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오피니언 > 시사칼럼 > 종교개혁과 프랑스 위그노 디아스포라 선교
시사칼럼오피니언

종교개혁과 프랑스 위그노 디아스포라 선교

[프랑스포커싱]  채희석 목사/ 프랑스 침례교 목사/ 27회

1538-1541년, 스트라스부르그에서의 칼뱅

수많은 위그노들이 망명함으로써 《프랑스가 진정으로 잃은 것은 (단순한 인력 유출로 인한 경제적 손실이 아니라) 다양성, 반론, 관점의 다원성을 받아드리는 역량을 상실한 것》이라고 역사학자 카바넬은 지적하고 있다. 왜냐하면 《1685년 이후 프랑스는 왕권의 힘과 국가폭력으로 국민을 일치시킬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값은 다름아닌 바로 프로테스탄트들의 불행이었다》라고 동 교수는 언급하고 있다.

위그노의 출애굽기
흔히 종교개혁과 그 이후 종교전쟁 기간 동안 핍박 받았던 프랑스 개혁교인을 <위그노>라고 부르곤 한다. 이들은 오늘날의 용어로 바꾼다면, 종교적 이유로 핍박 받아 국내에 은둔 피신하거나, 국외로 망명을 떠난 <기독교 난민>이라고 지칭할 수 있다. 16세기 후반 40년간 수 차례의 종교전쟁을 치르면서, 특히 1685년 10월 18일 루이 14세가, 조부였던 앙리 4세에 의해 신구교 간의 공존을 허용한 낭트칙령(Édit de Nantes, 1589)를 폐기한 시절 전후, 용기병(Dragonnades)을 통해 신교를 박해할 때 저항했던 개신교 성도들이다. 개신교를 핍박하기 위해 1668년에 결성된 용기병 군대는 위그노 가정을 일일이 찾아 다니며 그들을 위협하고, 핍박하며, 강압적으로 천주교로 개종시키는 국가 폭력의 도구였다. 이는 프랑스 개신교 역사에서 가장 암울한 시기를 상징하는 표상이기도 하다.

국가 차원에서 위그노에 대한 핍박과 불행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루이 14세는 퐁텐블로 칙령(Édit de Fontainebleau, 1685)을 통해, 개신교 교회 건물 파괴, 개신교 예배 금지, 어린이에 대한 천주교 의무교육, 개신교 목사 즉각 추방 등 개신교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파괴하는 법령을 공포하고 잔인한 공포 정치를 실시하였다. 이런 종말론적인 상황 속에서, 수만 명의 개신교인들이 천주교로 개종하기도 했다. 각 도시마다, 개신교 교회는 파괴되었고, 위그노 가정은 약탈의 표적이 되었으며, 심지어 780-900 명의 개신교 목사들도 어쩔 수 없이 천주교로 개종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목사들과 지도자들은 차라리 망명을 선택하였다. 이는 대규모 위그노 난민의 시작이었다. 이들은 망명 국가에서 <난민>으로 취급되었다. 목사들에게 망명은, 비록 유일한 선택의 길이기도 했지만, 일종의 저항이기도 했다. 프랑스 왕국은 목회자들이 프랑스로 다시 돌아오거나, 비밀리 국내 선교를 하거나 예배를 인도하는 경우, 사형 선고를 약속하였다.

망명은 비단 목사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퐁텐블로 칙령은 백성이 조국을 떠나는 것을 금지하였다. 따라서 천주교로 개종하지 않고 개혁신앙으로 살고자 한 위그노 성도들은 망명을 선택하였고 그것도 은밀하게 떠나야만 했다. 위그노들의 대규모 망명은 주로 1685년 말부터 시작하여 1687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인력 유출로 국가경제의 위기를 직감한 루이 14세는 망명을 선택한 위그노들에게 왕명으로 특사를 약속하기도 했지만 그들을 설득할 순 없었다. 위그노들이 선택한 망명을 위한 탈출구는, 사막을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과는 달리, 다양한 출구를 찾아나갔다. 연안지역에 거주했던 위그노는 선박을 통해 영국 또는 네덜란드 연합주 (Provinces-Unies, 스페인 지배를 받았던 네덜란드의 17주(州) 중 북부 7주가 형성한 자치 연합주)로 향하였다. 그들은 마치 오늘날, 국경수비대나 해양경찰 순찰대를 피하기 위해, 밀입국자 안내자의 도움 받아 야밤에 선박을 타고 떠나거나, 선박 화물칸에 숨어 비밀리 입국을 시도하는 난민과 매우 유사했다.

다른 한편, 내륙 지역에 거주한 위그노들은 육로를 통해 또 다른 위험한 망명의 길을 택하였다. 위조된 여권(통행증)을 미리 준비하거나, 변장을 하거나, 위험 시 빠져나갈 책략을 세워가면서, 아니면 인적이 없는 한적한 지형을 이용해 조국을 떠났다. 한 위그노는 “우리는 밤에만 움직여 걸어갔고, 낮에는 숲 속이나 동굴 또는 매우 불편한 자연 환경 속에 거했으며, 계절에 따라, 이슬, 비, 눈, 바람, 안개 등과 더불어 고통을 감수하였다”라고 간증하였다. 도보로 내륙을 통해 망명한 위그노들이 선호한 곳은 스위스 주(canton)로서 대표적인 곳이 제네바였다. 제네바를 가려면 반드시 경비가 삼엄한 론(Rhône) 강을 생명을 걸고 건너야 했다. 프랑스 북부 국경지역은 그 당시 프랑스와 스페인 간의 전쟁이 상시적으로 있어 체포될 위험이 많았으며, 남부 피레네 산맥은 가장 치안이 심한 곳이기도 했다.

온 세계로 흩어진 십오만 명의 위그노
이런 극심한 곤경과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수많은 위그노들이 오직 <신앙을 위해> 망명의 길을 주저 없이 선택했다. 혹자는 이십만 명에서 삼십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으며, 볼테르(Voltaire)는 심지어 그 당시 프랑스 개신교 인구였던 팔십만이 거의 모두 망명을 선택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 여러 역사가들이 인정하는 17세기 후반 마지막 15년 사이에 위그노 망명자의 수는 약 십오만 명에서 십육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당시(1680-1700년) 프랑스 왕국 인구가 21백만 명이었으나 1715년엔 인구가 19.6백만 명으로 급감하였다. 즉 총인구의 약 7-8%가 망명을 선택한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망명이 이루어진 시대를 전후 범위를 더 넓혀 16-17세기 전반에 걸쳐 총 인구의 10%가 넘는 이십만 명에서 삼십만 명에 달하는 위그노가 망명을 택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럼 위그노들이 선택한 망명지는 어떤 나라일까? 주로 유럽, 그 중에서도 4개 국가에 가장 많이 위그노들이 수용되었다. 이들 나라는 대체로 개신교에 대해 우호적인 곳이었다. 네덜란드 7개 연합주에 오만 명, 독일에 사만 오천 명, 영국에 사만 명, 스위스에 이만 이천 명이 망명하였다.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어떤 이들은 보다 먼 곳을 향해 떠났다. 영국령 미대륙,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등으로, 또는 스칸디나비아 반도, 덴마크, 러시아 등으로, 또는 브라질, 베네주엘라 등 남미나, 카라이브 서인도 제도 등으로, 심지어 남아프리카 희망봉에 이르기까지 위그노들은 개혁신앙을 가지고 온 세상에 흩어졌다.

일반적으로 위그노를 받아들인 이들 나라들은 위그노들을 우호적으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지대한 연대감을 가지고 대했다. 제네바 경우, 1684년에서 1689년 초반 사이에 이만 칠천 명 난민들, 특히 빈민을 위한 구조사업이 실시된 바 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경우 비슷한 시기에 망명 온 육만 사천 명의 위그노들도 이런 혜택을 받았다. 위그노들이 지닌 직업 전문성과 그들이 가진 다양한 자질에 대해 기대와 열망이 독일의 일부 영주들에겐 특별히 유별나기도 했다. 왜냐면 위그노들이 결국 지역개발과 경제발전에 미칠 영향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독일의 브란데부르그(Brandebourg)의 대선거후이자 프러시아 공작이기도 했던 프레드릭 귀이욤(Frédéric-Guillaume)은 포츠담 칙령(1685년 11월 8일)을 통해, 낭트칙령이 폐지되어 추방이 시작되자마자, 채 한 달도 지나기 전부터, 쌍수 들고 위그노들을 환영하였다. 망명자에게 주택을 공급하고, 10년간 세금면제, 제조업자 경우는 재정 및 물자 지원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1700년도 베를린 인구의 1/4이 위그노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반면 위그노들을 마지 못해 환영한 곳도 있었다. 영국의 경우, 프랑스와의 빈번한 전쟁을 치루는 관계 속에 있었기에 위그노들은 자신의 성을 영어식으로 변경하기도 했다. 즉 프랑스 성 Leroy는 영국식으로 King으로ㅡ Lejeune은 Young으로, Tommeliers는 Cooper로, Lenoir는 Black으로 개명하였다. 그리고 많은 위그노들이 영국국교(anglican)로 개종하면서, 영국 문화에 빠른 속도로 동화되기도 했다. 그리고 독일이나 스위스 일부 도시에선 외국인을 싫어하는 경향이 노골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들은 위그노들이 부담을 주는 구제민 또는 경제적 면에서 경쟁자로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목사들도 예외가 되질 못했다. 17세기 말 스위스 로잔느(Lausanne) 경우, 로잔느 대학생들은 위그노 목사가 목회 사역지를 독점할 것이라는 우려와 함께 경계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어떤 주(cantons)에선 새로 온 위그노들을 독일 영토로 다시 내보내기도 했다. 이처럼 칼뱅의 나라이기도 했던 스위스는 많은 위그노들에겐 단지 임시 체류 장소가 되기도 했다.

위그노 디아스포라가 선교에 미친 영향
세계 각지로 망명한 위그노는 난민 또는 디아스포라 선교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경제적 이민이 아닌 정치적 종교적 핍박을 피해 떠난 이주민 선교로서 그 규모나 범위 그리고 기간 면에서 좋은 예를 보여준다. 그들이 겪은 상황과 경험은 획일적이지 않고 다양하다. 따라서 보다 체계적으로 종교적 차원뿐만이 아니라, 경제적, 문화적 면에서 깊은 연구가 필요하지만, 위그노 디아스포라 선교가 오늘날 디아스포라 선교에 주는 교훈을 간략하게나마 정리해 보고자 한다.

첫째, 흩어진 위그노들의 영향 가운데 가장 소중한 것은 개혁신앙을 전세계에 전파한 데 있다.
그들은 고향을 떠나 망명자가 겪는 고통, 타지 생활의 불확실성 등을 감수해야 했지만, 자신의 신앙을 지키고 자유로운 믿음의 삶을 살고자 디아스포라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들 중 많은 자들은 주변 유럽의 여러 나라로 피신했지만, 여러 소수 무리들은 더 멀리 나아가 신대륙, 남미, 인도양 그리고 아프리카 남단까지 흩어졌다. 이처럼 지역적으로 광범위하게 흩어진 것이 위그노 선교의 독특한 특징이 된다. 이 흩어짐은 무엇보다 공간적이기도 하고, 사회적, 문화적 차원에서도 이해될 필요가 있다. 또 그들은 선교 역사 상 아마도 최초로 프로테스탄트 신분 정체성을 가진 자들 중 한 무리들이었을 것이다. 물론 스위스, 네덜란드, 스코틀랜드처럼 개혁신앙이 받아들인 곳도 있었지만, 대부분 나라에서 그들은 개신교의 첫 증인이 되었던 것이다. 여러 역사 자료들은 위그노들이 각 지역 그룹마다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역동적이고 다양한 선교패턴의 복잡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디아스포라 위그노가 개혁신앙을 어떻게 전파하였는가를 보다 자세히 알기 위해선,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 위그노 디아스포라 선교는 어떤 이주 정책으로 현지에 정착하였는가?
– 그들은 신앙적으로, 신학적으로 어떤 기초를 디아스포라 현장에서 세워나갔는가?
–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위그노 공동체는 어떻게 새로워졌는가?
– 본국 프랑스에는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이런 질문의 답변은 역사적 시각에서 장기적으로 관찰되어 심도 있는 연구가 될 필요가 있다

둘째, 위그노는 난민으로 정착한 곳에서 그 나라의 경제 산업 발전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그 당시 프랑스는 세계에서 가장 발전된 나라 중의 하나였다. 발전된 산업, 유럽을 지배할 만한 막강한 군대, 뛰어난 지식계급, 월등한 문화 등을 누리는 선진국이었다. 그런고로, 수많은 위그노들이 외국으로 망명된 사실은 프랑스 입장에서는 우수한 인력이 해외로 유출된다는 불행이 되었고, 위그노를 유치한 나라들에겐 반대로 큰 행운을 가져다 주었다. 이처럼 경제 산업 측면에서 프랑스는 인구 감소하고, 경제 위축도 현저히 나타난 반면, 위그노를 수용한 나라 – 영국, 독일 브란데부르그, 제네바 – 등은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는 역사적 평가도 있다. 루이 14세 시절 군사령관 보방(Vauban)장군은 <위그노 회상에 관한 기록물>(1689)을 집필하면서 이런 현실을 이미 예견한 바 있다.

비록 루이 14세는 그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자기 백성을 추방시키는 역사적 과오를 범하고 만다.
수많은 위그노들이 망명함으로써 《프랑스가 진정으로 잃은 것은 (단순한 인력 유출로 인한 경제적 손실이 아니라) 다양성, 반론, 관점의 다원성을 받아드리는 역량을 상실한 것》 이라고 역사학자 카바넬은 지적하고 있다. 왜냐하면 《1685년 이후 프랑스는 왕권의 힘과 국가폭력으로 국민을 일치시킬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값은 다름아닌 바로 프로테스탄트들의 불행이었다》라고 동 교수는 언급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흩어진 위그노들을 통해 17-18세기 다시 한번 사도행전 역사를 이루신 것이 아닌가 자문해 본다. 초대 기독교인들이 지중해 연안을 중심으로 흩어지면서, 복음이 다양한 문화권에 전파된 것을 우리는 안다. 마찬가지로, 위그노 디아스포라 선교는 지역적으로 다양하고, 문화 및 언어권이 서로 달랐지만, 그들에겐 <개혁 기독교>라는 공통된 가치 및 유산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 개혁신앙 안에서 하나가 되어, 현지에 교회를 세우고, 신앙을 고백하며 복음을 증거했던 <개혁 백성>으로 살았던 것이다.

▶필자:채희석목사<chaihenri@hanmail.net>

답글 남기기

Previous Next
Close
Test Caption
Test Description goes like this
Social Media Auto Publish Powered By : XYZScript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