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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

[루터&종교개혁] 김현배 목사/ 베를린 비전교회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15)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의 영적 교훈은 그리스도인에게 참된 신앙에 대한 기준이라는 것이다. 즉 신앙고백서와 신조가 중요함을 강조한 것이다. 하나님은 종교개혁의 선물로 신앙고백서와 신조, 그리고 교리를 주셨다.
특히 종교개혁 시대에는 많은 신앙고백서가 작성되었다. 신앙고백에 담긴 진술인 신앙고백서는 기본적인 교리 문답의 자료가 되며, 기독교 교리를 가장 종합적이고도 간결하게 요약하고 정리한 문서이다…

아우구스부르크 제국의회

1529년에 열렸던 슈파이어 제2차 제국의회 결과로 인해 로마 가톨릭교회와 개신교인 루터파는 서로 분리되어 가고 있었다. 또한 국가적으로는 터키 군대가 오스트리아 빈 까지 쳐 들어와 신성로마제국을 위협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기독교 세계인 양측의 화해와 타협이 절실함을 보여 준 것이다. 9년 만에 처음으로 독일 제국으로 돌아온 가톨릭 신봉자 카를 5세 황제는 제국 내부의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의 일치를 도모하여 종교적 통일을 회복하려고 노력했다. 루터파 개신교에 대해서 반대 입장에 선 황제는 개혁자들의 입을 통해서 직접 그들의 신앙에 대해 듣고 싶어 했다.

1530년 4월, 황제는 아우구스부르크(Augsburg) 제국의회를 개최한다고 공시했다. 이 의회에서 로마 가톨릭측은 황제에게 교회의 통일성에 반역하여 항의하고 있는 개신교 루터파 무리들이 교회의 품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요구하였다. 반면에 프로테스탄트 측에서는 그들의 문제가 편견 없이 공정하게 취급될 것을 요청하였다. 이때 황제는 루터파 개신교도들에게 어떤 점에서 로마 가톨릭교회와 차이가 있는지를 지적하도록 요청했다. 그러므로 루터파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정리한 문서를 의회에 제출해야 했다. 작센의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는 아우구스부르크에서 발표할 간략한 신앙고백서를 작성하기 위해 루터파 독일 신학자들인 유스투스 요나스와 요하네스 부겐하겐 그리고 필립 멜란히톤을 불러 모았다. 선제후는 그들에게 신앙 고백서를 작성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때 루터는 자기에게 내려진 황제의 금지령으로 인해 아우구스부르크 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회의 결과를 듣기를 원했다. 4월 15일, 루터와 그의 일행은 아우구스부르크와 최대한 가까이에 있는 코부르크(Cobourg) 성에 도착했다. 루터는 그의 비서 겸 학생인 수행자 바이트 디트리히(Veit Dietrich, 1505-1549)와 함께 코부르크에 머물렀다. 당시에 루터는 시편 말씀을 묵상하면서 스스로를 위안하고 있었으며, 멜란히톤과 다른 복음주의적인 인사들에게 편지를 띄워 강하고 담대하게 버티도록 격려하였다. 그때 루터는 찾아오는 많은 방문객을 영접할 수 있었는데 스트라스부르크 종교개혁자 부처(Butzer)도 멀리서 왔다. 루터는 이곳에서 165일 동안 머무르면서 아우구스부르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기다려야만 했다.

1530년,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
필립 멜란히톤(Philipp Melaneheton, 1497~1560)은 루터 신학을 집약하여 28개 조항으로 정리하였다. 이것이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Confessio Augustana)이다. 라틴어와 독일어로 작성한 이 신앙고백서의 내용은 기독교 신앙과 기본 교리로서 루터파의 기본적 신앙을 진술하고 있다. 예를 들면 “원죄, 하나님, 이신칭의, 성경의 권위, 교회와 교회의 직분, 성찬식, 세례, 성직자들의 독신제도 반대, 수도원적 맹세를 폐지하는 것” 등의 내용이다. 멜란히톤은 기본적으로 이신칭의의 원칙에 서 있었지만 신앙고백을 엄격하게 표현하지 않았다. 그는 공적인 행위보다 믿음을 강조하였고 루터주의의 복음적 신앙을 표현하였다.
한편 멜란히톤은 교회의 통일을 염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신앙고백서에 로마 가톨릭교를 따르는 사람들을 자극할 수 있는 내용은 가급적 피하고, 가톨릭 교도들과 프로테스탄트 교도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그는 개신교가 가톨릭교회와의 신념과도 일치한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그리고 멜란히톤은 교황수위권의 문제, 성자숭배, 연옥설, 화체설, 만인제사장설 등의 논쟁거리가 되는 문제는 삭제하였다. ‘미사’라는 용어도 계속 사용했다. 그 이유는 익숙한 언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확실한 교육 효과를 얻고자 꾀했던 것이다.
이러한 내용에 대해 루터는 이 신앙고백서가 좀 더 명확하고 날카로워야 했으며, 멜란히톤이 로마 교회에 많은 것을 양보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멜란히톤이 작성한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에는 개혁 신앙 항목들이 많이 열거되어 있었고, 인쇄된 신앙고백서에는 종교개혁의 신앙의 핵심을 담고 있었다. 자신의 비평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루터는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반기며 기뻐했다. 루터가 말하기를 나 자신은 멜란히톤처럼 이렇게 부드럽고 조용하게 글을 전개할 수 없다고 격려했다. 또한 일부 프로테스탄트 군주들이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대부분 제국의 루터파 제후들과 도시들이 이 신앙고백서에 서명했다.

자신들의 신학적 입장을 정리한 개신교 진영은 1530년 6월 25일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카를 5세에게 제출했다. 이어 그날 멜란히톤은 황제와 영주들이 모인 제국의회에서 거의 대부분 자신이 작성한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2시간 동안 낭독하였다. 그러나 이 문서가 황제에게는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했다. 즉시 황제는 가톨릭 신학자들에게 반박 문서를 준비하게 했다. 곧바로 독일의 가톨릭 신학자 요한 에크(Johann Eck)는 반박문을 작성하여 크게 읽었다. 황제는 가톨릭 신학자들의 논박을 승인하였고 이 반박 문서를 따르라고 개신교들에게 요구했다. 결국 가톨릭교회측은 이 신앙고백서를 거부하였다.
황제는 프로테스탄트들의 주장이 가톨릭교회 지도자들에 의해 반박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라고 요구했고, 제후들에게는 루터파에서 빠져나와 가톨릭교회와의 연합 속으로 들어갈 것을 명령하였다. 하지만 루터파의 제후들은 개신교에 대한 확신 때문에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루터만큼 믿음의 제후들의 용기 또한 대단하였다. 개신교 신학자들도 가톨릭 신학자들의 주장에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의 중요성
개신교인들의 신앙을 분명하고 체계적으로 표현한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는 루터파의 신앙을 밝히는 고전적 선언서이며, 후에 루터교의 주요 교리 표준 문서가 되었다. 이 신앙고백서는 루터가 비텐베르크성교회에서 면죄부 판매에 대해서 항의한 이래 동료들과 함께 13년 동안 투쟁하며 지켜온 신앙의 주요 조항들이다. 루터파는 이 고백서를 바탕으로 자신들이 오직 초대교회의 신앙 위에 서 있음을 고백했으며, 반면에 중세 로마 가톨릭은 부패하고 오염된 신앙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혔다. 황제와 가톨릭교회 지도자들은 신앙으로 맞선 제후들을 끝내 막지 못했다. 그들은 황제 앞에 목을 내 놓고 싸웠다.
루터파의 신앙 진술인 신앙고백서 사건은 종교자유의 길을 열어주었다. 마침내 종교개혁이 승리를 거두는 순간이었다. 그후 기독교 세계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오늘날도 루터파 교회에서는 다 이 신앙을 지키고 있다. 또한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는 역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하다. 먼저 이 신앙고백서는 개신교 신앙고백서들 가운데 가장 먼저 발표되었고 다른 복음적인 기독교 신경들의 토대가 될 정도로 프로테스탄트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 이후 1536년에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바젤에 모여 작성한 [제 1스위스 신앙고백서], 1566년 불링거(Heinrich Bullinger)에 의해 작성된 [제 2스위스 신앙고백서], 1563년에 영국국교회가 작성한 [39개조 신앙고백], 1618년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설교자였던 기도 데 브레(Guido de Bres)의 주도로 작성한 [벨직 신앙고백], 또한 1964년 개혁파 신앙고백으로서 런던에서 열린 웨스트민스터 회의가 맺은 열매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등이 나왔다.
그러므로 루터교의 역사에서 볼 때 1530년은 매우 중요한 해였다. 1530년 6월 25일,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가 카를 5세 황제 및 제국의회 앞에서 울려 퍼졌다. 이날은 개신교 진영인 루터교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기념일이다. 1517년 10월 31일은 비텐베르크의 종교개혁 기념입니다. 그 다음으로 뜻 깊은 날이 된 것이다.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가 오늘날 교회에 주는 교훈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의 영적 교훈은 그리스도인에게 참된 신앙에 대한 기준이라는 것이다. 즉 신앙고백서와 신조가 중요함을 강조한 것이다. 하나님은 종교개혁의 선물로 신앙고백서와 신조, 그리고 교리를 주셨다. 특히 종교개혁 시대에는 많은 신앙고백서가 작성되었다. 신앙고백에 담긴 진술인 신앙고백서는 기본적인 교리 문답의 자료가 되며, 기독교 교리를 가장 종합적이고도 간결하게 요약하고 정리한 문서이다. 사실상 성경을 제외하고는 교회에서 사용되는 신앙고백서와 신조만큼 한 페이지에 성경적 진리를 많이 담고 있는 문서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루터의 손에 항상 성경이 있다면, 멜란히톤의 손에는 항상 교리가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에서 성경과 신앙고백서, 그리고 교리가 잘 가르쳐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 성경적 신앙고백서와 신조, 교리가 교회에게 버림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현대교회는 그 어느 때 보다 더 이단이 난무하고 비성경적이며 신비주의 영성이 넘치고 있다. 한국교회는 신사도 영성으로 가득하다. 견고한 신앙고백과 신조를 무시하거나 무관심 하는 교회는 이단에 약할 수밖에 없다. 교회 안에 많은 성경공부 프로그램이 있지만 교회사 속에서 검증되어온 신앙고백서를 공부함은 필수적일 것이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 신앙을 지키고 건강한 교회를 세워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앙고백서와 신조를 공부해야 한다. 개혁주의 성경교리공부가 다시 살아나야 한다. 신앙고백서와 신조, 교리공부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신앙고백서와 교리가 회복되어야 교회가 건강하게 세워진다.

필자:김현배목사<revivalk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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