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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 교회 그리고 멈춰진 시간

[유크시론 189호]  이창배 발행인

니레스하임에서의 한 시간

비욘드 2017년, 루터 종교개혁 500주년을 넘어가야할 방향을 우리들은 찾아야 한다. 우리를 디아스포라로 불러주신 그 부르심 안에서, 우리들이 케노시스의 역설적 진리를 되새김 없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설 수 있을까? <한 사람, 단독자>로 하나님 앞에 서 도도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아니 바꿀 수 없다할지라도 이에 맞서는 한 사람 루터가 되어야 하겠단 각오가 새롭다.

참! 사람의 일은 정녕 알 수 없다. 언젠가 오래전의 일인데, 인터넷에서 아름다운교회당이라는 검색어로 찾았던 여러개의 교회당 사진들 가운데 어느 한 교회에 마음이 와닿던 적이 있었다. 그야말로 교회당 내부가 환한 빛으로 가득하고, 마치 백색의 우아한 도자기를 보는 듯 그 내부에 아름다운 그림과 조각들, 성전의 기둥, 기둥의 끝에 마무리된 정교한 장식이 그렇게 화려하거나 복잡하지 않고, 필요 이상의 꾸밈이 없이 전체와 어우러지는 하나의 예술작품을 대하는 듯한 느낌에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그 바로코식 예배당에 그려진 프레스코 천장화는 더욱 압권이었다. 인물인물의 모습에는 입체감이 그대로 살아있어 현실적인 느낌을 생동감 있게 전해주는 복음서의 내용으로 가득한 것이었다. 세상에 이런 교회당이 있다니 하는 감탄이 한 동안 마음에 자리하게 됐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딱히 사진에는 아무런 설명이 없었다. 심지어 교회당의 이름조차 없이 그냥 사진 자체로만 감상할 수 있어서 아쉬움이 컸었다. 이런 교회당이 이태리에 있는 건지, 프랑스에 있는 것인지, 독일에 있는 것인지 조차 알 수가 없어서 늘 궁금증이 한켠에 남아있던 그곳을 정말로 우연찮게 찾아간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사실은 지난 6월말 경, 다름슈타트에서 3시간 가량 떨어져 있는 콜름베르그라는 작은 도시에서 살고계신 박옥희 목사님 가정의 초대를 받았다. 벌써 70 중반을 넘어서 80이 다 되어가는 노부부가 얼마나 반가이 맞이해 주던지 너무 감사했다. 더구나 프랑켄 지역 전통요리라고 하면서 돼지고기 어깨살 부위를 오븐에 오랜 시간 구워서 손수 대접해 주니 또한 얼마나 송구하던지, 그렇게 점심식사를 끝내고 이어서 댁에서 한시간 정도 떨어진 니레스하임(Neresheim)이라는 곳에 있는 교회당을 보기 위해 집을 나섰다. 남편 되시는 데커 목사님이 직접 자동차를 운전해 니레스하임 베네딕트 수도원 교회에 도착했다. 간간이 비를 뿌리고, 검은 먹장구름이 하늘을 시커멓게 덮은 우중충한 날씨였건만, 이 시간 만큼은 하늘이 새파랗게 열렸고,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파란 하늘 가득하다. 햇살이 눈부시도록 비쳐온다.

마침 이곳을 찾아오는 관람객도 없어서인지 매우 한산한 분위기에 우리는 교회당 문을 열고 들어섰던 것이다. 그런데 이게 왠 일인가, 그렇게 찾아보고 싶었던 교회당이 그야말로 꿈결처럼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내 눈을 의심해야 했다. 이것이 정말로 그렇게 찾아보고 싶었던 바로 그 교회란 말인가?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진정 사람의 일은 모른다. 그야말로 백색의 깨끗한 예배당, 사방에 뚫린 창문을 통해 투영되는 맑은 햇살은 순식간에 내 영혼을 사로잡았다. “내가 세상의 빛이다.”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처럼 이 교회당은 그렇게 빛으로 가득히 채워지도록 설계가 되었다. 교회마다 흔한 스테인드 글라스는 아예 없었다. 그리고 천장에는 수백년의 세월을 견디어내고도 생생한 색채의 성화들이 맑고 환한 빛 가운데 조금의 가려짐도 없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 적나라한 색채란 무엇으로 다 형언할 수 있을까? 아니 인물의 표정까지 샅샅히 읽어낼 만큼 예배당 안을 감싼 환한 빛으로 말미암아 화가의 붓, 그 붓의 움직임을 따라가며 필설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복음의 세계를 눈으로 보게 해준다. 얼마나 감격스럽던지, 한동안 정신이 멍할 정도였다. 그러던 중에 나의 눈길이 최종적으로 머물게 된 것은 시계였다.

예배당의 정면, 그 중앙에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조각상이 마치 금색 테두리 액자에 담긴 그림처럼 서있다. 그리고 그 바로 위로 초록색의 커다란 시계가 달려있다. 그 위로는 천장으로 마가의 다락방에서 잡히시던 밤에 가진 최후의 만찬 장면이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 연관된 작품 가운데 시계가 표현하고자는 것은 무엇일까? 지상 사역을 마치며 운명하신 시간을 나타낸 것일까? 아니면 그냥 일상적인 시간을 나타내는 시계일 뿐일까?

통상 독일교회당 외부 종탑에는 커다란 시계가 결려있지만 교회 내부에는 시계를 두질 않는다. 이는 교회 안에는 하나님의 시간이 지배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곧 시계는 세속의 흐름을 상징하는 것으로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그런데 왜 이곳에서는 여기에 시계를 걸어야 했을까?

“사람은 왜 사는가?”

짧은 순간이지만 깊이 묵상을 해야했다. 이윽고 머리 속에 떠오른 생각은 우습게도 조각가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깊은 고민에 빠진 한 사람의 모습, 무릎에 팔꿈치를 받치고 손으로 턱을 괸 채 깊은 사색에 잠긴 한 사람, 이 사람을 이해한 것은 몇년전 취리히 미술관을 찾았을 때, 그 현관 마당에 설치된 로뎅의 ‘지옥의 문’이란 거대한 청동작품 앞에서였다. 그것은 지옥으로 떨어져 내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아비규환을 바라보면서 고민에 빠진 사람을 표현한 작품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바로 그럴지도 모른다. 그 시계는 언젠가 너나, 나나, 우리 모두는 죽는다는 의미였다. 한 사람도 예외가 없을 죽음, 그 죽음 뒤에는 선택할 수 없는 길이요, 미룰 수 없는 길이 나오는데, 곧 천국과 지옥의 두 갈래 길이다. 이 멈춰있는 시계를 보면서 생각하라는 것이다. “너는 지금 구원을 받았는가?”

그렇다. 그냥 이미지로 대했던 사진에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었던 아름다움의 그 이상, 상상 이상의 실재가 이 예배당을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의 삶이 당신에게는 어떤가? 아무리 즐겁고 행복하다 해서, 아무리 넘쳐나는 지성과 지식과 실력을 자랑할만큼 갖추고 있다고해서, 아무리 대단한 권력과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해서, 아무리 건강과 연수를 자랑할만 해서, 가진 물질로 이 세계를 몽땅 사들일만 하다고 해서 피할 수 있을까? 그러나 “Someday” 언젠가 죽음이 홀연히 찾아온다. 그리고 주님 앞에 서게 된다. 세상에 태어날 때는 순서대로 왔지만 죽는 날에는 순서가 없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그 시간이 지금 눈앞에 있다. 그러므로 오직 길은 하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과 구원을 믿는 길이요,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의 만찬에 나아가기 위해 사는 것이다. 이 불변의 진리 앞에 숙연해 지지 않을 수 없었다. 놀랍지 않은가?

돌아오는 내내 생각했다. 아니 지금도 생각한다. 오늘 우리의 예배가 이 감동과 감격을 잃어버린 채 겉돌고 있는 것은 아닐까? 복음의 핵심을 잃어버린 채 잔치의 흥겨움에만 취한 것이나 아닌지…

이달의 말씀 ㅣ 벧전1:24-25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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