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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

[유크객원칼럼]  이성춘 목사, 프랑크푸르트국제교회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이웃사랑에 대한 현장범” 이 되자

지난 9월 18일에 독일 에센 지방법원에서 한 사건의 판결이 이루어졌다. 이 사건 2016년 10월 3일 에센의 한 은행지점에서 갑작스럽게 바닥에 머리를 부딛히고 쓰러진 83세의 남자의 일로 시작되었다. 은행의 감시 카메라의 녹화 내용은, 은행에 20분 동안에 4명이 들어와서, 쓰러진 사람을 돕지 않고 돈만 인출하고 떠나고, 다섯번째 사람이 들어와서 핸디로 긴급구호를 요청한 것을 보여주었다. 이 노인은 병원으로 호송해 갔지만, 1 주일 후에 병원에서 사망했다…

이 일로 당시에 독일 사회에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독일 사람이 더 거칠어지는가? 일상 생활에서 강도만난 이웃, 위기에 직면한 이웃을 무관심 속에 지나쳐지는 일들이 많아지고 있어서 이 질문이 계속 제기되고 있다. 현대인들은 이웃에 대한 관심도, 긍휼의 마음도 잃어버리고 있다. 짐 윌리스는 “관심” 을 갖는다는 것은 어떤 끔찍한 일이 누군가에게 일어나는 것을 보고 ‘야, 저건 정말 나쁜데’ 라고 느끼는 것이며, “긍휼” 은 동일한 것을 보고, ‘이러한 일이 내 형제에게 일어나지 않게 해야지’ 라고 말하는 것이라고 구분했다.“관심”은 문제에 대한 인식으로 부터 나오고, “긍휼”은 관계에 대한 감각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어려움과 위기를 당한 이웃을 단지 관심의 차원만이 아니라 긍휼의 차원에서 만나고 섬겨야 할 것이다. 일명 사마리아 법은, 강도만난, 교통사고를 당한, 길거리에 정신을 잃고 쓰려져 있는 사람을 처음 보는 사람은 반드시 긴급구호, 적절한 조치를 취해 주어야 하고, 함께 있어주지 못하면, 다음 사람이 올 때까지라도 현장을 지켜주어야 한다.

검사는 이 4명을 지방법원에 제소하였다. 그들은 법정에서 노숙자가 잠을 자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냥 지나쳤다고 항변했다. 주점을 운영하는 한 여성은 노숙자로 인해 적지 않는 귀찮은 일들을 경험했기에 그냥 지나치게 되었다고 자신을 변호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고받고 도착한 경찰은, 쓰러진 분이 자신의 이름을 말 할 수 있을 만큼 의식있는 상황에 있었기에, 잠자는 노숙자로 오해받을 정황은 아니었다고 증언했다. 검사는 자신의 논고에서, 사람을 돕는 일은 사회의 연대적인 의무이며, 이들의 무관심과 긍휼없는 행위로 이 연대적인 사회의무가 크게 손상당하였다고 언급했다. 검사는 독일 사회가 외면하는 사회가 되어가는 것에 경각심을 주고자 이 사람들에게 엄한 형벌로 50일, 180일의 구류를 구형하였다.

판사도, 이들이 자신의 일에 집중하므로 긴급한 도움을 주지못한 것은 이해되지만,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와야 하는 일을 피하고,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는 행동은 잘못된 것이라고 판결하였다. 그들은 형벌을 받은 경력이 없고, 그 동안 공개적으로 충분히 비난을 받았고, 노인의 사망의 직접적인 사인이 긴급구호의 지체로 인한 것이 아님이 드러났기에, 구류가 아니라 벌금형을 언도받았다. 그들은 하루 40유로로 계산되어 사람에 따라서 60일. 90일의 구류에 해당되는 2400유로. 3600 유로의 벌금을 내고 집으로 돌아갔다.
판결문에서 개인의 부주의나, 자신의 일의 긴급성도 어떤 무관심과 긍휼없는 행동에 대한 변명의 여지가 되지 못한다는 점이 명백해졌다. 일반적으로, 법정 심리, 유죄선언, 언도라는 전 과정은 인간이 자유로운 결정자이며 자신이 내린 선택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존재라는 가정을 기초로 한다. 존 스토트는, 우리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얼버무림으로써 인간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도 죄라고 주장했다.

1973년의 프린스턴 신학교에서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실험은, 사람이 행하도록 영향을 주는 것은 평소의 사람의 확신과 생각보다 그 때의 구체적인 상황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위기에 있는 사람을 돕는 일은, 그 순간에 그 사람이 시간에 쫓겨 서두르고 있는 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시간에 쫓기는 사람은, 그가 누구이든지 단지 10%만이 멈춰서 도움을 제공했고, 시간이 여유가 있는 사람은 63%가 도움을 준 것이다. 신학생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바로 직전에 들었던 학생도, 이 상황의 힘에 영향을 벗어나지 못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내가 어떤 일을 했는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 라는 사역보다 내가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에 더 강조점을 둔다. 그러나 일상 생활에서는 내가 실천하는 주체적인 행위자로 살아가느냐가 중요하다. 사유하는 자가 아니라 행동하는 자가 되어야한다. 우리는 양자 택일의 상황에 직면하고 한쪽을 선택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고 아쉬워한다. 존 스토트는, 사람이 잘못 선택했을 때, 자신을 꾸짖는 것은, 그가 달리 행동을 할 수도 있었음을 스스로 알기 때문이라고 이해했다. 우리는 달리 행동할 수 있어야한다.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 마감날에 쫒기거나, 마감날을 어기지 않도록 달리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좋은 사람은 자신의 시간 없는 상황에 묶이지 않고, 상대의 긴급한 상황에 응답하며 도움을 제공하고자 여유있게, 한발 앞서 살아가는 달리 행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유진 피터슨은, “예언자들은 우리가 인생의 구석구석에서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대면할 것을 주장한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러한 구석구석에는 이웃들이 있었다. 예언자에게 하나님은 옆집 이웃만큼이나 실제적이다. 그리고 이웃은 하나님만큼이나 실제적이다.” 이라고 했다. 우리는 이웃을 섬기는 일이, 천사를 대접하는 일이 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된다고 많이 들어왔다. 그렇다 이웃은 우리에게 다가온 하나님의 현현이신 것이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우리에게 이웃을 정의해 주지 않았지만, 우리에게 이웃을 만들어주었다.(유진 피터슨) 그 때 이후로 지금까지 핵심적인 질문은 누가 내 이웃인가가 아니라 “내가 이웃이 될 것인가?”이다. 가는 길마다, 살아가는 곳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좋은 이웃이 되어야한다. 좋은 이웃은 말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돕는 손길로 확인되는 것이다.

독일의 상황이 일어난 라인란드 지역의 독일교회 총회장인 만프레드 레코브스키는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이웃사랑에 대한 현장범” 이 되라는 요청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이미 이웃이 되었고 사랑을 실천하는 현장범이던, 사랑을 기피하는 현장범이 될 것이다. 그러나 달리 선택하는 사람이 되어 이웃을 사랑하는 현장범으로 붙잡히는 사람이 되자.

“인간은 아마도 존재하는 곳이 아니라 사랑하는 곳에서 산다.”(어거스틴)
“숨을 쉴 때가 아니라 사랑할 때 우리는 살아있다.”(로버트 사우스웰)
“행동하는 사랑은 꿈꾸는 사람보다 훨신 더 굉장한 것이다.” (도스토엡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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