 춤, 음주벽, 방탕 등으로 유명한 도시였다.

타락과 부패로 인해 소망이 없었던 제네바
그 당시 유럽의 다른 도시처럼, 제네바의 오백여 명 성직자들은 모두 타락하였고, 그로 인해 시민들도 대부분 기독교 신앙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였다1. 사제들이 기껏 한다는 게, 면죄부를 도시 푯말마다 붙여 놓고 돈으로 죄값을 감형시키는 어처구니 없는 영적 장사를 한 것이다. 이처럼 종교지도자의 타락과 사회 전반의 도덕적 해이로 혼탁한 제네바에게 필요했던 것은, 다른 것이 아닌 바로 도시 자체가 개혁되어 변화되는 길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는 마치 흑인의 피부를 희게 바꾸는 것처럼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개혁은 제네바로부터 자생적으로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처지였다. 그 당시 제네바에는 두 유형의 권력이 서로 알력 관계에 있었다. 하나는 주교에 주어진 종교적 권력, 또 다른 권력은 정치적 권력으로 시의회(le Conseil des Deux-Cents)가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서로 양보하질 않았다.

개혁사상으로 변화를 찾기 시작한 제네바
하지만 어둠의 늪에서도 작은 빛이 비취기 시작했다. 1525년부터 루터의 개혁 사상이 이동하는 독일 상인들을 통해 부분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했다. 1533년에 이르러서는 화렐(Guillaume Farel), 비레(Pierre Viret), 프로망(Antoine Froment)과 같은 주로 프랑스에서 온 개혁자들에 의해, 종교개혁 사상이 시민들에게 선포되었다. 복음의 빛이 역사하여 급기야 1536년, 정치 권력인 시의회를 통해 개혁주의가 공식적으로 제네바 시에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동시에 로마카톨릭 세력을 축출하고, 독립적인 공화국 도시로서 탈바꿈을 하게 된다. 이처럼 칼뱅이 사역하기 바로 전, 제네바에선 시의회가 주도하여 이미 개혁을 위한 정치적 기초를 마련한 것이다. 때 마침 화렐은 1536년 제네바를 잠시 방문한 27세의 칼뱅의 영적 자질을 보고 하나님의 뜻으로 강권적으로 제네바 개혁사역에 초대한다. 이 때, 그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교회를 개혁하고 새로운 교회로 재조직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제네바와 시민들의 삶도 개혁의 대상으로 바라보았다. 또 정치적 변화도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1537년 1월 제네바 시정부(le petit Conseil)에 구체적인 개혁안이 담긴 주요 규정(Articles)을 제출한다. 이 규정에 따르면 모든 제네바 시민은 교회와의 관계가 분명해야 하며, 이를 위해 신앙고백서에 서명하고, 어린이들은 교리문답서를 통해 교육을 받도록 하였다.

칼뱅의 제네바 일차 사역: 미완성된 개혁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먼저 교회개혁을 위해, 칼뱅은 성서의 가르침 토대 위에 교회 예배와 조직을 새롭게 구축해 나갔다. 그러나 제네바 시를 개혁하고자 하는 그의 활동은 교회 안에서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밖으로 나가 제네바 시민에게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다. 시의회에서, 아카데미 교육기관에서, 외부 종교집회에서, 장로회의에서 지치지 아니하고 수많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였다. 그는 청중을 설득하는 방법과 기술을 나름대로 가지고 있었다, 먼저 성경구절을 히브리어 또는 헬라어로 읽은 다음, 즉시 번역을 하면서, 설교를 하였다. 이를 통해 그의 설교가 진리의 말씀 위에 기초한 것임을 보여주었다. 성경을 구절 또는 단어마다 설명하면서 교훈과 권면을 하였고, 그의 목소리는 살아있었고, 항상 시민들이 민감하게 느끼는 시사적 문제에 대해 정확한 언급을 하였다. 그의 수사적 능력은 뛰어 났지만 성령에 의존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사역자로서 임하였다. 그러할 때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칼뱅의 목소리가 제네바 시민들에게 강력하게 울려 퍼졌다2. 칼뱅의 말씀 사역은 제네바 시민의 내면을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하지만, 제네바 시의회가 개혁주의를 선택한 것은 반드시 영적인 이유만은 아니었고, 정치적 속셈도 있었다. 그들을 지배해 왔던 카톨릭 세력 영주와 사부아(Savoie) 정치 세력에서 벗어날 명분을 찾으려고 개혁주의를 선택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칼뱅이 영적인 차원에서 제네바 시를 하나님의 도성과 같이 만들고자 개혁하고자 했을 때, 이를 감당할 준비가 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뱅은 이런 시민들의 양속을 정화하고, 건전한 도덕관념을 심고, 시당국과 교회 간의 조화된 안정된 관계를 확립하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시당국은 칼뱅의 이런 야심에 쉽게 부합할 수 없었다. 복음의 요구가 버거웠고, 특히 교회가 회개치 않는 시민을 출교 시킬 수 있는 권한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또 제네바 시민이 아닌 프랑스인에 의해 개혁이 주도되는 것에 불만을 가진 자들도 있었다. 경제 기득권 세력의 반발도 있었다. 이 시점 제네바 시정부는 교회가 시의 권력에 의존하는 베른 교회제도에 유혹을 받아, 신앙고백서에 서명하지 않아도, 성찬을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하였고, 교회의 독립된 영적 권한 마저 간섭하고자 했다. 이를 반대한 칼뱅과 화렐은 그 다음 해인 1538년 유월절 기간에 불행하게도 추방된다.

제네바 시민들은 칼뱅을 버리지 않았다
칼뱅은 제네바 일차 사역 이후 마르틴 부서(Martin Bucer, 1491-1551)초청으로 스트라스부르그에 가서 프랑스 난민교회 목회와 신학교 교육을 담당하였다. 이 기간(1538-1540)은 칼뱅이 새롭게 도약할 수 있는 결정적인 준비 기간이 되었다. 부서를 통해 목회사역, 예식과 찬양, 교리문답 등에서 그의 지식과 경험이 깊어지고, 그 시대 유럽이 필요로 하는 종교개혁의 최첨단에 서면서 보다 광대한 새로운 기독교 문명을 품게 된다.

과연 누군가 말하듯이, 칼뱅의 제네바에서의 일차사역 (1536-1538)은 원칙만 주장하고 너무 강직하게 추진한 젊은 개혁자에게 실패였던가? 물론 그가 이루고자 한 개혁은 미완성으로 남겨졌지만 미래가 없이 종료된 것은 아니었다. 칼뱅이 부재한 3년 동안(1538-1540) 제네바 시는 개혁파와 베른파 간의 갈등으로 인해 거의 무정부 상태로 추락하고 만다. 칼뱅과 화렐을 대신한 교회 목사들은(Antoine Marcourt, Jean Morand)은 제 역할을 못하고 심지어 1540년 여름 도망치듯이 사라진다. 이런 혼란 정국을 이용하여 카톨릭 추기경 사도레(Sadolet)는 제네바 시민이 개혁주의를 버리고, 로마교회로 되돌아 오라고 선동한다. 하지만 제네바 시민은 칼뱅을 잊지 않고 그에게 구조를 요청한다. 이 와중에서도 오직 그만이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칼뱅은 간교한 천주교 추기경의 선동에 맞서 반박문을 쓰면서, 멀리서나마 제네바 시민을 지원한다. 하지만 제네바로 다시 와달라는 공식요청에, 그는 제네바에서 사역하는 것이 “날마다 천 번 죽어야 하는 십자가의 길”3 임을 고백한다. 그럼에 불구하고, 화렐의 간구와 함께, 제네바에서 제 이차 사역을 마지막 생애까지 감당하게 된다.

제네바 민주주의 기초 확립과 사회경제 변화
제네바 이차 사역을 하면서, 첫 5년간 (1541-1546) 다시 한번 교회를 견고히 세우고, 교육과 목사 양성에 힘을 쓴다. 동시에 법률가로서 그는 1543년 제네바 공화국 헌법의 근간이 되는 법안을 작성한다. 그는 동시에 <아리스토 민주주의>(aristo-démocratique) 방식에 의한 정부 운영을 제시했고, 이는 시정부(le Petit Conseil)가 소위 이백 명의 의원으로 구성되는 시의회(le Conseil des Deux-Cents)를 임명하고, 시의회는 시정부 구성원과 시민대표를 임명하는 일종의 상호적으로 조합을 맞추는 방식으로 정부조직 운영을 제시했다. 이는 봉건주의 중세 특징인 피라미드식 권력집중 족장제도를 획기적으로 바꾼 개념으로, 시민에게 보다 자율권을, 위정자에 책임을 상호적으로 부여하는 민주주의 방식의 정부를 구상한 것이다. 이는 개인의 자유와 그 한계, 남을 돌보는 이타성, 평등의식 등이 함축된 것으로, 위정자 개인의 일탈을 방지하고 사회 전체의 협력을 강조한 일종의 연방정치 개념에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4.

사회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제네바 도시는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칼뱅이 제네바에서 2차 사역하던 1550년, 제네바의 인구는 불과 1만명에서 1만2천명 사이였다. 경제적으로도 불황기를 겪고 있었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사이에 제네바 인구는 급작스럽게 2배로 증가했다. 이는 무엇보다도 핍박을 피해 은신처를 찾는 개혁신자들이 온 유럽에서 몰려 왔기 때문이다. 특히 프랑스 노르망디, 파리, 리용, 프로방스 등지에서 온 위그노들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았고, 그 외에도 이탈리아, 영국, 스코틀랜드, 네덜란드 등 내륙 국가에서뿐만 아니라, 지중해 연안의 베네치아, 카탈로니아, 말트, 크레타 등에서도 사회 각계 각층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제네바로 정착한 것이다. 이들 모두가 칼뱅의 가르침에 이끌려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네바는 거대한 난민 집합소가 되었고, 제한된 공간에서 이들을 수용하기 위해 기존 건물을 2층에서 5-6층으로 증축하거나, 정원 내부에도 건물을 짓는 건축 붐이 일어나게 된다. 초기엔 이런 현상을 곱지 않는 시선으로 본 제네바 시민들은 난민에게 시민권을 허용하는 길을 어렵게 만들었다. 하지만, 칼뱅주의자들이 시정에서 권력을 취하기 시작하면서 정세는 달라진다. 종교자유를 찾아 온 난민에게 시민이 되는 기회가 점차적으로 넓게 허용이 된다. 이로써 제네바는 정치, 경제, 행정, 인쇄기술, 상업, 교육 분야 등에서 최고의 고급인력을 난민을 통해 얻게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된다. 이처럼 종교적 난민에 의한 인재 확보가 없었다면, 제네바 교회나 도시는 활력과 명성을 얻을 만큼 놀라운 발전은 없었을 것이다.

1. F. Puaux, Histoire de la réformation française, 1권, 1859, 130쪽 이하 (출처 : www.info.bible.org, Histoire de la Réfome à Genève)
2. Bernard Roussel, « La voix de Calvin : une parole humaine au service de Dieu », Religions & Histoire, 특별본 no.1,  2009, Ed. Faton, 24쪽.
3. Olivier Fatio, Jean Calvin et la réformation de Genève 1536-1564, musée international de la Réforme, Genève 2009, 7쪽.
4. Armand Lombard, « Calviin et l’émergence démocratique », Jean Calvin La réforme et l’avenir du protestatntisme, 2009, 87쪽.

 

답글 남기기

Previous Next
Close
Test Caption
Test Description goes like this
Social Media Auto Publish Powered By : XYZScript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