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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프랑스도 개신교 국가가 되는 꿈을 꾸었다

[프랑스포커싱]  채희석 목사/ 프랑스 침례교 목사/ 25회

프랑스에서 구체적으로 진전된 종교개혁 역사

본 원고에선 루터의 종교개혁이 프랑스에 영향을 주기 시작한 초기(1519-1535)부터, 조국에서 추방된 칼뱅이 제네바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종교개혁을 이루었던 시기(1536-1564) 사이에, 프랑스에서 구체적으로 진전된 종교개혁 역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1. 충격은 주었지만 정착이 어려웠던 루터 사상 (1520-1535)

▶처음부터 천주교 저항의 벽에 가로 막힌 《루터교 페스트( ?)》
프랑스에선 1510년부터 파리 근교 모(Meaux)에서 조심스럽게 성서 고전을 연구하고 교회 혁신을 추구하는 운동이 천주교 교회 내부에서 먼저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하지만 종교개혁의 불씨가 공개적으로 퍼지기 시작한 것은 루터에 의해 95개조 반박문(1517)이 발표된 이후이다. 이미 1519년 초반부터 루터 사상에 관한 600여권 책이 보급되면서 파리에선 개혁사상이 종교인들 간에 화자에 올랐고 논쟁이 일어났다. 이렇게 빠른 전파는 구텐베르그의 인쇄술(1450)이 파리에 이미 1472년부터 보급 정착되어 발전된 인쇄업에 기인하기도 한다. 파리 외에도 독일과 스위스 접경 도시인 그레노블(Grenoble)과 리용(Lyon)에선 루터 사상이 우호적으로 받아들여졌다. 프랑스 종교개혁의 산실 모그룹에서도 루터 사상으로 인해 힘을 덧입게 된다.
하지만 루터의 종교개혁이 준 충격과 영향은 오래 가질 못했다. 카톨릭 신학의 권위를 대표하는 파리 소르본느 신학교에선 지체 없이 루터주의를 이단으로 정죄했기 때문이다. 루터교는 마치 해로운 종교 <페스트(흑사병)>일 뿐이었다. 그 결과 루터는 1521년 1월 23일 로마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한다. 프랑스 루터교 신자 중 첫 순교자 쟝 발리에르(Jean Vallière)가 1523년 파리에서 산 채로 화형을 당한다. 지속적으로 프로테스탄트들이 화형을 당하고, 성경도 불태워진다. 사실 천주교의 맏딸 프랑스 그리고 유럽의 예루살렘과 같았던 파리에선, 천주교에 대한 어떤 저항도 허용될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모(Meaux)운동에 관련한 모든 자들은 – 그가 누구라 할지라도 – 예외 없이 핍박을 받거나, 추방을 당해야 했다 (1524-25). 그 당시 천주교 내부적으로 개혁을 이끌었고 모그룹의 대부 역할을 했던 귀욤 브리소네(Guillaume Briçonnet)주교 역시, 반주류 세력으로 낙인 찍히기 보다, 자의 반 타의 반 루터 교리를 공개적으로 부인하고 교리 서적을 소지 금지하는 칙령을 발표한다, 루터교를 따르는 자들에게 더 이상 설교하는 권한을 허용되지 않았다. 그는 연옥의 존재, 성자 숭배, 죽은 자를 위한 기도 등, 전통 천주교의 교리를 다시 가르치는 설교 강단에 올라서게 된다. 이처럼 모운동이 해체되는 과정을 바라 본 귀욤 화렐(Guillaume Farel)은 결국 그룹을 떠나, 스위스 불어권 종교개혁의 길로 떠나게 된다.

▶ 정치적 보호를 받지 못한 루터교 신자들
루터교가 자리잡은 독일이나 스칸디나비아 국가의 경우와 달리, 프랑스에선 루터교에 대한 정치적 보호나 배려가 없었다. 천주교의 거센 종교적 핍박에 이어 정치적인 핍박이 프랑스 내 초기 루터교에 의한 종교개혁을 더욱 더 어렵게 만들었다. 16세기 전반까지 프랑스의 정치상황은 인접국가와의 투쟁으로 긴장의 연속이었다. 국왕 프랑스와 1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Charles Quint)와 갈등 관계에서 전쟁을 지속해 왔고, 그 밖에도 영국, 스페인과의 크고 작은 전쟁 속에서 국가 위기를 극복해야 하는 정세에 있었다. 그런 와중에, 1525년 2월 프랑스와 1세는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잠시 포로가 되기도 하였다. 왕이 부재한 시점을 노려, 소르본느 신학교와 파리 의회는 1525년 3월 모그룹을 이단으로 취급하고, 정치적 압박을 가중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왕은 소수종교 개신교가 발전되어 가는 것에 대해 초기엔 관용적인 입장을 취했다. 사실 그는 복잡한 국제 정세 가운데 종교적 이유로 국정이 분열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여동생 마그리트(Marguerite de Navarre), 나바르 여왕은 개신교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가진 사실이 아마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사실 마그리트 여왕은 모그룹을 지원하였고, 소르본느에 의해 정죄를 받았던 브리소네 주교나 르페브르 데타플 신학자를 보호하기도 했다. 이런 배경 속에서 프랑스와 1세는, 비록 종교적 핍박으로 모그룹이 해체되었지만 이들에 대해 중립을 지켜나갔다. 더 나아가 모그룹 회원이기도 했던 귀욤 뷔데(Guillaume Budé)를 1530년에 세워진 최초의 왕립대학 꼴레즈 드 프랑스(Collège Royal de France)의 초대 학장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프랑스 왕의 중립적인 자세는 오래가지 못하고, 입장을 바꾸어 개신교를 점점 적대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사실, 국내적으로 1530-1534년 사이에 “루터 페스트”에 대한 반대 여론과 소송이 프랑스 전역 주요 도시에서 접수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또 여기에 결정적인 사건이 터진다. 그것은 스위스 느샤텔의 안투완느 마르쿠(Antoine Marcourt) 목사 등 일부 과격 개혁세력이 일으킨 소위 <대자보 사건>(1534년 10월 17-18일)이 계기가 된다. 그들은 벽보를 통해 천주교 미사 적폐를 노골적으로 공격한다. 그 당시 종교적 반대는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성찬을 통한 주님의 임재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지나친 것이었다. 천주교는 성체성혈 변화 이른바 <화체설>을, 루터교는 성체성혈 공존이라는 <공재설>을, 칼뱅은 물질적인 변화보다는 <영적 임재설>을 통해 최소한 영적으로 (성령으로) 주님의 임재를 인정하였다. 미사 반대 <벽보 사건>은 성찬에 대한 극단적인 해석뿐만이 아니라, 왕이 거주하는 처소의 방문에까지 침범하여 벽보를 붙인 과격한 행위 때문에, 왕의 반감을 사게 된다. 결국 왕은 1534-35년 사이에 <벽보 사건>에 연루된 35명의 관련자들을 처형한다. 그렇다고 개신교에 대한 조직적인 핍박은 취해지진 않았다.
하지만 그의 개신교에 대한 의심은 사라지지 않는다. 재임 말기인 1545년 4월, 메렝돌(Mérindol)을 위시한 24개 마을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던 발도파 성도(Vaudois) 삼천여 명의 신도를 집단 학살시키는 불명예스런 역사를 남기고 만다. 이는 루터 개혁신앙 고백을 선택한 발도 신자들이 프랑스 왕보다는 독일 황제를 따른다는 리용 주교의 간교로 인해 잘못된 판단을 하였기 때문이다.
종교적, 정치적 핍박에도 불구하고, 위그노들은 비밀리 성경을 소유했고, 파리를 위시하여 지방 여러 곳에서 작은 그룹들이 지역 이곳 저곳에 생기게 된다. 하지만 1535년도까지 이들에겐 그들을 인도할 상징적인 인물도 없었고, 특별히 그들만의 교회 개념도 없었다. 단지 개인 신앙 차원에서, 안전을 위해 비밀리 존재했을 뿐이었다. 당시 개신교들은 천주교권의 공격을 두려워하여 야간에 모이고 헛간이나 동굴 등 인적이 없는 장소에서 은밀하게 예배를 드렸다. 목사가 없는 가운데 성경공부와 예배를 위한 모임으로 가정 중심의 모임으로 신앙생활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2. 칼뱅주의 개혁교회 정착과 제도화 (1536-1564)

▶ 프랑스 위그노들의 목자 쟝 칼뱅
1536년 불과 27세 나이에 <기독교 강요> 라틴어 초본을 출간한 칼뱅은 그 다음해부터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자로서 소명의 삶은 산다. 프랑스와 제네바는 칼뱅에 의한 개혁운동의 현장이요 거점이었다. 비록 종교개혁자로서 인생의 대부분을 조국을 떠나 망명자로서 인접 국가 제네바에서 사역하였지만, 그는 종교개혁이 프랑스에서도 실현되길 한시도 잊지 않고 간구했다. 그는 <기독교 강요> 서문에서 프랑수와 1세에게 책을 헌정하였고(1536.3), 조국에 있는 개혁교인을 위해 수많은 개인 권면서신, 목회서신 등을 통해 프랑스에서 개혁이 이루어지도록 꿈을 심었다. 동시에 최초의 불어 성경인 <올리베탕 성경>(la Bible d’Olivetan, 1판 1535, 2판 1543), <제네바 성경 2판> (la seconde Bible à l’épée, 1546)을 통해 프랑스 개혁신도에게 불어 성경이 보급되도록 노력했다. 또 성유물 개론(Le Traite des Reliques)에서 마리아, 막달라, 라사로가 프랑스에 왔었다고 믿으며, 다른 인접 국가보다 성유물 숭배가 극심한 프랑스 천주교를 지적하고 개혁신앙을 지닌 성도들이 이런 미신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하기도 했다.
다른 한편, 칼뱅은 정치 혁명가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지정학적인 차원에서 조국의 정세와 왕권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즉 프랑스의 기독교가 회복되기 위한 최선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프랑스 왕권이 복음으로 돌아와 종교개혁을 받아들일 때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것은 그가 품은 조국을 향한 하나님 안에서의 소망이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개혁사상에 대해 천주교와 왕권이 결탁하여 철저한 핍박이 시작되는 현실을 주시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고국의 위그노가 (요한복음 3장에 남의 시선을 의식해 밤늦게 홀로 예수를 찾아온 종교지도자) 니고데모(Nicodème)처럼 숨어살면서 신구교 간 타협된 삶을 살기보다는, 순교로 핍박을 이기거나, 조국을 떠나 망명의 길을 선택하여 적극적인 신앙의 삶을 살 것을 권유하였다. 이처럼 프랑스의 위그노들을 위한 개혁 신앙의 길잡이일 뿐만이 아니라, 신앙과 영적인 삶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영적 지도자가 생긴 것이다.

▶ 칼뱅주의 개혁교의 정체성은 교회 조직에서 나타나다
전술한 바와 같이, 1535년 이후부터, 왕권과 천주교 세력은, 종교개혁 사상이 도서, 설교자, 학교 선생 등을 통해 전파되는 것을 엄격하게 제한했다. 그렇다고 개혁 세력이 조심스럽게 퍼져나가는 것을 막을 순 없었다. 특히 1541년 칼뱅의 제네바 2차 사역이 시작되면서, 인접 불어권 도시국가 제네바는 무엇보다 위그노들의 피신처가 되었다. 칼뱅의 인품과 함께, 제네바에서 강력하게 전파되는 개혁사상은 프랑스 개혁교인들에게 특별한 희망을 주었다. 이것은 주로 책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유입된 루터 사상과 사뭇 다른 효과를 주었다. 즉 새로운 종교, 즉 천주교와 다른 기독교에 대한 이해와 정체성을 서서히 확립시켜 나가게 한 것이다. 종교개혁 1세대 루터 (1483-1546)가 사라지고, 칼뱅에 의해 개혁의 주도권이 넘겨지는 새로운 세대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개혁교의 정체성은 구체적으로 교회의 새로운 조직과 예식으로 나타난다. 천주교의 영향을 더 이상 받기 않기 위해서도, 천주교 교회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교회가 체계적으로 세워져야만 했다.
이런 시대적 필요성을 간파한 칼뱅은 제네바 2차사역에서 개혁교회를 제도적으로 세우는데 전념한다. 먼저 <교회조직 지침서> (1541), 제네바 교회 조직, 장로회의(Consistoire) 및 목사회(Compagnie des Pasteurs) (1542) 등을 구조적으로 만들어 나갔다. 그리고 교회 교육을 위해서 <기독교 강요 불어 초판> (1541)과 <어린이 기독교 입문서>를, 교회 예식을 위해서 <성찬 개론>(1541)과 <개혁 전례>(Liturgie) (1542)를 발행하였다. 이로써, 새로운 교회의 신학적 기반과 구조적 제도를 체계화시켜 나갔다.

▶ 프랑스 개혁교회의 모델이 만들어지다
칼뱅이 제네바에서 세운 교회조직에 따라, 프랑스에서 유사한 교회가 세워진 때는 1555년부터이다. 그러나 여전히 비공개적이고 비밀리 세워진 것이다. 첫 개혁교회는 파리에서 <작은 제네바>(La petite Genève)라고 불리는 구역의 한 가정 집에서이다. 제네바에서 교육 받은 쟝 르마쏭(Jean Le Maçon)이라는 젊은 법학도가 최초의 목사로 임명이 된다. 장로와 집사를 선출한 후 공식적으로 파리개혁교회가 세워진다. 또 1559년에 최초의 프랑스 개혁교 총회(Synode National)가 같은 장소에서 개최되고, 칼뱅이 직접 작성한 신앙고백(Confession de foi)과 프랑스 개혁교회 규율(Discipline)이 채택된다.
특히 이 때 채택된 신앙고백은, 약간의 수정을 거처, 1571년에 프랑스 개혁교회의 공식적인 신앙고백인 라로셀 신앙고백(Confession de La Rochelle)으로 확정된다. 이를 통해 로마카톨릭교의 잘못된 교리와 관습들 – 성자 기도, 연옥, 행위로 인한 구원, 신부에게 고해성사, 희생으로서의 미사, 성찬 화체설, 칠성사 등을 버리고, 올바른 구원 역사(창조, 타락, 율법, 예수 그리스도)와 개혁신조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 토대 위에 신앙고백을 만든 것이다. 교회는 말씀이 전해지고, 성찬과 세례가 집행되는 성도들의 모임으로 간주된다. 한편 개혁교회의 규율이 제시한 교회 조직은 계급적인 것이 아니다. 내부 조직 (장로회)과 외부 조직 (지방노회, 전국총회)에는 목회자와 평신도들이 최소한 동등한 수로 구성된다. 또 규율에서 목회자와 성도의 행동 규범을 정하고, 각 지역교회에서 사역자와 장로의 역할과 임명을 명시하고 있다.

▶ 프랑스 전역에 2000여 개의 개혁교회가 세워지다
1550년대 중반까지 개혁교인들의 모임은 주로 성경읽기와 기도 중심인 비밀집회(Conventicules de lectures et de prières)이었고, 조직적인 말씀 설교나 성례, 장로회 등이 구성이 되지 못했다. 목사는 구할 때에는 제네바가 아니 독일지역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찾았다. 하지만 1555년 이후, 프랑스 개혁교회는 제네바 개혁교회의 모델 위에 세워져, 목사와 장로회로 구성되어 갔다. 교회는 개척이 되고 개혁교회로 세워지는데 활력이 붙게 된다. 특히 1555년에서 1562년 사이에, 그리고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수많은 개혁교회들이 탄생되어 갔다. 1555년 한 해에도 모(Meaux), 앙제(Angers), 루동(Loudon), 푸아티에(Poitiers) 등에서 교회가 설립되었고, 그 후에 디에프(Dieppe), 투루(Tours) 등 각 처에서 교회가 설립되어 1561년엔 프랑스 전역에 천여 개의 개혁교회가 설립된다. 그리고 1562년에 가장 최고로 성장하여 최소한 1500개의 개혁교회가 세워진 것으로 역사학자들을 추정하고 있다. 교회 성장은 가히 놀라운 것이었고, 전체 인구의 12.5%에 해당하는 약 이백만 개혁신자가 있었다. 프랑스는 한 때, 새로운 기독교, 개신교의 나라가 되는 꿈을 꾼 것이다.

▶필자:채희석목사<chaihenr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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