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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게인 복음의 계절, 기지개를 펴라

[유크시론 185호]  이창배 발행인


삼일절, 그때를 다시 기억하라


3월이다. 생명 약동이 없는 우중충한 겨울 분위기에 생명의 빛을 불어넣어줄 전령의 이름처럼 마냥 반가운 이름이다. 3월을 뜻하는 영어 March는 로마신화의‘군신 마르스(Mars)의 달’을 뜻한다. 옛 로마시대에 봄은 곧 전쟁의 시작을 알렸다 한다. 그래서 동사 march는 행진하다, 진군하다 등을 뜻한다. 이를 의미적으로 해석을 해보면 3월은 군신 마르스와 그의 군대가 동(冬)장군을 쳐부수고자 진군을 시작하는 달이다. 세상을 회색빛 무채색으로 뒤덮어 온통 침묵과 무거운 고뇌로 짐지어준 점령군 겨울세력에 대한 전쟁의 선포와 시작 그리고 마침내 해방, 이 얼마나 멋진 표현인지, 해학이 넘쳐나는 이 표현이 참 마음에 와닿는다.

신록이 푸르러지기 시작할 3월이 좋다. 자연계를 뒤덮었고 두른 빛깔, 그 칙칙함을 벗겨내어버릴 생명의 싹을 틔우게 된다. 이제 완전히 새로워질 세상은 초록  생명의 옷을 입고, 기쁨의 환한 꽃을 피우게 된다. 이 아니 기쁘지 아니한가. 그래서 봄은 아름답다. 시편 139:11에는 두고두고 묵상하고 또 묵상해도 언제나 소망이 되는 말씀이 있다.“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아마도 기자는 지금 칠흙같이 어두운 흑암 속에 처해 있듯이 곤경 가운데 있을 것이다. 마치 한 겨울을 맞이한 만물처럼. 봄의 꿈틀대는 기운을 가차없이 막아버리는 것 같은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해도 결코 봄의 약동하는 생명을 막을 수 없다.

지금 창밖의 나무 한 그루를 보라. 어느새 매말랐던 가지 끝에 싹을 틔울 봉긋한 싹눈들이 움터오르지 않던가. 곧 터지고 말 듯 새싹들이 여기저기 온통 나무가지를 빼곡히 채우고 있지 않던가. 이 놀라운 자연의 경이로움을 보면서 곧, 소망이 하나님에게 있음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 깊은 밤 그 암흑 속에서도 하나님께로부터 숨을 수는 없다. 모든 것을 감찰하는 하나님의 눈이 그들을 바라보지 않는 밤에 극악한 일을 자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밤은 사람들로부터 그들을 숨길 수는 있지만 하나님께는 숨길 수 없다. 이것이 진리이다. 그렇듯 반드시 새싹은 나고만다.

권위주의적이고 한계를 무시한 권력지향을 탐하는 종교의 타락에 표출된 민심의 이반이 그 주된 동기부여가 됐으리란 점 또한 자명해진다. 이제 우리의 차례이다. 우리의 모습은 또 어떤가? 루터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면서,

아군인가, 적군인가?
이 세상은 지금 거짓과 진리의 싸움 한복판에 있다. 곧 하나님의 진리를 거스르는 세력과 불의를 향해 타협과 굴종이냐 아니면 항거하느냐의 갈림길에 놓여있다. 여기에 회색지대는 없다.

최근 열리고 있는 청년집회에 참석을 했다.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생각보다 집회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열기와 열정이 식었고, 한결 움츠려든 느낌이 강했다. 물론 예년에 비해 대폭 축소된 참석인원 탓일 수 있겠다 싶다. 하지만 매년 지속적으로 감소되는 참석자 수가 앞으로 얼마나 더 떨어질 지 섣불리 예측하기 어려운 가운데 앞으로 나아질 전망 또한 어둡기 때문이다. 총체적으로 집회 동원의 위기상황이자 한계점에 이르렀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이러한 사태가 닥칠 것을 사실 예견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수년 전부터 계속 이런 조짐은 나타났고, 이에 대처해야 한다는 의견들도 개진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현상을 타개해 갈 방안이 뚜렷이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인지 피로도가 쌓여지고, 무기력감이 어깨를 짖누르고, 한결같이 표정이 어둡고 무거운 것이 아닐까 싶다.

과연 복음이 힘을 잃은 것인가? 생명을 약동시킬 복음의 계절이 길고 길어지는 회색빛 겨울에 그대로 둘러싸인 채 얼어붙고만 것인가? 지금 계절의 눈금은 완연한 봄을 가리키는데, 복음은 겨울철이 아직도 한참인 것인가? 아니다. 깨어나야 한다. 기지개를 펴야한다. 이대로 잠들어 갈 순 없다.

에베소서 6:12절에서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말씀한다. 오늘날은 아군과 적군의 구별이 모호해진 세상이다. 그러나 단적으로 말하자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길은 지피지기(知彼知己) 뿐이다.

인용인가, 기각인가?
3월은 또 3.1운동(1919)으로 각인되어진다. 지금은 기독교 인구가 25%가 넘는다고 하는데 당시엔 기독교 인구가 고작 전 국민의 1.5%밖에 안되었던 때이다. 당시 전국적으로 만세 운동이 314곳에서 일어났는데 그 중 68%를 기독교가 주도했다한다. 민족대표 33명 중 16명이 목사와 장로였다. 3.1운동 여파로 많은 사람이 감옥에 갇혔는데 종교인들 가운데 80%가 기독교인이었고, 무종교인까지 포함할 때 전체의 47%가 기독교인이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결국 기독교인들은 고난과 형벌을 결코 두려워 하거나 기피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3.1운동이 기독교 신앙과 민족적 양심의 결합에서 나왔다고 할 때 기독교인의 민족의식의 성격은, 기독교 신앙이 정의·자유·평화에 기반한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확대에 둘 수 있다면, 민족적 양심은 자주·평등·해방을 목표로 한 독립국가·민족자주의 건설에 있었다. 이 두 가지가 결합되는 접점에 3.1운동에 참여한 한국 기독교인들의 ‘민족주의 신앙’이 서 있다.”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7호 / 이만열(숙명여대 교수)>

비교가 되지 않는가? 오늘 날 우리 기독교인들이 살아가는 신앙적 가치는 과연 무엇인가? 교회는 어떻게 이 시대 양심을 대변하고 있는가이다. 진정 기독교 리더십이랄 수 있는 목회자들은 어떤 바로미터를 가지고 우리 시대를 보는 것일까?  정말로 궁금한 점은 기독교인들 그 가운데 특히 목회자들이 왜 포퓰리즘에 영합되고 있는가이다.

아마도 3월에는 대통령 탄핵사태의 결과가 도출될 것이다. 지금 서서이 그 바닥이 드러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면서 이제껏 국민의 눈을 가렸던 언론보도의 거짓과 비진실, 선동적이고 편향적인 무분별한 행태가 어디로부터 시작이 되었는지 그 원점 또한 낱낱이 그 포장된 겁데기들과 함께 벗겨지고 있다. 조만간 그 민낯이 다 드러나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바라건데, 정치적인 옳고 그름, 법의 원칙과 형평의 문제가 아닌 진정한 교회로, 이 나라와 민족 위에 부름을 받은 목회자로 그 소명에 바로 서자는 것이다. 모든 결과는 공의로 통치하시는 하나님께 달려있음이다. 곧, 교회가 어떤 중심을 잡느냐에 따라서 복음의 계절이 다시 올 것인지, 깨어날 지 거기에 달려있다. 세상은 더 이상 흐리멍텅한 영적 리더십을 원하지 않는다. 이것을 알자.

이달의 말씀 ㅣ 벧전2:16-17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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