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오피니언 > 오늘 우리가 싸워야 할 목표를 주목하라
오피니언유크시론

오늘 우리가 싸워야 할 목표를 주목하라

[유크시론 192호]  이창배 발행인

저무는 루터 종교개혁 500년,

이제는 남의 탓과 남의 떡을 구경하듯이 쳐다볼 때가 아니다. 국가와 민족을 온통 뒤엎고 있는 악한 영들에 대해 싸움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루터가 그 시대 싸웠듯이 오늘 우리 교회가 그 싸움의 진정한 목표를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아부하고, 치부하고, 자기 기득권을 지키려는 비겁자로 남아서는 안 된다. 500년이 지난 후 역사가 다시 그것을 평가할 것이다.

어둑해지는 저녁 시간, 후덥지근한 실내기온에 잠시 바깥바람을 쐬러 베란다에 섰다. 언제 그토록 빨갛게 채색이 됐는지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상수리나무 꼭대기 잎새가 붉다 못해 아예 불이 붙은 것 같아 깜짝 놀랐다. 잠깐이면 가는 시간인데, 언제 또 가을이 깊어졌는지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건만 여지없이 다가오는 계절의 방문이 왜 이다지 빠른가 싶다.
그러고 보면 저녁 7시 경인데 벌써 어두움이 조용히 아스팔트 위로 내려깔리고 있다. 멀리 보이는 하늘에는 터진 구름 사이로 옅은 황혼이 내비치고, 한점 비행기 한 대가 연기를 피우며 어디론가 날아간다. 어디로 향하는 줄은 몰라도 이 어두운 저녁 하늘 멀리 날아갈 길을 재촉하듯이 금새 시야 밖으로 사라지고 만다.
낮에 한 차례 뿌리고 지나간 소나기 탓인지 바람이 차갑다고 느껴져 이내 방으로 들어오며 따뜻한 커피 한 잔이 생각이 났다. 며칠이 지난 것도 아닌 엊그제의 일인데 빈에서 맛본 멜랑쥬 생각이 문득 난다. 화창한 가을 날씨 그리고 그 유명한 빈의 카페 자허에서 마신 부드럽게 느껴지지만 그다지 부드럽지는 않던 커피 맛, 하얀 우유 거품이 초콜릿색 커피와 어우러져 커피잔 가득 채워져 있어도 역시 커피의 쓴맛은 어쩔 수 없는가 싶었던 그 맛이 떠오른다. 카페 분위기 때문일까?
참 그렇다. 그런데 따져보면 하루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건만 왠지 오래전에 마셨던 커피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일까? 전혀 엊그제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적어도 일주일은 지난 것 같고, 그보다 훨씬 오래전의 일이었던 것처럼 생각조차 희미해져 있었다가 갑작스레 생각이 난 것만 같은 이게 또 무슨 일인가? 그래서 다시금 깜짝 놀랐다.
사람은 이렇듯 이따금 저 스스로 놀란다. 지극히 짧은 순간 속에서 기억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서 놀라고, 그 짧은 순간이 또 왜 그렇게 멀리 보였던 지에 대해서 놀란다. 늘 일상은 주변에 가까이 있고, 그 가운데 일어나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분명한 것은 이미 가을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아니 이미 가을의 한복판에 다다른 것이다.

갑갑한 세상에 대한 변화의 욕구
루터종교개혁500주년, 오스트리아 빈, 시청사 광장을 무대로 개신교회가 모여서 거대한 축하행사를 가졌다. 뜻하지 않게 이 자리에 참석해 국영방송이 현장중계를 하는 가운데 구름같이 몰려든 인파속에 서서 뜻깊은 행사를 지켜보았다. 감사했다.
오스트리아는 명실상부한 가톨릭국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국민의 10%도 채 되지 못하는 개신교회의 전국적인 행사를 시청사 앞 상징적인 광장을 개방해 행사를 허용하고, 이를 국영방송국이 공개방송으로 현장중계를 하는 모습이 감동적으로 다가온 것이다.
게다가 오스트리아 개신교회에 소속한 외국교회들, 그 가운데 빈한인교회까지 고루게 참여해 연합성가대, 오케스트라를 구성했다. 첫 예배 마지막 장면을 헨델의 할렐루야로 마칠 때는 가슴이 울렁거렸다. 참 부럽고 멋졌다. 이 광장에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에게 루터 종교개혁 500년이란 숫자가 주는 기념비적 의미는 무엇일까?
이달 말이면 올 한해를 숱한 행사들로 장식했던 루터 종교개혁 500주년이 마감된다. 일일이 다 기억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숱한 사람들이 독일을 다녀갔을 것이다. 얼마만큼 독일을 다녀갔는지 그 숫자를 자세히 알기는 어려워도 짐작만으로 엄청난 숫자랄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같다.
한국교회든 타민족 교회든 모든 행사마다 전매특허처럼 루터종교개혁 500주년이라는 타이틀이 따라붙었지 않던가. 그 의미가 그만큼 지대했던 이유이다. 일종의 이심전심이랄까, 막막하고 갑갑한 세상에 대한 변화의 욕구가 그만큼 드센지는 몰라도 세상을 뒤바꾼 엄청난 역사에 대한 갈증이 한층 깊어졌다는 방증이 아닐까?
루터는 종교개혁의 3대 원리를 제시했다. 첫 번째, “오직 성경으로” (Sola Scriptura), 두 번째, “오직 은혜로” (Sola Gratia), 세 번째, ”오직 믿음으로“ (Sola Fide)였다. 이 원리는 16세기의 유럽의 종교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 자연과학, 의학 각 분야에 큰 변혁을 일으키게 된 직접적 계기를 가져왔다. 또한, 여전히 오늘날까지 이어져 세계적으로 변함없이 붙잡고 싸워야 할 원리가 됨도 분명하다.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가? 아직 다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우리의 싸움은 악한 영들에 대한 싸움
사도 바울은 빌3:12-14에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라고 한다. 그가 잡은 인생의 목표가 완성되기까지 잠시도 쉴 틈을 가지질 않았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그렇게 살았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이 얼마나 가슴을 뛰게 만드는 선언이자 고백이던가?
오늘날 이 시대를 뒤엎는 영적인 싸움의 어두운 역사를 느끼는가? 온통 불확실성과 몰염치한 인간의 탐욕이 불러온 극단적 양극화 현상에 대해서 무어라 정의할 수 있겠는가?
경제학자 아담스미스조차 지금과 같은 이기적 자본주의를 생각치 못했을 것이다. 그의 자본주의 이론엔 <도덕감정론>에서 제시된 동정(Sympathy), 즉 배려가 깔려 있다. 하지만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탐욕이 자제되지 않고 자본주의가 배려를 잃으면서 세계는 양극화로 치닫고, 결국 통제되지 않은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세상은 더 어두워지고 있다. 경제학자 갤브레이스(J.K. Galbraith)교수의 <불확실성의 시대>(The Age of Uncertainty)라는 말처럼 이제 어떠한 경제이론도 더 이상은 모든 이들에게 확신을 줄 수 없는 시대에 처했다.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에베소서 6장 12절은“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이라고 밝히고 있잖은가?
이제는 남의 탓과 남의 떡을 구경하듯이 쳐다볼 때가 아니다. 국가와 민족을 온통 뒤엎고 있는 악한 영들에 대해 싸움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루터가 그 시대 싸웠듯이 오늘 우리 교회가 그 싸움의 진정한 목표를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아부하고, 치부하고, 자기 기득권을 지키려는 비겁자로 남아서는 안 된다. 500년이 지난 후 역사가 다시 그것을 평가할 것이다.

이달의 말씀 ㅣ 빌3:12-14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답글 남기기

Previous Next
Close
Test Caption
Test Description goes like th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