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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해 가야할 푯대는 교회다

[유크시론 183호]  이창배 발행인


새해 2017년을 맞으며


문밖에만 나서도 바로 세상이다. 이 세상은 요란하기 그지없이 폭죽을 높이 공중으로 쏘아올리며 새해맞이를 즐기는 그 시간, 조촐해 보일 정도로 예배당에 모인 성도들과 함께 송구영신 예배를 밤 12시, 자정에 맞춰 시작했다. 그런데 자정이 채 되기 전, 고작 몇 분을 참아내지 못한 어떤 이에 의해 시작이 되었는지, 마치 신호라도 된 듯이 연속 폭죽 터지는 소리가 예배당 안을 굉음으로 뒤덮어 버릴 듯 요란하다. 창문을 셔터로 두텁게 내려막아도 어쩔 수 없는 폭음 소리. 게다가 화약냄새까지도 예배당 안으로 스며든다.

사실 문 하나 열고닫는 차이지만 그 안과 밖의 구분은 실로 엄중하지 않는가? 밖에는 그야말로 세상이다. 지극히 세상적인 방법으로 한해를 보내고 맞는 이벤트 퍼포먼스를 하고, 안에선 새로운 해, 금쪽같이 귀한 첫 시간, 그 분초를 다투어 하나님을 예배하겠다는 성도들의 다짐과 결단이 가득 차 있다. 그렇다. 세상을 전부 집어삼킬 것만 같은 천지를 진동하는 폭죽소리와 온갖 화려함의 극치를 하늘에 펼쳐대는 불꽃놀이의 유혹에도 추호도 흐트러짐이 없는 예배자들에게 한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그렇게 진심이 예배당을 가득 채우자 오히려 요란한 축포소리는 이 예배를 돕는 음향이라도 된 듯 초점을 잃고 점점 작아지는 것 같더니만 어느덧 관심 밖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렇게 세상과는 극명하게 구별이 된 가운데, 아마도 이 땅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자녀들, 모든 지체된 교회들과 함께 우리는 새해 첫 시간을 예배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으리라.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이 이렇게 새해를 맞이하는게 뭐 그리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게 맞으련만 그렇게 해마다 새해 첫 시간을 맞이하는 일이야말로 무언가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없는 큰 기쁨이 아니던가.

이제, 새해 2017년 1월 1일 첫 주일이다. 이미 지나간 2016년은 뒤로 잊고, 새로이 맞이한 시간 속에서 한 해를 경주해 가야 할 푯대는 역시 교회이다. 주일 아침, 간 밤에 내린 무서리로 온통 사방이 하얀세상이 됐다. 겨울 들어 처음 보게되는 서리꽃으로 온통 하얗게 덮어버린 세상, 왜 그리 나무와 숲이 아름답던지 교회로 향하는 시간 내내 경이로운 세상을 보는 즐거움에 한껏 마음이 고무 되질 않는가. 올해에는 무언가 좋은 일들이 예비 됐으런가?

특별히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이 어떤 의미로 와닿는 것일까? 그것은 희미해져가는 루터 종교개혁의 모토였던 ‘오직 성경으로’,‘오직 은혜로’,‘오직 믿음으로’,‘만인 제사장직’ 등 그 본질을 오늘날에 다시 회복해 보자는 데 있다. 그런데 어쩌면 너무 많이 지나쳐 왔는 것이 아닐지 걱정스럽다.

푯대를 향하여 달려 가노라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2-14).

바울 사도의 고백처럼 우리의 목표, 우리의 푯대는 하나님이 부르신 부름이다. 곧 그리스도를 더 알고, 더 닮고, 그리스도로 인해 살고,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려 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이고, 우리의 푯대이다. 이 목표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그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에게 붙잡힌바 되었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이 목표를 향해 달려갈 수 있도록 돕고 계시는 분이 성령이시다.

오늘이라는 시간 가운데 이전까지 내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헤아려보고, 그것으로 흐뭇해하고, 만족할만한, 누군가에게 자랑할만한 여유, 그럴만한 여유라는 것을 먼발치로 부러워해본 적은 있겠으나, 현실적으로는 사실 부끄러운 것이 더 많은 게 사실이다. 아니 지나온 자리마다 후회를 남겼고, 못난 모습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머뭇거리고, 주저주저할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는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신다. 그리고 아직 다다르지 못한 그 푯대를 바라보게 하신다.

『주는 나의 피난처』(The Hiding Place)라는 책으로, 또 영화로 만들어져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준 코리 텐 붐 여사는 그 영화 마지막에서 이렇게 말한다:“우리가 수를 놓을 때 그 뒷판은 엉클어져 있습니다. 우리들이 고난을 받을 때에 우리의 삶은 엉클어져 있는 것 같고, 하나님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수의 앞면을 보면 아름다운 장미꽃이 만들어져 가고 있는 것처럼, 엉클어진 고난받는 우리 인생을 통해서 하나님은 역사 하시면서 아름다운 장미꽃을 만들어 가고 계십니다.”「고난 중에도 기뻐하라」(홍성철 저) 중에서 (pp.273-275).

루터 종교개혁 500주년의 의미
이제 올해는 “루터 종교개혁 500주년”이 된다. 오늘날에도 루터의 종교개혁은 두 가지 핵심가치를 놓치지 않는다. 하나는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는 늘 새롭게 개혁 되어야 한다는 정신이다. 또한 세계의 개신교 교회가 “루터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고자 하는 그 이유 또한 새로운 부흥과 회개, 갱신과 회복의 모토를 되살려서 오늘날 변질된 신앙과 교회로부터 성경이 가르치는 본래적 기독교 가치로의 회복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특별히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이 어떤 의미로 와닿는 것일까? 그것은 희미해져가는 루터 종교개혁의 모토였던‘오직 성경으로’,‘오직 은혜로’,‘오직 믿음으로’,‘만인 제사장직’등 그 본질을 오늘날에 다시 회복해 보자는 데 있다. 그런데 어쩌면 너무 많이 지나쳐 왔는 것이 아닐지 걱정스럽다.

아니면, 아는 이들에게는 그 필요성이 넘쳐나는데, 애써 무관심해 하는 이들, ‘너나 잘 해~’ 하며 그 과실을 떠넘기려는 이기적인 그리스도인들로 넘쳐나는 우리의 현실 장벽을 그대로 놔둔 채 기념행사로, 그저 스쳐가는 겉치례로 끝나고 마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문제가 아닌 것은 없다. 개혁정신에 대해서 언제는 교회가 침묵하고 가만이 있었던 적도 없다. 요는 그럴만한 실천이 따르지 않았던 것 뿐이다.

그렇지 않는가? 개혁을 몰라서가 아니라, 실천동력이 없는 게 문제였다. 그러니 이 시대 정말로 필요한 것은 500년 전의 루터가 아니라 이 시대의 루터이다. 제 2, 제 3의 루터가 오늘에 나와야 하지 않을까? 그가 누구이던지 하나님 말씀을 붙들고 루터 처럼 이 시대의 교회가 물량주의와 교권주의, 형식주의와 탈사회적인 이기주의에 빠져 교회본연의 본질에서 크게 일탈된 모습에 분연히 떨며 일어나야 하질 않겠는가이다. 로마서 8:29절,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목적이 여기에 있다.  그 구원이 내게서 목표를 잃은 바 된 것은 아닌지 이제 우리 자신을 점검해 보자. <발행인 이창배 목사/ editor@ekcnews.com>

이달의 말씀 ㅣ 빌립보서 3: 13-14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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