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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위해 힘 다하는 그 날까지

[유크시론 190호]  이창배 발행인

창간 16주년에 돌아보며,

오늘 나는 그분의 위대하심을 높이고, 찬양하는 삶인가? 오늘 유크가 창간 16주년을 맞이하면서 진정으로 주님만을 높이는가? 지금 모습은 분명 어제 나의 모습이 아닌 것처럼 정말로 그렇게 살기를 원한다. 지나온 모든 시간, 차곡차곡 쌓인 무게까지도 모두 털어내고 그분 앞에 홀로 서 있는 단독자로 만족해하기를 온전히 구한다.

열여섯 해 “감사”

창간 16주년, “참 감사하다.” 이는 자화자찬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제껏 나를 붙잡고 사용해 주신 나의 주님께 대한 감사이고, 마른 막대기 같던 나를, 다 써서 더는 깍을 데 없는 몽당연필과 같은 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오도록 도구로 삼아주신 그 은총에 대한 고마움이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 이 고마움과 감사가 커짐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사실 지난 한 해 동안 매일매일을 거의 죽음을 눈앞에 둔 것 같은 심정으로 살면서 계속 포기하는 것을 배웠다. 끝이 뾰족해질수록 스스로 서 있을 순 없다. 그 끝이 뾰족한 연필이 연필다울 방법이라면 그 연필이 주인의 손에 들려져 있을 때이다. 주인의 손에 붙잡혀 사용될 그때가 연필의 존재적 목적이 성취되듯이 내가 없어지기 시작하면서 나를 붙잡고 있는 손길을 느끼게 됐다. 나를 가득 채우고 있던 자아의식이 빠져나가면서 비로소 나를 제대로 보게 된 것이니, 너무 늦은 것이나 아닌지 하는 회한이 서린다.

중국의 고전, 『장자(莊子)』의 「제물론(齊物論)」 중에 ‘吾喪我(오상아)’ 라는 문장이 나온다. 기세춘 씨가 번역해 낸 『장자』 책에는 관련된 문장을 이렇게 번역했다. “남곽 자기는 책상에 기대어 앉아 있다. 하늘을 우러러 숨은 쉬며, 멍하니 몸을 잊은 듯했다. 제자인 안성 자유(子遊)가 앞에서 모시고 있다가 물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몸은 꼭 마른 고목 같고 마음은 꼭 죽은 재처럼 하고 계시니… 지금 선생님의 모습은 어제의 선생님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랬더니 자기가 말했다. “언아! 훌륭하구나! 그것을 질문 하다니. 지금 나(吾)는 내 몸(我)을 잃었다. 너는 그것을 아느냐?”

장자가 남곽 자기의 말을 통해 표현한 개념에 의하면, 잊음을 당한 ‘자아’와 자아를 잊은 ‘나’라는 한자어는 서로 다르다. ‘我(아)’와 ‘吾(오)’이다. 일반적으로 ‘吾’도 ‘나’이고. ‘我’도 ‘나’를 뜻한다. 그러므로 ‘吾喪我(오상아)’란 ‘내가 나를 장사 지낸다’라는 뜻이다. 장자의 이 주장은 참으로 매력적이지 않는가? 그런 의미심장함 때문에 ‘吾喪我(오상아)’라는 이 문구가 예로부터 많은 학자의 관심을 끌어왔다.

장자(莊子)의 ‘吾喪我(오상아)’

“몸은 꼭 마른 고목 같고, 마음은 꼭 죽은 재와 같다.”라는 표현이 참 멋있다. “지금 선생님의 모습은 분명 어제의 선생님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 큰 깨달음이었다. 후대 학자들은 앞에 나오는 나, 吾(오)’는 ‘진아(眞我)’, 즉 ‘참된 나’를 뜻하고, 뒤에 나오는 나, 我(아)’는 ‘아견(我見)’, 즉 ‘나의 견해’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그래서 ‘참된 나’란 타고난 그대로의 순수하며 순백한 하늘을 닮은 나이고, ‘나의 견해’란 한쪽으로 치우치고 이미 선입견이 굳어진 데다가, 식견이 좁고 얕으며 후천적으로 거짓 지식과 습관의 영향을 받은 ‘그리 훌륭하지 못한 나’이다.

성경에서도 그 말씀이 나온다. 곧, 육체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따라 날로 후패해 지는 옛사람인 나, ‘我(아)’을 벗어버리고 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진정한 나, 새사람 ‘吾(오)’를 입는 일이다. 결국, 그 의미는 ‘吾喪我(오상아)’와 통한다. 예수님은 또 이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 12:24). 왜 전에는 이 말씀이 달 리만 해석이 됐을까 싶다. 자연 만물의 이치 정도로 받아들였던 그저 진리라고 줄곧 생각해 온 것은 아닌지. 늘 궁금했다.

그 마음 밭이 옥토가 되는 게 중요했다. 그래야 옥토에 떨어진 복음 곧, 한 알의 밀알이 죽고 썩어서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게 될 때, 그 한 알에서 수십 배, 혹은 수백 배를 거두게 된다는 것으로 늘 머릿속에서 이해가 되던 그림이었다. 한데 아무런 변화가 없는 타자의 삶을 보면서, 아니 나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고민해 온 것이다. 우습지만 항상 나는 살고 타자는 죽기를 바랐던 것은 아닐까? 그 풍성의 원리, 생명 열매의 비밀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나는 죽기 싫고, 죽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여전히 나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라면 이제 그 원점에서 다시 생각해 보자. 한 알의 밀알은 곧, ‘我(아)’로 죽고 ‘吾(오)’로 태어나는 생명의 비밀이다. 이제 실로 나는 그렇게 살기를 원한다. 남은 생애가 얼마만큼 유한한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날을 헤아리지 않고 살기로 했다. 그저 오늘 이 순간에도 나를 붙드는 그 손길을 느끼는 그 벅찬 감격으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나를 붙드는 그 벅찬 감격으로

늘 자주 다니는 자동차 전용도로 끝자락에 서 있는 달맞이꽃을 본다. 자동차를 멈추고 모퉁이를 돌기 위해 신호를 기다리는 그 자리, 운전석 창문을 열면 손에 닿을 만큼 가까이 허리를 굽힌 채 커다랗게 키가 자란 달맞이꽃이 언제부터인지 노란색 꽃을 피우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얼마 전엔 시청에서 자동차 도로 주변으로 여기저기 우거진 잡초를 제거하는 작업을 하길래 이제 이 꽃도 더는 못 보겠구나 하는 아쉬운 마음으로 포기하고 있었는데, 수일 후 다시 그 길을 가보니 이게 웬일인지 그 꽃이 그대로 서 있는 것이다. 너무 신기했다. 이미 다른 주변 잡초들은 깔끔히 제거됐고, 이 달맞이꽃만이 우뚝 살아남아서 연노란색 꽃을 여전히 피우고 있다니 얼마나 고맙던지, 모처럼 이 땅에 피어난 식물에 대해서 감격을 느껴보았다. 아마도 잡초제거 일꾼들도 달맞이꽃을 알아보았던 까닭일까? 그 아니라도 고마운 일이다. 기다란 꽃대에 달린 수많은 꽃 주머니, 거기에서 시간이 될 때마다 연노란색 꽃이 터지듯 피어났다가 조용히 사그라진다.

우리의 삶에는 저마다의 가치가 달려있다. 그것이 모두에게 일편 확률이 될 수는 없다. 높고 낮은 자, 크고 작은 자, 부하고 가난한 자, 강건하고 병약한 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이렇듯 제각각이다. 물론 사람만 그런 것 아니다. 우리의 삶을 영위해 가는 모든 분야가 그렇고, 교회도 그렇다. 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정점에 이르면 그 끝은 통한다. 한결같이 창조주의 영광을 찬양한다는 것이다.

오늘 나는 그분의 위대하심을 높이고, 찬양하는 삶인가? 오늘 유크가 창간 16주년을 맞이하면서 진정으로 주님만을 높이는가? 지금 모습은 분명 어제 나의 모습이 아닌 것처럼 정말로 그렇게 살기를 원한다. 지나온 모든 시간, 차곡차곡 쌓인 무게까지도 모두 털어내고 그분 앞에 홀로 서 있는 단독자로 만족해하기를 온전히 구한다. 이 땅의 디아스포라를 위해 힘을 다하는 그 날까지.

이달의 말씀 : 엡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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