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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된 프랑스

[칼뱅과 프랑스 종교개혁] 이극범 목사/ 파리장로교회 -<1회>

프랑스 종교개혁 생수의 우물  ‘모’ (Meaux)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은 이번 해는 수많은 국내외 목회자 및 성도들이 독일과 프랑스 그리고 스위스를 탐방하며 개혁의 현장을 돌아보면서 당시의 생생했던 복음의 위력과 개혁자들의 숨결을 체험해 보고자 한다. 본인은 프랑스 현장에서 지금까지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개신교 종교개혁의 성지를 찾아서 짤막하게 소개하며 꼭 방문해 보기를 추천한다.

문화의 강국 프랑스는 기독교적인 측면에서는 문화 보다 더 유서가 깊은 나라이다. 16세기 독일의 루터 이후 장 칼뱅(Jean Calvin)이 바로 프랑스 출신으로 그는 본국 프랑스는 종교개혁에 실패했지만 스위스 제네바로 망명했다. 그는 신학과 종교개혁 그리고 주경 학자로서 독보적인 존재이다.
프랑스는 한때 위그노 전쟁을 전후하여 개신교가 국민의 46%를 차지하는 화려한 기독교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 때 칼뱅은 제네바에서 수많은 선교사를 배출하여 본국 프랑스에 파송했으며 스코틀랜드에 존 낙스 외에도 평신도 선교사 150여 명을 훈련시켜 브라질로 파송했다는 새로운 자료도 발견되고 있다.

종교개혁의 근원지 프랑스 파리

독일(루터), 스위스(츠빙글리), 프랑스(칼뱅) 등 세 나라가 종교개혁의 중심의 국가 이지만 사실 정확한 시대와 연대는 프랑스가 근원지임을 쉽게 알 수가 있다.
칼뱅이 1536년에 종교개혁의 신학적 입장을 정리한 ‘기독교 강요’를 저술한 전후가 프랑스 종교개혁의 시발점으로 알려 졌지만 이런 일반적 견해와는 달리 여러 종교역사학자들은 또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
독일보다 앞선 최초의 프랑스 종교개혁자 르페브르 교수는 마틴 루터(1517년)보다 9년 앞선 1508년 파리대학의 교수 르페브르 데따브르(Lefevere d’Etaples)는 ‘성서원전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논문을 발표하고, 직접 나서서 시편 주석과 바울 서신 주석을 작성한데 이어 마침내는 일반 민중들도 스스로 읽을 수 있는 성서를 번역했다.
그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은혜를 의식, 연옥, 성자의 숭배에서가 아니라 ‘복음’에서 발견했으며, ‘구원은 관습과 의식과 절차에 속한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얻어진다’ 는 진리를 설파했다. 그는 최초의 종교개혁자였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그들 중에는 후에 장 칼뱅에게 큰 영향을 준 스승과 같은 기욤 파렐(Guillame Farel)도 있었다.
루터의 종교개혁 5백주년이라는 떠들썩한 행사보다는 교회의 근본인 성경의 진리를 다시 한 번 되새기면서 다시 종교개혁 정신인 성경으로 돌아가는 운동(Sola Scriptura)이 되기를 소망한다.

프랑스 종교개혁 생수의 우물 ‘모’ (Meaux)

프랑스 종교개혁의 요람은 현재 파리의 심장부 소르본느대학, 생제르만 데프레 성당과 파리외곽 동쪽으로 41㎞ 떨어진 곳에 위치한 모(Meaux:프랑스 종교개혁의 생수의 우물)를 꼽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르페브르 데다블르 교수가 있다
그는 후에 칼뱅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기욤 파렐의 스승이다. 장 칼뱅은 파렐의 강권적인 요청에 의해 결국 제네바에 머무르며 개혁자로서의 사명의 길로 들어 서게 된 것이다.
당시는 문예부흥의 전성시대였다. 신대륙의 발견, 상공업의 부흥과 더불어 관능과 지성을 겸비한 프랑소와 1세의 영향으로 예술은 도덕보다 위에 있었고, 프랑스 문화의 문이 열리기 시작할 무렵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받은 르페브르는 생 제르맹 데 프레 수도원(현재는 성당)은 그의 연구처이며 강의장이었다.
그의 역사적인 강의실은 파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딕건물 예배당으로 현재에도 그대로 보전되고 있어 방문자들에 가 볼만한 곳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종교개혁이 문예부흥을 딛고 일어났다는 생각은 정당하지 않다. 종교개혁사상은 살아있는 성경 말씀의 발견과 함께 하나님의 섬세한 계획 속에 준비된 것이기 때문이다. 문예부흥은 성서의 진리를 찾아내게 하는 계기만을 주었을 뿐 문예부흥과 종교개혁은 실제로는 대립하는 운동이었다.
르페브르 교수의 불어판 성경은 프랑스 궁정에서까지 한때 성서를 원전으로 읽으며 시편을 불어로 노래하는 즐거움과 기쁨은 잠시일 뿐, 독일에서 루터의 단죄는 프랑스까지 충격을 주었다. 이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르페브르 데다블르는 마르그리트 공주의 도움을 받아 파리외곽 모(Meaux)로 그 은신처를 옮겨 이곳에서 종교개혁의 시발이 되는 ‘모의 동아리’를 구성, 1521년에 인문주의 학자들의 모임이 시작된다.
이 모임에는 기욤 파렐을 포함한 많은 학자들이 참석을 했다. 이 중에 에라스뮈스(Erasmus)도 있으며 제일 많이 알려진 멤버는 파렐을 포함하여 8명이다. 그들은 성경을 누구나 쉬운 언어로 번역을 해야 기독교의 본질로 돌아갈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바울 서신부터 번역을 하기 시작하여 헬라어 주석까지 번역을 했다. 그러나 소르본느대학 교수들과 천주교 신학자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쳐 1525년에 이 모임을 중단시키고 말았다. 파리대학 당국은 르페브르를 고발하고,연구실에서 종교재판으로 그리고 법정에서 화형장으로 옮겨지게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세나클 드 모’에 속해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프랑스와 유럽 나라들로 귀양을 떠났으며 르페브르는 스트라스부르그로 파렐은 제네바로 이 외에 몇몇 제자들은 잡혀서 고문 당했다.
당시 ‘모의 동아리’를 통해 수많은 지역 농민들까지 성경을 읽게 되어 그들의 교회와 삶이 변화가 일어났으며 목말라 하는 이들에게는 ‘모의 우물’을 마셨다는 표현을 하기까지 했다.
종교 개혁의 시작이자 중심은 역시 말씀의 발견임을 확인할 수 있다. ‘오직 성경’은 교회의 생명과 사상의 중심이요, 그리스도인의 인격적 헌신의 중심이기에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해 모든 신자들이 읽을 수 있게 했다.<다음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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