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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아트저널

“쿼 바디스 도미네/ Domine, Quo Vadis”

[아트저널]  박심원목사/ 예드림커뮤니티교회 공동담임/ 22회

Domine, Quo Vadis

→ 안니발레 카라치 (Annibale Carracci,1560-1609) 작품

아피아 가도에서 베드로에게 나타나신 예수… 그리고 베드로의 부자연스런 모습은 마치 십자가를 지고 로마로 들어가시는 그리스도를 만난 놀라움의 극치를 드러내려 한다. 어떻게 사람 몸이 저렇게 뒤 틀려질 수 있을까? 아마도 작가는 극적인 순간의 상황을 표출해 내려 했을 것이다.

신앙생활은 어떻게 보면 질문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정말 존재하시는 신일까? 성경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일까? 단순하게 대답할 수 없는 깊은 질문은 결국 성숙된 신앙의 길잡이 역할을 하지만, 신앙 성장을 막는 악역이 될 때도 있게 된다.

“쿼 바디스 도미네 Domine, Quo Vadis” 아피아 가도에서 베드로에게 나타나신 예수 (Christ appearing to Saint Peter on the Appian Way)의 그림 앞에 선다. 그리고 깊은 물음을 던진다. 명화를 그려낸 안니발레 카라치 (Annibale Carracci,1560 – 1609)가 있었다면 그에게 물었을 것이다. 이탈리아의 초기 바로크 시대의 화가이기에 그에게 접근할 방법은 문헌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그림에 등장하는 베드로의 모습이 부자연스럽다. 베드로의 다리 부분을 잘라 보면 그의 몸은 왼쪽 다리에 중심이 실려 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그의 몸은 들려진 오른쪽 발에 무게가 실려 뒤로 젖혀져 있다. 기록에 의하면 처음 그림에서 수정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자연스런 신체 구조 덕분에 더 깊은 생각으로 이끌어 가는 물음을 던지게 한다. 베드로의 부자연스런 모습은 마치 십자가를 지고 로마로 들어가시는 그리스도를 만난 놀라움의 극치를 드러내려 한다. 그러니까 그림은 완성이 아니라 마치 완성으로 단계로 나아가는 한 과정을 그려낸 것이라 여겨진다.

그림은 교황 클레멘트 8세(Clemens VIII, 제231대 교황 재위기간 1592 – 1605)가 성 베드로를 기리기 위해 주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시 말하면 그림의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베드로인 것이다. 로만 카톨릭에서는 베드로를 제1대 교황으로 추앙하고 있다. 베드로 뿐 아니라 열두 제자들 이름 앞에는 성인 (Saint)이라는 별칭이 붙어 있다. 일반 기독교에는 그냥 베드로, 요한, 사도바울이라 부르지만 카톨릭에서는 반드시 이름 앞에 성자를 붙여 부른다. 사람으로 태어나 성자의 반열에 선다는 것은 가문을 뛰어 넘어 시대를 초월하는 영광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야 한다. 생각은 질문으로 연결된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 구약의 인물들은 언급하셨다.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요나, 엘리야 등이다. 그들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름 외에는 다른 별칭을 붙여주지 않았다. 그러나 후세 사람들은 그들 이름 앞에 성자라 부르고 있다. 이유가 무엇일까? 어떻게 보면 성자의 개념은 로만카톨릭이 가지는 종교적이며 정치적인 통치 개념의 한 방편으로 사용되었다. 아무나 성자라 부를 순 없다. 성자반열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을 선별하고 그것을 확정하는 기관임을 그들 스스로가 천명하는 것이다. 그 기관은 마치 성자라는 자격을 부여해 줄 수 있는 무흠한 집단임을 과시하려는 역설적인 행위이기도 하다.

개혁주의 신앙은 베드로를 초대 교황이라 인정하지 않는다. 그림을 통하여 많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그 질문은 종교개혁의 선구자인 마틴 루터의 질문이기도 하다. 그 핵심은 정경 외에 다른 기록을 성경적 권위에 두지 않는다는 의미로 오직 성경만으로(sola scriptura)라는 신앙과 신학의 확정이다. 성경에 관련된 많은 이야기들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 무엇을 택하고 선별해야 할지는 결국 인간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기록하게 이가 성령 하나님이시라면(벧후1:21) 흩어진 성경을 한권으로 묶으신 분도 성령 하나님이심을(사34:16) 인정하는 것이 신앙과 신학의 출발이며 완성이다. 오직 성경 외에는 참고는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믿음의 기준은 될 수 없다. 성경은 아담이 죄를 지었다라고 규명한다.(롬5:14) 그러나 카톨릭이 인정하는 외경중 하나인 집회서(Ecclesiasticus)에서는 하와를 최초의 죄인으로 규정한다. 시간순서로는 먼저 하와가 선악과 열매를 먹은 것은 사실이지만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시간순서가 아니라 첫 사람 아담의 범죄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시는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춘다.(롬5:14)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오늘날 그의 그림 앞에서 다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 시대에 주님이 오신다면 어디로 가실까? 화려한 예배당 앞에서 한 흑인 소년이 울고 있었다. 남루한 옷을 입은 청년이 다가와서 왜 울고 있는지를 물었다. 소년은 대답한다. 예배당에 들어갈 수 없어서 슬퍼서 운다고 답했다. 질문을 던진 청년도 예배당에 들어갈 수 없어 슬프다고 했다. 바로 그 청년은 예수 그리스도셨다. 이는 단순한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오늘날 교회의 모습은 어쩌면 주님을 떠나게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마치 말라기에 기록한 대로 성전 문을 닫기를 원하셨던 하나님의 심경일 것이다. (말1:10) 교회는 거룩함을 잃어 버렸다. 그 거룩함은 어떤 종교적 행위이전에 거룩함을 규명하게 해 주는 진리의 말씀 그 자체에 대한 잃어버림이다. 성경 없이도 예배할 수 있고, 설교시간에 성경을 펼치지 않아도 스크린으로 친절하게 보여주기에 안락한 의자에 수동적으로 앉아만 있으면 예배했다고 생각하게 된다. 결국 성경을 잃어 버렸다는 것은 진리의 말씀을 잃어버린다는 것이요, 진리의 말씀이 지목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없는 기독교라는 종교인으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안니발레 카라치의 그림, 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그 질문의 답은 한 말씀에 머물게 한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7:21) 아버지의 뜻을 잃어버리고 종교적 행위에만 머물고 있는 오늘 이 시대를 향해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박심원 목사
런던 예드림커뮤니티교회 공동담임 / 순회선교사
박심원 문학세계 http://seemwon.com
목사, 시인, 수필가, 칼럼리스트
Email : seemwon@gmail.com
카톡아이디 : seem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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