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문화/예술 > 몰타에서의 성 바오로
문화/예술아트저널

몰타에서의 성 바오로

[아트저널]  박심원목사/ 예드림커뮤니티교회 공동담임/ 24회

그들이 말하는 공의란 또 다른 법…

→ 아담 엘스하이머 (1578 – 1610, Adam Elsheimer, 독일) 작품

그림 안에 담겨진 핵심은 사도 바울의 손을 물었던 독사의 핵심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보편적으로 흐르는 공의에 관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원주민들이 믿었던 공의가 그림의 풍경에 담겨 있다.

르네상스라는 계몽운동은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사상의 깃발을 맨 앞자리에 꽂아 둔다. 그것은 사람으로 부터의 다스림 받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더 깊게 이야기 하자면 사람으로부터의 다스림은 곧 하나님으로 부터의 다스림에 대한 거부를 의미한다. 하나님을 대행했던 사람들로 인하여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는 것을 거부한 시대라 할 수 있다.
인물화에서 풍경화로서의 전환은 단지 그림 사조가 아니라 영적 흐름이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천 년 이상 가톨릭에 의해 지배 받으면서 예술세계까지 지배 받았다. 예술이라 함은 인간의 자유로운 영혼의 표출이다. 그런 표출이 제안 받은 가톨릭의 지배하에 만들어진 교회법인 율례들은 신종 율법주의가 된 것이다. 그래서 돈 있는 사람들은 화가를 고용하여 특별 주문한 그림을 그려 인물화 대신 풍경화로 대처하기 시작했다.
전적인 풍경 중심으로 바꾸기에는 아직 시대적 용인이 되지 않은 시기였다. 그래서 풍경을 그리되 그 중심에는 인물이 등장하는 역사적 그림을 선호하게 된다. 그런 결과가 오늘날 다양한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게 되는 혜택이 되기도 했다. 과거였다면 역사적인 사실에 풍경은 들러리 역할을 했지만, 르네상스 이후의 사람들은 풍경이 주인공이고 역사적 사실이 되는 사건들을 들러리로 등장 시키게 된다.
르네상스의 시작은 어떤 학자들은 AD 300년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게 시작된 문명사조는 16세기에 절정에 다다르게 된다. 스위스 문화사인 부르크하르트 (Jakob Burckhardt, 1818-1897)는 르네상스를 세 가지로 해석했다. ‘인간성의 해방과 인간의 재발견, 합리적인 사유와 생활태도, 근대문화의 선구’라 정의 내렸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르네상스 기간 내에 그려진 작품에 숨어있는 내적 메시지는 분명하다. 인간성의 해방을 추구한다. 동시에 인간의 재발견이다. 그 기준은 하나님이어야 하지만 로만가톨릭의 신 율법주의인 교회법이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했다. 하나님으로부터 해방을 추구하였으며 인간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려 했는데 그 통로가 자연이었다. 그래서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깃발아래 예술, 문화, 건축 등 모든 분야들이 줄지어 서게 된다.
아담 엘스하이머의 몰타 섬에서 바울의 사건을 그림으로 표현해 냈다. 크기는 손바닥 보다 조금 큰 그림이었다. 누군가의 벽면을 장식했던 그림은 오늘날에도 런던내셔널갤러리에서 찾아보기 힘든 위치에 있다. 설령 찾았다 할지라도 작은 그림이기에 지나치기 쉽다. 바울은 로마로 압송되면서 ‘유라굴라’라는 광풍을 만나게 된다. 배가 거의 파손이 되었으며 죽을 목숨을 다해 헤엄을 쳐서 현재의 몰타 섬에 다다르게 된다. 당시의 원주민들로 표현되는 사람들은 공의가 살아 있다고 믿는 문화인들이었다. 추위를 이기기 위해 나무를 모아 불을 피워 놓았을 때 나무더미에서 뱀이 나와 바울의 손을 물었다. 원주민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풍랑에서는 목숨을 건졌지만 공의가 그를 죽게 했다고 믿게 된다. 조난을 당해 목숨을 건진 사람들은 두 종류의 사람들뿐이었다. 첫째 부류는 로마의 관원이었으며, 둘째 부류는 로마로 압송되는 정치 수용범들이었다. 몰타 섬 주민들이 그런 상황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배가 침몰할 위기에 군인들은 죄수들을 모두 죽이려 할 때 바울이 손을 들어 그들의 행동을 멈추었다는 사실이 알았기 때문이다.
그 섬에 살았던 사람들은 공의를 믿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말한 공의란 또 다른 법이다. 하늘의 법이라 칭했지만 결국 바울이 볼 때는 자연의 한 부분을 믿는 무속적 신앙에 불과했다. 그림 안에 담겨진 핵심은 사도 바울의 손을 물었던 독사의 핵심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보편적으로 흐르는 공의에 관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원주민들이 믿었던 공의가 그림의 풍경에 담겨 있다. “바울이 나무 한 묶음을 거두어 불에 넣으니 뜨거움으로 말미암아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 원주민들이 이 짐승이 그 손에 매달려 있음을 보고 서로 말하되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조를 받았으나 공의가 그를 살지 못하게 함이로다.”(행28:3-4) 르네상스 시대는 하나님을 떠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던 시대라 할 수 있다. 그 역할을 한 장본인은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도록 이끌어야 했던 가톨릭 교회였다. 성경을 주제로 한 그림이라 할지라도 그림에서 말하려는 주제의 메시지는 성경적 내용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보편화된 상식이다.
그 시대에 새롭게 흐르는 주제는 정의이다. 그것은 오늘날도 같은 맥락이다. 정의가 살아 있어야 하고, 정의를 외치는 사람들은 믿고 따르는 시대이다. 정의를 시키기 위해 교회나 성경에 기대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몰타 원주민들이 알았던 정의, 오늘날에 요구하는 정의는 성경의 내용과 다른 정의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착각하게 된다.
성경의 소재로 그려진 그림이니 성화라 할 수 있다지만 실제의 내용은 성화의 내용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함께 하심으로 풍랑에서도 살아났으며, 뱀에 물렸을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어떠한 독으로부터 지배받지 않게 된다. 결국 바울은 뱀에 물림으로 몰타 섬에 복음을 전하는 전환점을 맞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사람들이 반응하는 것은 사울에게 함께 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원주민들이 주창했던 공의에 관한 것이다. 이 땅은 이제 하나님의 정의,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기준으로 산다는 것을 거부한다. 사람이 만든 공의, 사람이 만들어낸 정의가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를 대신하는 시대이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제자들이 떠올렸던 기억해야 한다. 그 말씀은 성전을 청결케 하신 이후에 하신 말씀이다.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요2:27) 세상이 정의에 목말라 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교회에 하나님의 정의가 숨을 죽이고 있다는 해석이 된다.

박심원 목사
런던 예드림커뮤니티교회 공동담임 / 순회선교사
박심원 문학세계 http://seemwon.com
목사, 시인, 수필가, 칼럼리스트
Email : seemwon@gmail.com
카톡아이디 : seemwon

답글 남기기

Previous Next
Close
Test Caption
Test Description goes like this
Social Media Auto Publish Powered By : XYZScript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