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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와 독일 농민운동

[루터&종교개혁] 김현배 목사/ 베를린 비전교회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8)

루터의 독일어 성경 번역의 결과는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우선 종교개혁에 강력한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흠정역 성경이 영국에 미친 것과 버금갈 정도로 독일어와 독일 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성경은 독일 기독교인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독일 문학사와 언어학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루터사상에 영향 받은 독일 농민

빈곤의 시대인 16세기에서 농민들은 오랫동안 세속적인 권세자들에 의해 노예로서 착취를 당한 삶을 살아왔다. 농민들은 이해할 수 없는 과세 부담과 점차 증가하는 물가 상승, 소득의 감소, 자신들의 법적 신분이 불확실했다. 또한 농민들은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고 노동하는 짐승과 같았으며, 큰 보상도 없이 죽도록 일을 했다. 주일에도 혹독하게 일을 해야 했다. 농민들은 점점 더 자유를 상실하였다. 이러한 일들로 인해 그들에게는 엄청난 불만 쌓이고, 원한과 불만이 깊이 뿌리 박혀 있었다. 이러한 때에 농민들은 루터의 사상을 접하게 된다.

특별히 루터의 종교개혁 정신이 잘 드러나 있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라는 작은 팜플렛이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 책에서 루터는 그리스도인은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 자유인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하는 종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농민들의 의식을 일깨워 준 사상은 루터의 ‘만인제사장 교리’이다. 루터는 하나님 앞에서는 교황이나 사제, 왕, 귀족, 농부 등 모든 그리스도인은 차별적인 모든 조건과 무관하게 하나님의 제사장이 되었다고 말한다. 또한 사제와 평신도라는 계급적 차별을 철폐하였고, 성직과 세상에서 직업의 구분도 부정했다. 이러한 루터의 설교를 들으면서 농민들의 의식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좀처럼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가톨릭교회가 개혁되어 가는 모습을 보았다. 사회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루터로 인해 농민들은 새로운 사회개혁 의지로 가득했다.
농민들은 혁명을 요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올바르고 근원적인 12개 항목의 요구사항을 발표했다. 그 핵심 내용은 과중한 세금제도 폐지, 농노제도 폐지, 사냥권과 어업권 허용, 산림과 목초지에 대한 공동소유권 허용, 강제 노동 제한, 과중한 부역 피함, 노동에 정당한 대가 지불, 사형제도 폐지, 불법 토지 반환, 사망세 폐지 등이다. 또한 그들은 교회개혁도 원했다. 즉 교회에서 직접 자신들이 성직자를 선임하고 해임할 수 있는 권리를 달라고 하였다. 이상 12개 조항은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군주들이나 영주들은 농민들의 요구사항을 거부하였다. 농민들도 자신들의 입장만 고수했다. 결국 그동안 눌려 살아왔던 농민들과 군주들 사이의 무장 충돌로 이어졌다.
1523년 비텐베르크에서 일어난 칼 슈타트의 급진적인 종교개혁 운동은 훗날 독일 전역을 유혈 사태로 몰아넣은 서곡이었다. 1524년 5월, 독일 남부 튀링겐의 ‘검은 숲’(Black Forest)에서 서민들이 불공평한 봉건적인 제도에 항거하여 궐기하였다. 이것이 독일을 휩쓴 농민전쟁이었다. 이것은 전쟁이 아니라 반란이자 폭동이었다.

농민운동을 부추긴 토마스 뮌처

농민들은 마르틴 루터를 정신적 지도자로 따랐다. 그러나 농민운동의 지도자로 나선 인물은 루터가 아니고 토마스 뮌처(Thomas Müntzer, 1489-1525)였다. 뮌처는 1518년 라이프치히 대학을 다닐 때 루터의 글을 접하게 되면서 루터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신비주의와 급진주의를 두루 겸비한 인물이었다. 뮌처는 독일 종교개혁 신학자요 농민전쟁을 이끈 사회혁명가다. 뮌처는 광신적 신비주의를 혁명을 위한 신학적 기초로 사용한 것이다. 그가 꿈꾸는 천년왕국은 성직자나 귀족, 평민, 농부 등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사는 그런 사회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가 속히 임하게 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악한 세력과 무기를 들고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격한 신비주의에 빠진 뮌처는 농민들에게 권력자들을 동정하지 말고 칼로 진멸하라고 하면서 농민봉기를 부추겼다. 슈바벤, 튀빙겐, 뮐하우젠 등 여러 도시에서 일어난 농민반란은 과격한 뮌처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다. 뮌처가 이끄는 농민운동은 필연적으로 피를 흘리며 폭력화할 수밖에 없었다. 곳곳에서 살인과 약탈이 자행되면서 농민봉기는 시간이 흐를수록 과격해지고 폭력화 되어갔다. 민란은 점차 독일 남서부와 중부 등 전역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폭도들은 귀족들의 성과 주교들의 궁전을 파괴하고, 수많은 수도원들과 도서관들에 불을 질렀다. 또한 귀족들과 지주들과 성직자들을 고문하고 죽이기도 하였다. 제후들과 귀족들이 농민들에게 굴복하면서 민란이 성공을 거두었다. 급진적인 개혁의 길을 걸어간 뮌처는 농민들이 권력자들과 맞서 싸운 농민반란을 성경에 비추어 정당한 행동으로 보았다. 그러나 루터는 그러한 폭동을 하나님이 세우신 사회 구조에 맞선 반란이라고 주장했다. 루터는 교회 개혁은 폭력에 의한 혁명이 아니라는 것을 항상 강조했다. 이처럼 과격한 뮌처를 향해 루터는 이단과 분열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맹비난했고, 뮌처가 농민전쟁의 책임을 져야 할 인물이라고 말했다

농민폭동에 반대하는 루터- “손에 있는 무기를 버리고 농토로 돌아가라”

루터는 복음 전파에 방해가 될 뿐이기 때문에 반란이나 폭동을 원하지 않았다. 복음에는 그 어떤 경우에도 우리에게 폭동을 일으킬 권리를 허용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루터는 그리스도께서 검을 사용하시지 않고 십자가를 지셨던 것처럼 그리스도인이란 자신들을 위해 칼과 총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고난과 함께 싸우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루터는 농민들의 고통을 알고 있었지만 폭력을 사용한 농민들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루터는 갈수록 농민운동이 폭도로 변하고 폭력화가 심해지자 농민봉기에 대해 시종일관 강도 높게 반대했다. 농민폭도에 대한 루터의 입장은 단호했다. 루터는 농민들을 향해서 혁명이 그릇된 방법이라고 경고했다. 또한 루터는 설교를 통해 하나님께서 통치자들에게 주신 권위를 강조하였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롬 13:1). 이 말씀처럼 루터는 농민들에게 통치 권력에 복종할 의무가 있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루터는 폭력과 폭동은 자제해 달라고 부탁하면서 이제는 손에서 무기를 버리고 농토로 다시 돌아가라고 했다. 그러나 광란하는 폭동 속에 있는 농민들의 귀에 루터의 메시지는 들리지 않았다. 계속하여 피를 흘리는 농민전쟁은 독일을 어두움으로 덮어 버렸다. 불꽃처럼 타오르는 종교개혁의 순수한 빛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이때 루터는 농민들이 복음을 구실로 마귀의 일을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루터의 어조는 강경했고 대단히 날카로웠다. 루터는 폭도들과는 대화할 필요가 없고 다만 무기와 칼만 필요할 뿐이라고 말했다. 농민들을 미친개로 여긴 루터는 위정자들에게 말했다. 할 수 있거든 폭력적인 범죄자들을 때리고, 칼로 찌르고, 목을 비틀라고 당부했다. 루터는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질서가 위협 당한다고 보았고 사회적 혼란이 복음이라는 가면을 쓰고 발전하고 있다고 보았다. 루터는 영주들에게 지금은 자비를 베풀 시간이 아니라 칼의 시간이요 진노의 시간이라고 말하면서 급히 행동을 취할 것을 말했다.

농민들의 폭동을 진압하다

당국자들은 루터가 말한 대로 조치했다. 통치자들에 의한 농민들의 진압은 무자비하게 끔직했다. 그들을 대량으로 학살함으로써 폭동은 빠르게 진압되었다. 잔혹한 패배와 함께 농민봉기의 불꽃이 점차 사그라졌다. 여러 영주들의 군대가 뮌처의 군인들을 철저하게 짓밟았다. 1525년 5월 농민들은 통치자들에 의해 프랑켄하우젠(Frankenhausen)에서 완전히 진압되었다. 진압 과정에서 수천 명의 농민들이 들판과 거리에서 쓰러져 목숨을 읽었다. 수백 명이 참수를 당했고, 이때 폭동 주동자인 토마스 뮌처도 잡혀서 잔인하게 처형당했다. 약 10만에서 15만 여명의 농민들이 생명을 잃었다. 수 천 개의 수도원과 성채가 파괴되었고, 수 백 개의 마을들이 잿더미가 되었다. 전 지역이 황무지로 변했다. 농민봉기는 진압되었지만 결국 엄청난 피를 흘렸다.
농민전쟁이 끝난 후 독일은 너무나 비참했다. 루터는 농민들의 고통을 초래한 사회의 부조리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교회개혁은 폭력에 의한 혁명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강조했다. 독일 농민운동이 끝나면서 종교개혁의 파괴적 경향이 끝났다. 이는 끔찍한 일이었지만 루터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 즉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리라”(마 26:52) 말씀의 성취라고 주장했다. 농민전쟁이 종교개혁에 깊은 충격을 주기는 했다. 하지만 낡은 교회의 잔해 위에 새로운 교회를 세우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시민 질서뿐 만 아니라 교회 질서도 새롭게 확립되어 갔다. 농민들의 지지를 잃어버린 루터는 많은 오해와 손실을 떠안게 되었다.  
루터에 대한 기대가 컸던 만큼 농민들의 실망 또한 컸다. 농민들은 자신들을 지지해 주지 않는 루터에게 강하게 반발했다. 루터를 무자비한 농민반란 진압의 동조자요 배신자로 매도했다. 어떤 사람은 루터를 권력자 편에 선 배신자라고 보았다. 세속적인 국가 권위를 의존하는 개혁자라는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농민 봉기 사건은 루터의 종교개혁에 큰 장애를 주었다. 하지만 루터는 폭력으로 도를 넘어버린 농민들보다는 제후들과 협력하면서 종교개혁을 계속 추진할 수 있었다. 농민운동이 루터에게 큰 시련을 안겨 주었다.
루터의 국가관인 ‘두 왕국론’은 농민들이 흘린 피와 무관할 수 없게 되었다. 루터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은 두 왕국, 즉 이 세상의 왕국과 그리스도의 왕국에 살아간다. 세상 왕국에서 통치자들은 하나님의 권위에 의해 주어진 검을 갖고 있다. 이것이 두 왕국이 존재하는 방식이다. 농민전쟁과 루터의 두 왕국론에 대한 연구와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결국 루터는 농민들의 지지를 많이 잃었다. 가톨릭과 일부 영주들은 루터의 종교개혁이 농민들의 반란을 선동한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루터는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당하는 어려운 입장에 처했다. 루터는 농민과 귀족들 모두에게 미움과 비난을 받았지만 그는 흔들림 없이 자신의 주어진 종교개혁의 길을 묵묵히 걸어갔다. 루터의 신앙은 오늘 세상과 쉽게 타협해 버리고 반대파들의 끈질김에 쉽게 하나님의 일을 포기해 버리는 현대 그리스도인들과 지도자들에게 많은 도전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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