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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욘드 종교개혁 500주년과 한인디아스포라

[유크시론 188호]  이창배 발행인


유럽 목회자 컨퍼런스 개회설교에 부쳐서


비욘드 2017년, 루터 종교개혁 500주년을 넘어가야할 방향을 우리들은 찾아야 한다. 우리를 디아스포라로 불러주신 그 부르심 안에서, 우리들이 케노시스의 역설적 진리를 되새김 없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설 수 있을까? <한 사람, 단독자>로 하나님 앞에 서 도도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아니 바꿀 수 없다할지라도 이에 맞서는 한 사람 루터가 되어야 하겠단 각오가 새롭다.

지난 5월 29일부터 6월 2일까지 열린 유럽 한인디아스포라 목회자 컨퍼런스는 “나를 비우고, 또 비워내고, 비워진 내 영혼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으로 채워져서, 충만한 기쁨의 생수가 터져나오는 케노시스의 역설”을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로 그 한사람을 통해 세상에 드러내는 선포로 그 막을 올렸다.

한인 디아스포라 목회자를 향하신 하나님의 작정적인 뜻은 무엇인가? 이사야 46:10-11절, 말씀 후반부에서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내가 말하였은즉 정녕 이룰 것이요 경영하였은즉 정녕 행하리라’ 고 하신다. 적용해 본다면, 이 세상의 나라들은 모두 멸망 하겠지만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구원을 받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을 누리며 사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상의 나라는 지금은 번성한다 해도 언젠가 모두 망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망하지 않는 한 나라를 세우기로 계획하셨는데 그 나라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다.

예수님께서 하신 첫 번째 메시지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느니라’는 선포였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하고 부패한 인류 가운데서 택한 한 사람을 부르시고, 그 후손들을 죄악에서 건져내고, 구원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처럼 조그맣게 시작되었지만, 점점 성장하여 완성된 나라가 될 것이다.
죽는 그날까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살았던 바울이 “내 인생이 마치는 날, 나는 천국에서 하나님께서 내게 씌워주실 의의 면류관을 기다리노라”하며 소망을 품고 산 나라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을 분별하여 그 목적을 자기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사는 사람을 일컬어 ‘하나님의 사람’이라 한다.

그렇다. 우리들 한인 디아스포라 목회자의 꿈이 있다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며, 하나님의 사람을 만들어 세워나가는 사명을 아름답게 감당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사명을 자각하고 또 감당해 갈 것인가? 특히 유럽 땅에 부름을 받은 디아스포라 목회자인 우리들은 무엇을 직시해야 할 것인가이다.

Here and Now?
500년 전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으로 발생한 신,구교 간의 피흘리는 30년 전쟁, 그리고 루터종교개혁 500년 세월이 흐르며, 그 안에서 일어난 크고작은 전쟁들, 세계 1, 2차 대전까지 거의 1억명에 가까운 인명이 살상된 비참한 역사는 결국에 증오와 갈등, 미움과 분노를 잉태시켰다. 바로 우리들은 이 역사 현장인 유럽땅에서 사역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전쟁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평화에 대한 갈망을 가진 유럽땅 이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고, 보듬고 감싸 안을 케노시스 사랑, 곧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하신 말씀에 우리가 먼저 귀를 기울여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후세대에 속하는 유럽 사람들은, 특히 젊은이들은,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나라와 민족으로 나누어져 서로 편을 갈라 싸운 전쟁을 통해 사람이 사람을 무참하게 죽여야 했던 비극적인 고통의 현상학을 풀어내기 위해 실존주의 철학에 흠뻑 빠진 경험을 해왔다. 마치 홍수처럼 휩쓸고 지나간 땅 처럼 유럽은 온통 신은 죽었다고 외치는 니체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에 대한 회의와 무신론으로 마치 퇴적층으로 덮인 진흙더미 처럼 얼마나 두텁게 쌓였는지 모른다. 불행하게도 이를 설명해 줄 수 있는 신학도 철학도 그 어떤 해답도 없었다. 오늘 유럽이 급속도로 세속화 되고, 무신론이 주류가 되는 이 현상 가운데 교회들은 그대로 방치가 되어버린 채로, 무기력하게 영적 리더십의 자리를 몽땅 잃어버리고, 외로운 섬처럼 떠있게 되고 말았다. 과연 희망은 있는가?

그러나 감사하게도, 이 척박한 땅, 복음이 황폐한 땅을 소생시킬만한 새롭게 주목 받는 사상이 떠오르고 있다는데 그것이 바로 네덜란드의 철학자이자 목회자인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이다. 많은 사람들은 키에르케고르를 철학자로 분류하지만 실제로 그는 목회자였다. 덴마크 국가교회에 대해서 날카로운 비판의 칼날을 세웠지만 그가 주장한 “코람데오, 하나님 앞에 단독자”라는 절정의 사고를 도출한 글, “공포와 전율” 이 최근 유럽에서 새롭게 재조명을 받으며 “고통의 현상학을 풀어내는 실마리”로 떠오른단 소식이다.

단독자 單獨者
42세의 비교적 짧은 나이로 인생을 마친 그가 오늘날 우리에게 이렇게 도전했다. “군중을 위한 교회인가? 한 사람, 하나님의 사람을 위한 교회인가?”
키에르케고르의 깊은 성찰과 철학적 사고는 여기에서 시작되고 있다. “기독교가 과연 나의 진리인가? 세상이 무너진다고 해도 나의 두 손에 굳게잡고 놓치지 않을 그 진리인가? 그 진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라면서 <누구든지 이 앞에 서게되는 순간부터 그는 단독자가 되어야 한다> 고 외친다. “공포와 전율” 이라는 글은 사실은 키에르케고르의 설교이다. 여기에서 모리아 산을 향해 오른 아브라함과 그의 독자 이삭의 갈등을 해석하면서, “아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아버지에 대한 지극한 사랑 가운데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 현기증 나는 자유, 그 선택의 갈림길에서 나는 과연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키에르케고르의 질문은 동시에 <사람이냐, 하나님이냐? 윤리인가? 신앙인가? 하는 이 갈등 속에서 하나님을 선택하고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보편성을 뛰어넘어 가는 길이고, 그것이 신앙이다> 라고 강하게 주장한다.

우리들은 지금 이 유럽땅에서 어떤 위치에 서 있는가? 세상을 등지고 오직 하나님 만을 바라보는 단독자로 서 있는가? 코람데오, 그 절대고독의 상황 앞에 서 있는가? 루터의 종교개혁이 500년이 지나고 다시 천년이 된다 할지라도 한 사람,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는 이 지고한 진리의 울림을 외면한 체, 교회가 그저 군중을 위한, 군중을 향해 자기비움의 케노시스가 없는 공허한 사랑에 불과한 말뿐인 성찬에 그저 몸을 맡긴 채 흘러 떠내려간다면 얼마나 더 비참해 질것인가?

비욘드 2017년, 루터 종교개혁 500주년을 넘어가야할 방향을 우리들은 찾아야 한다. 우리를 디아스포라로 불러주신 그 부르심 안에서, 우리들이 케노시스의 역설적 진리를 되새김 없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설 수 있을까? <한 사람, 단독자>로 하나님 앞에 서 도도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아니 바꿀 수 없다할지라도 이에 맞서는 한 사람 루터가 되어야 하겠단 각오가 새롭다.

이달의 말씀 | 빌립보서 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또는
본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 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 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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