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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트

[루터&종교개혁] 김현배 목사/ 베를린 비전교회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13)

오늘날 시대가 혼탁하다. 인본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이 강하다. 우리는 프로테스탄트들이다. 오늘날 프로테스탄트의 신앙을 가진 목회자들과 설교자들, 그리고 선교사들, 교수들이 많이 배출되어야 한다. 프로테스탄트적인 대학도 설립되어야 한다….

슈파이어 제1차 제국의회 – “루터파 교회를 세우도록 허락하다”

루터를 중심으로 한 개혁운동은 하나의 커다란 조직을 갖추면서 독일 내에서 새로운 신앙운동을 일으키며 확산되어 갔다. 루터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교리를 강조하였고 거룩한 예배에 관한 논문을 작성하면서 미사 형식의 틀을 개혁해 나갔다. 독일에서 루터교는 미사와 예배 형식에 변화를 주면서 예배의식을 발전시켜 갔고, 교회조직을 갖추어가기 시작하였다. 또한 루터는 24곡의 찬송가로 된 예배서도 작성했고 음악과 찬송을 강조하였다. 특히 루터가 지은 찬송가 중 가장 유명한 곡은 종교개혁의 군가라고 할 수 있는 “내 주는 강한 성이요”이다. 이 곡 가사 덕분에 수백만의 사람들이 루터의 사상을 익히 알게 되었다.

이처럼 갈수록 종교개혁이 미친 영향력은 커져 갔다. 하지만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는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과 그의 문서 보급이 확산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는 종교개혁운동을 억제하여 더 이상 확산되지 못하도록 저지하고 싶었다.
결국 황제 카를 5세는 라인 강 연안에 자리 잡은 독일의 오래된 도시 슈파이어(Speyer)에서 1526년 제1차 제국의회를 소집했다. 당시 찰스 5세와 프랑스의 프란소와 1세와 대결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대결은 전후 40년간 네 차례의 전쟁을 치르는 숙명적 적수였다. 이와 같은 정치적 상황과 더불어 황제는 오토만 터키의 습격으로 인한 위협 중에 있었기 때문에 이 제국의회에서도 루터를 탄압할 여력을 지니지 못했다.
당시 유럽의 제국은 로마 가톨릭을 지지하는 제후들과 루터파를 지지하는 제후들로 크게 양분되어 있었다. 예상 외로 프로테스탄트 귀족들이 많이 참석했다. 그들은 개혁 원칙을 단념할 수 없었다. 그런데 놀라운 의회 결과가 나왔다. 제국 의회는 각 지역마다 그곳을 통치하는 제후의 종교를 믿게끔 허용해 주었는데 각 지역 제후의 종교가 그 지역 통치자의 종교로 한다는 의미이다. 즉 지역별 종교선택의 자유의 원칙이 확립된 것이다. 이러한 의회의 결정은 루터파의 확산에 매우 유리한 기여를 하였다.
이제 독일의 여러 지역들은 그 지역을 통치하는 제후의 종교에 따라 가톨릭 혹은 루터교도가 되도록 한 것이다. 만일 어떤 지역 제후가 가톨릭교도이면 그 지역 백성들은 가톨릭교도가 되어야 하고, 반대로 루터교도이면 그 지역민들은 루터교 신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루터파가 로마 가톨릭과 동등한 법적 권한을 갖게 된 것을 의미한다. 드디어 개신교 진영의 제후들 대부분이 각 도시에서 처음으로 자신들의 믿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할 수 있으며 또한 지역교회로서 루터파 교회를 세울 수 있게 되고 루터의 종교개혁을 채택할 수 있게 되었다.
루터파의 지지가 필요했던 찰스 5세 황제는 정치적 이유 때문에 슈파이어 제국회의에서 보름스 칙령을 철회하고 독일 영주들의 종교적 선택권을 인정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결국 1521년 루터를 이단으로 정죄한 보름스 제국의회의 법령이 갈수록 실천할 수 없는 것이 되어 갔다. 개신교의 세력이 점점 확장되어 갔다.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은 승리했다. 하지만 그 승리는 잠깐이었다.

슈파이어 제2차 제국의회 – “종교개혁이 더 이상 확산되지 못하도록 하다”

1526년 슈파이어 1차 제국의회 결정은 루터파의 확산에 매우 유리한 기여를 하였다. 그 결과 3년 동안 북부 독일의 대부분은 루터교가 되었으며 남쪽에서는 스트라스부르크, 아우크스부르크, 울름, 뉘른베르크 같은 도시 등이 루터교가 됐다. 콘스탄츠도 개혁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3년 뒤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불화 관계에 있던 찰스 5세 황제와 교황 클레멘트 7세는 서로 화해를 하게 되었다. 또한 황제는 프랑스왕 프란소와 1세와도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때 황제 카를 5세는 독일 군주들의 세력이 강해진 것을 보면서 루터라고 하는 한 인간이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분란을 심어주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화가 났다. 루터를 향한 교황청의 증오심은 계속해서 커져만 갔다.
1529년 3월 15일, 이러한 정치적 변화 때문에 카를 5세 황제는 제2차 슈파이어 제국의회를 소집했다. 황제는 개신교의 세력 확산에 대한 대처 방안과 제1차 슈파이어 제국의회 결정을 무효화하고 종교개혁의 불길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이번 2차 의회에는 로마 가톨릭교회 세력이 다수 참석했다. 제2차 제국의회 결과가 나왔다.
루터파에게는 매우 충격적이었다. 황제는 가톨릭 측의 압력에 못 이겨 3년 전 슈파이어 제1차 제국의회 결정 사항을 번복하는 결의를 하였다. 의회는 개신교를 믿고 있는 주들은 그 종교를 믿도록 허용하되 다른 주들은 가톨릭을 그대로 믿으며 가톨릭교회의 예배가 어디서나 허용된다는 내용을 통과시켰다. 이것은 친 가톨릭교회 정책으로 선회한 것이며, 실질적으로 루터교 지역교회의 폐지를 의미한 것이다. 또한 황제는 루터를 이단으로 정죄한 1521년 5월 보름스 제국의회 칙령을 재확인 하면서 강행하였다. 그리고 그 명령을 어기는 자들에게는 황제의 처벌이 따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렇게 해서 종교개혁이 더 이상 확산되지 못하도록 제동을 걸었으며 더 이상 종교개혁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공포하였다.

개신교의 이름 프로테스탄트 – “항의하는 자”

이것은 루터파에 대한 황제와 로마 가톨릭측의 일대 반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제 상황은 달라졌다. 루터파와 로마 가톨릭지지 세력 간의 대결이 불가피해졌다. 즉시 루터교 대표단은 다수의 가톨릭파에 의해 결정된 슈파이어 제2차 제국의회 결의사항을 반대하였다. 루터 지지파들인 제후들 역시 침묵할 수 없었다. 그들은 종교개혁 진영 전체가 말살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고 판단했으며,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권위에 복종할 수 없음을 선언하였다. 그들은 루터파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용했던 1526년 슈파이어 제1차 의회 결정을 유지하라고 촉구했다. 1529년 4월 25일, 루터를 지지했던 영주들은 교회와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 카를 5세의 종교정책에 공식적으로 항의하는 문서를 의회에 제출했다.
이러한 결정에 대해 루터와 멜란히톤, 그리고 슈파이어에 있는 복음주의자들은 눈앞의 위험 앞에 굴복하지 않고 복음적 신앙과 양심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였다. 루터 지지자들은 일치단결해서 제2차 슈파이어 제국의회 결정에 대해 황제와 로마 가톨릭 지도자들에게 강하게 항의했다. 하지만 이 항의서의 내용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슈파이어 항의는 루터가 보름스에서 외친 항의의 재개이자 확대였다. 그들은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즉 루터파는 ‘항의하는 자들’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로부터 개신교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 1529년 제2차 슈파이어 제국의회 이후에는 개혁신앙을 소개할 수도 없고 영원히 로마 가톨릭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결정에 ‘항의한 자들’이라는 프로테스탄트란 용어는 이 때부터 개신교의 대명사가 된 것이다.
이 때는 보름스 제국의회 이후 개혁운동의 가장 위험한 시기였다. 따라서 프로테스탄트들의 연합과 협력이 절실히 요청되었다. 항의서에는 작센의 선제후 요하네스, 헤센의 영주 필립, 브란덴부르크-안스바하(Ansbach)의 게오르크, 뤼네부르크의 에른스트, 안할트(Anhalt)의 볼프강 등 5명의 군주들과 독일 14개 제국 도시들의 대표들이 서명했다. 이들은 루터의 개혁운동을 지지했던 복음주의자들이다. 14개 도시는 스트라스부르크, 뉘른베르크, 울름, 콘스탄츠, 린다우, 켐프텐, 뇌르들링엔, 하일브론, 이스니, 생 갈렌, 로이틀링엔, 바이센부르크, 빈추하임, 멤밍엔 등이다.

프로테스탄트의 길을 걸어가자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이란 말은 중세기 로마 가톨릭을 반대하고 일어난 모든 종교개혁의 교회들, 곧 개신교를 총칭하는 말이다. 프로테스탄티즘은 종교개혁 운동의 생명적 주장인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다. 루터와 종교개혁자들은 참된 진리 운동을 위한 항의자들이었다. 독일의 교회를 진동시킨 힘은 항의자들의 불꽃같은 소리였다. 이 불길이 스위스 칼빈과 위그노들에 의하여, 스코틀랜드에서는 존 낙스에 의하여, 17세기 청교도들과 언약도들에 의하여 계속 타올랐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의 길을 걸어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무서운 박해와 투옥과 강단에서 쫓겨났고 심지어 순교의 길을 가야 했다. 한국교회에서는 일제탄압과 6.25 전쟁 때 순교자들을 통하여 개혁의 불꽃이 타 올랐다. 프로테스탄티즘의 길은 좁은 길이다. 하지만 그 길은 생명의 길이다. 주님께서 가라고 명령하신 길이다.
오늘날 시대가 혼탁하다. 인본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이 강하다. 우리는 프로테스탄트들이다. 오늘날 프로테스탄트의 신앙을 가진 목회자들과 설교자들, 그리고 선교사들, 교수들이 많이 배출되어야 한다. 프로테스탄트적인 대학도 설립되어야 한다. 프로테스탄트로 가득한 참된 복음과 참된 교회가 많이 세워져서 마지막 시대에 참된 선교가 불꽃처럼 타오르기를 갈망한다.

필자:김현배목사 <revivalk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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