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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최초의 남장 여자 교황 조안

[로마칼럼] 한평우 목사, 로마한인교회

 – 여자라는 이유로 –

인생은 결국 길에서 태어나고 길에서 죽는다. 그 길은 참으로 다양하겠지만 말이다. 나는 지금 오랜 역사를 품고 있는 길을 걷고 있다.
콜로세움에서 라테란 성당에 이르는 그 길을 말이다. 이 길을 옛날에는 거룩한 길(Via Sacra)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지금은 Via di San giovanni in Laterano 라는 수수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지만–. 길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데 인간은 이처럼 자신들의 기분에 내키는 대로 가만히 있는 길에 수식어를 붙이기도 하고 떼기도 한다.

이 길은 거리가 약 500-600M 정도 된다. 콜로세움에서부터 시작하는 길은 약 300m지점의 왼편에 유서 깊은 클레멘트 교회가 있다.
그 교회는 지하 3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로마시대의 건축 방법은 기존에 있던 건물 위에 건축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 건축물 중, 지하에 아치형의 작은 신전이 있는데 이곳은 이방신인 미트라(Mitra)를 섬기기 위한 곳이다. 페르시아에서 들어 온 이 신은 기독교가 로마에 들어오기 전부터 존재했다. 콘스탄틴 대제가 밀라노 칙령을 선언하기 전까지는 로마 군인들은 이 미트라를 섬겼다. 여기서 3층으로 내려가면 네로 황제시대에 불탔던 로마시대의 주거지의 흔적을 볼 수 있다.
90년경에 로마의 감독으로 클레멘트가 있는 데 그가 그리스의 감독 클레멘트(동명이인)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그 편지에 베드로를 언급한 내용이 있어 베드로가 로마에 도착하였음을 개혁자들이 인정하게 되었다. 그 클레멘트가 이곳에서 목회하였을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런데 이 자리는 색 다른 사건으로 주목받는 곳이다.
이 역사적 사실을 처음 기록한 사람은 당시 교황청 사사로 일했던 아나스타시우스다. 이곳은 최초 남장 여자 교황 조안이 묻힌 곳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레오 4세를 이어 영국인 조안이 2년 7개월을 교황 직을 수행하던 중 남장여자라는 사실이 발각되어 성난 시민들에 의해 돌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그녀의 연인은 그를 남장을 하여 그리스로 데려 갔다고 한다. 그녀는 아주 탁월하였기에 거기서 다양한 학문을 섭렵했고, 이후 로마로 돌아와서 인문학을 가르쳤고 많은 추종자들을 두게 되었다. 그는 큰 명성을 얻게 되었고, 교황청의 비서를 거쳐 추기경이 되었다.
그 후 만장일치로 교황에 선출될 수 있었다. 그 만큼 탁월한 지식과 존경 받는 인품을 지닌 사람이었다. 안타까운 것은 그녀가 남장 여자라는 점이었다.
아마도 본인은 이래서는 안 되는데, 자신의 정체성을 밝혀야 하는데 하는, 양심의 가책을 받았겠지만 권력의 달콤함으로 인해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런 자리까지 온 게 아닐까 생각한다. 항상 유혹에 빠져드는 심리는 손 떼어야지, 하면서도 그 달콤함에 빠져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빠져나올 수 없는 정황에 이르는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녀는 교황에 오르게 되었고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위치가 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호칭조차도 최상급을 사용하는 자리가 아닌가! 그렇게 꿈같은 몇 년이 지나갔다. 그는 잠을 자면서도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하면서 자신의 허벅지를 꼬집어보았을 터!
구라파의 모든 왕들이 속으로는 어떨는지 모르나 겉으로는 높이고 존경하는 자리이니 심장이 작은 아녀자가 그 자리를 지키기란 결코 쉽지 않았을 터다. 그런데 그녀는 그만 동료 수사에 의해 임신을 하고 말았다. 그 당시 교황들에게 이런 일은 비일비재했다. 어느 교황은 많은 정부를 두었고 거기서 낳은 십대 자녀들에게 추기경의 자리를 제수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녀는 부활절의 큰 행사를 주관해야 했다. 그 행사는 예식을 마치고 베드로 성당에서 출발하여 콜로세움을 거쳐 라테란 성당으로 가는 먼 길이다. 그 화려한 행렬에는 많은 추기경과 주교들, 수도원장 및 신부들, 그리고 시민들이 함께하는 크고 화려한 행렬이었다. 연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이 거룩한 행렬을 구경하고 있었다. 많은 시민들은 교황을 향해 손을 흔들고 교황은 그들을 향해 강복의 성호를 긋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교황에게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갑자기 찾아온 출산을 위한 진통이었다(살전5;3). 조안 교황은 출산 일자를 몰랐거나 잘못 집었던 것이다.
달을 채운 아기가 세상으로 나오려고 발버둥치는 데 체면이나 부끄러움을 차릴 게재가 아니었다. 산모는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있기 때문이다. 교황이라는 권위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그녀는 길거리에서 아이를 출산하고 말았다. 세상에 이런 일이 또 있을 까? 그 지엄한 교황청에서는 천지가 개벽하는 사건이었다. 당시 교황들이 축첩하고 아이를 낳는 일은 비일비재하였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풍조였다. 그러나 교황이 여자였고, 이제까지 근엄한 교황청 관계자들을 속였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하나같이 분노했다.
나는 생각해 보았다. 그 교황이 아이를 출산할 때 누가 도와주었을 까?  출산의 경험이 전무 한 주변의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바로 내가 걷는 이 길 어디에서 역사적 사건으로 일어난 일이었으니 말이다. 여자 교황이 아기를 안고 있는 형상이 이 길가에 15세기까지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1510년경에 말틴 루터는 로마를 방문 중이었는데 이런 석상이 사람들이 다니는 길에  세워둔 것에 크게 놀랐다고 했다. 또한 석상은 교황의 망토를 입고 아기와 홀을 들고 있는 조안 교황의 형상이었다고 한다. 그 후 교황 식스토 4세에 의해 제거되었다고 한다.
이 사실에 대해 1414-15년 종교 회의가 콘스탄츠에서 열렸는데 개혁자 얀 후스는 조안 교황을 예로 들어 교회를 통렬하게 비난하였으나 당시 참석했던 종교 지도자들 중 누구한 사람  반박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이었기 때문에—
이런 경험을 겪게 된 교황청은 이전에 신경 쓰지 않았던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특이한 의자를 만들게 했는데, 그는 조안 교황의 후임자 베네딕트 3세였다. 그가 고안한 의자는 바닥에 커다란 구멍을 뚫은 이상한 의자이었다. 젊은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될 사람의 성별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교황 선출 시에 선정된 사람은 이 의자에 앉아 성별을 먼저 검증 받아야 했다. 이 의자에 앉으면 하위 성직자 중 한사람이 의자 밑으로 손을 넣어 남자의 고환을 만져본 후에 큰 소리로 외친다고 한다.“그에게 고환이 달려있습니다”그러면 모든 성직자들이 주여, 찬미 받으소서라고 화답하고 교황선출을 기쁨으로 진행했다.
나는 이 의자를 보기 위해 라테란 성당으로 찾아갔다. 사전을 찾아보니 진품이 세 개가 있는 데 하나는 불란서의 루불 박물관에, 그리고 또 하나는 바티칸 박물관, 즉 gabinetto delle maschere 방에, 그리고 또 하나가 라테란 성당 정원(Il Chiostreo)에 있다고 한다. 그래서 성당을 관리하는 나이 지긋한 분에게 물어보니 친절하게 정원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여 주었다. 그런데 그곳에는 입장료가 있었다.  그 의자 이름을 La sedia Stercoradia 라고 한다.
그 의자는 화려한 돌로 되어있었다. 의자 바닥에 구멍에 뚫어져 있는 데, 구멍 부분이 깨어져나갔기 때문에 인터넷에 올라와있는 나무의자의 모습은 아니었다. 나무 의자는 가운데 구멍이 뚫어져 있는데 말이다. 그 의자 앞에서 사진을 찍고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만일 그 순간에 아이를 낳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 까? 오히려 가톨릭이 더욱 정화되지 않을 까 싶어진다. 그 이후 교황의 역사는 물론 훌륭한 분도 있었지만 많은 분들이 탐욕과 음란으로 세상 사람들보다 나을 것이 없는 길을 걸어갔으니 말이다. 뛰어난 여인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더욱 정화되지 않았을 까 싶다.
조안 교황! 하필 그 장엄한 축제의 퍼레이드에서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역사는 그를 훌륭한 지도자로 기록하였을지도 모르는데—여자라는 이름, 그 이름은 역사와 더불어 수많은 차별을 받아야하는 서러운 이름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인다.
*참고-교황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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