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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한 고개를 넘어가야 할 마루턱

[유크시론 193호]  이창배 발행인

이대로 묻어둘까, 침묵할까? 역사가 본다.

한해를 넘겨야 하는 막바지에, 이제 열 한 고개를 넘어가야 할 마루턱에 이르렀다.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문교회에 종교개혁의 신호탄이 된 95개 조 항의 대자보를 못 박는 일로부터 당대의 무소불위의 종교 권력에 대항해 예수 그리스도의 도(道)를, 그 참뜻을 비추어주는 진리의 등대에 기름을 붓고 불을 켜 빛을 밝힌 이래로 500년이다.

지난 10월 중순에 스페인 마드리드에 있는 세계 3대 미술관이라 일컬어지는 왕립 프래도미술관을 둘러보았다. 엄청난 규모, 수많은 작품의 전시물을 짧은 시간에 다 둘러볼 수 없어서 몇 개의 주요작품만을 주마간산 격으로 대충 훑어보며 돌아본 것이 아쉬웠다. 하지만 그 작품들 가운데 그래도 한 작품이 계속 마음에 남았는데, 그게 바로 히에로니무스 보쉬<Hieronymus Bosch, 1453-1516>의 <쾌락의 동산>이란 작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네덜란드 출신의 보쉬는 루터의 종교개혁 깃발이 들려 오른 그해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그림은 다소 초현실적이고, 동시대 화풍에는 거의 어울릴 수 없는 오늘날 디즈니랜드의 판타지한 요소들이 등장하고 있어 깜짝 놀랐다.
보쉬가 자신의 작품에 등장시키는 판타지한 구조물은 그 시대적 묘사이며,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신앙서 제1권 24장 3절에 있는 내용을 주제로 상상력을 발휘한 그림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첫 주제인 에덴동산에서 붉은 옷을 입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담과 하와 사이에서 양쪽 손을 잡고 그들의 결합을 축하하고 있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온전하고 완전한 결혼의 의미, 결합의 순결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두 번째 주제로 들어가면 상황은 완전히 바뀐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결혼의 의미가 상실된 육체적이고 동물적인 쾌락을 즐기는 유희만 추구하다가 어느새 삶은 망가지고 만다. 일하는 시간까지 쾌락을 위해 쓰고자 신성한 노동의 의미, 진정한 땀 흘림의 가치를 망각하기 때문이다. 무질서와 탐욕으로 뒤덮인 인간의 적나라한 타락을 그려 놓았다.
마지막 주제는 지옥과 심판이다. 성적 쾌락을 좇은 인간의 최후에 대해 경고를 담았다. 어두운 배경 속에 건물들이 불타오르고 있고 화면 중앙에 하얀색 괴물은 귀를 형상화한 것으로서 ‘귀 있는 자들은 들어라.’라는 성령의 음성을 듣지 않았음을 결론적으로 제시한다. 게으름과 나태와 쾌락으로 이어지는 베짱이의 본능을 추구하던 삶의 종국에는 그 쾌락의 상징인 악기를 통해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을 암시한다. 현실의 쾌락만을 추구하는 인간의 최후는 오직 지옥의 심판만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리는 메시지로 끝을 맺는 그림이다.

무엇이 참된 정의, 진리인가?
보쉬가 오늘날 살았더라면, 아니 대한민국에 태어나서 이 격변기를 살았다면 어떤 작품을 남기게 됐을까? 자못 궁금해진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 그림은 가리지 않은 채 밝고, 적나라한 나체의 성적 유희와 쾌락의 잔치가 이끄는 멸망의 판타지가 아니라 검게 물든 악마의 몸통을 얇은 백지장으로 가린 채 뒤에서 온갖 더러운 욕구과 욕심을 채우는 맘몬을 주제로 등장시켰을지 모른다. 어둠 뒤에 숨어서 감성적인 촛불로 무지몽매한 대중을 미혹하고, 현혹하는 위장된 사악 함이 그 본질이라고 간파했을 것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 중에서 역설적이지만 진리라고 해서 그것이 그대로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J.S. 밀은 “진리가 언제나 박해를 이기고 최후의 승리를 거둔다는 주장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하나의 상식이 되다시피 했지만, 역사적인 모든 경험이 입증하듯이 사실은 유쾌한 거짓말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며, “그것이 진정으로 참이라면 한 번 두 번 혹은 여러 번 사람들에게, 혹은 권력에 외면당하고, 박해를 당하더라도, 언제고, 혹은 오랜 시간이 흘렀을 때 그것이 다시 참임을 밝히는 사람이 반드시 있다는 데 있다”라고 한 것이다.
작금의 대한민국의 문제는 적어도 그리스도인으로서 내 양심이 어두운 세상 권세에 대해, 거짓과 음모와 선동을 촛불로 가리고, “촛불 혁명의 새로운 나라가 만들어졌고 나는 촛불로 태어난 촛불 대통령이다.”(문재인 본인 진술)라는 대한민국의 헌법과 사법, 언론, 국회 할 것 없이 그 위에 군림하는 촛불 정권에 대해서 함구하는 데 있다. 이게 위태로운 대한민국의 현주소인데, 무엇 때문에 지성 있고, 양심 있는 성직자들이, 지식인들이, 엘리트가 침묵하고 있는가? 같이 촛불을 들었던 동류이기 때문인가? 묻고 싶다. 무엇이 참된 정의이고, 진리인가?

호도된 “확증편향”을 바로잡자!
이런 면에서 “우리의 신념과 직관에는 중대한 결함이 있으며 자신과 세상에 대한 인식을 왜곡하는 장막을 걷어내야만 진실과 대면할 수 있다”라고 말하는 책이 있다. 바로 미국의 심리학자 크리스토퍼 차브리스와 대니얼 사이먼스의 공저인 <보이지 않는 고릴라: 김영사, 2011년>이라는 책이다.
저자들에 따르면, 이는 지능이나 성격과도 무관한 인간의 보편적인 약점으로서, ‘무주의 맹시’(Inattentional Blindness)라고 밝혔다.
저자들은 우리 신경계는 기술이 발전하기 이전 시대의 속도와 규모에 맞춰져 있어서 착오가 생긴다고 한다. 스마트폰 시대에는 사람들이 눈뜬장님이 될 확률이 점점 높아진다는 데 주목하여 저널리스트·기업가·광고업자·정치인들이 사람들을 설득하거나 혼란스럽게 만들려고 일부러 혹은 우연히 이런 착각을 이용한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원자력발전소나 정책에 관한 세부적이고 복잡한 정보 폭격을 당하면 사람들은 자신이 그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이해했다고 착각하게 된다. 이러한 사례들은 결론적으로 “확증편향”을 만든다. 곧, 인간의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인간의 지적인 오류체계를 이용하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 촛불 배후세력이 꾸민 언론조작과 선동이 이제 그 전모를 드러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대로 묻어두고 침묵할 것인가? 양심이 묻고, 역사가 보고 있다.
한해를 넘겨야 하는 막바지에, 이제 열 한 고개를 넘어가야 할 마루턱에 이르렀다.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문교회에 종교개혁의 신호탄이 된 95개 조 항의 대자보를 못 박는 일로부터 당대의 무소불위의 종교 권력에 대항해 예수 그리스도의 도(道)를, 그 참뜻을 비추어주는 진리의 등대에 기름을 붓고 불을 켜 빛을 밝힌 이래로 500년이다. 그로부터 비단 기독교뿐만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에 이르기까지 거의 인생의 전 분야를 통틀어 가히 혁명의 거대한 물꼬를 여는 계기가 됐다. 그래서 그만큼 기대가 됐고, 가슴이 뜨거울 수밖에 없던 시간이었다. 그런데 너무도 아닌 것처럼 이내 마음을 차갑게 식히며 한줄기 찬바람처럼 지나고 만다. 그냥 흘려보낸 시간 오백 주년, 과연 이러한 역사적인 모멘텀에 무언가 기대한 것이 잘못이나 되는 것처럼 부끄럽게만 느껴진다. 왜일까

이달의 말씀 ㅣ 눅6:43-46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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