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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말칼덴 동맹 및 신조

[루터&종교개혁] 김현배 목사/ 베를린 비전교회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17)

1531년 2월, 개신교 제후들은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독일 중부지역 튀링겐 주의 작은 도시 슈말칼덴(Schmalkalden)에서 모였다. 그들은 황제가 공격할 경우 6년 동안 서로 군사적 원조를 하기로 약속하면서 직접적으로 황제에 대항하는 연맹을 결성했다. 이것이 슈말칼덴 동맹(Schmalkaldischer Bund)이다. 이 연맹의 주도적 인물은 헤센의 영주 필립 공작(Philipp, 1504-1567)과 작센의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I세(Johann Friedrich I, 1503-1554)였다. 거기에 6명의 다른 제후들과 10명의 도시 대표들이 가세하였다…

슈말칼덴 동맹

전통을 믿고 따르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성경을 믿고 따르는 개신교회와의 갈등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여러 종교 회담을 통해서 간격이 좁혀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가톨릭과 비텐베르크의 개신교 사이의 골은 더욱 더 넓어지고 깊어만 갔다. 슈파이어 제 2차 제국의회나 아우구스부르크 제국의회에서도 로마 가톨릭과 루터파 사이의 의견은 일치하지 못했다. 다수의 로마 가톨릭교회의 편에 선 황제 카를 5세는 루터교를 따르던 개신교 지지자들을 거부하고 변증적으로 작성한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도 인정하지 않았다.

이 고백서는 1531년 4월 까지 철회하도록 기간을 주었다. 또한 황제는 모든 지역에서의 교회적 변화는 원상태로 돌려져야 한다고 결정했기 때문에 각각의 영토를 다스리고 있었던 제후들은 제국 안에서 자신들의 개신교신앙을 더 이상 인정받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황제의 결정에 대해 루터는 크게 실망했다. 사실상 루터는 종교개혁 초기부터 정부에 대한 폭력 저항을 강력하게 반대했었다. 농민 전쟁 때도 로마서 13장 말씀처럼 정부를 향한 순종이 성경적으로 명령되었다고 주장하면서 폭력을 금하였다. 하지만 황제에 대해 실망한 루터는 이때부터 정부에 대한 생각을 바꾸었다. 그는 저항의 합법성을 인정하였다. 이때 독일의 루터교 제후들이 힘을 얻었다. 그들은 황제에 맞서기 위하여 새로운 조직을 구상하였다.

1531년 2월, 개신교 제후들은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독일 중부지역 튀링겐 주의 작은 도시 슈말칼덴(Schmalkalden)에서 모였다. 그들은 황제가 공격할 경우 6년 동안 서로 군사적 원조를 하기로 약속하면서 직접적으로 황제에 대항하는 연맹을 결성했다. 이것이 슈말칼덴 동맹(Schmalkaldischer Bund)이다. 이 연맹의 주도적 인물은 헤센의 영주 필립 공작(Philipp, 1504-1567)과 작센의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I세(Johann Friedrich I, 1503-1554)였다. 거기에 6명의 다른 제후들과 10명의 도시 대표들이 가세하였다.

슈말칼덴 동맹에 참여한 도시는 안할트(Anhalt), 막데부르크 (Magdeburg), 브레멘(Bremen), 포메른(Pommern),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 하노버(Hannover), 함부르크(Hamburg),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Frankfurt am Main), 켐프텐(Kempten), 뷔르템베르크(Württemberg), 스트라스부르크(Strassburg) 등이다. 황제의 친 가톨릭 정책은 결과적으로 루터 지지파들을 더욱 결속시켰던 것이다. 결국 슈말칼덴 동맹은 신성로마제국 안에서 황제에 대항하는 가장 강력한 세력이 되었다. 하지만 1532년 7월, 뉘른베르크에서 터키의 침공에 대한 방어의 필요에 쫒긴 황제 카를 5세와 슈말칼덴 동맹은 임시협정을 체결한 후에 휴전에 들어갔다. 그러나 황제와 개신교 신앙고백을 따르는 영주들로 이루어진 슈말칼덴 동맹과의 관계는 끊임없는 갈등과 대결로 점철되어 갔다.

슈말칼덴 신조

1531년 슈말칼덴 동맹을 맺은 후 약 6년이 지났다. 1537년 5월 23일, 황제 카를 5세는 신성로마제국 영토인 북 이탈리아 만투아(Mantua)에서 교회쇄신 공의회를 개최하겠다고 공고하였다. 선제후는 공의회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는 루터에게 만투아 에서 열릴 공의회에 제출할 새 신앙고백서를 작성해 달라고 요청했다. 루터는 여러 프로테스탄트 조언자들의 협력을 촉구한 뒤, 부탁 받은 대로 일련의 교리적 명제들을 작성했다. 슈말칼덴에 모인 38명의 신학자들은 신앙의 조항들에 대해 논의했다. 루터는 슈말칼덴 동맹에게 신앙고백의 기반을 제시하고자 개혁자들과 함께 1536년에 신앙 조항을 작성하였다. 이것이 슈말칼덴 신조(Schmalkaldishe Artikelen)이다.

슈말칼덴 신조로 알려진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루터는 가톨릭교회와 성경적인 기독교 신학의 차이점에 대해 설명하였다. 실제로 루터는 특별히 개신교의 교리를 예리하게 정리했다. 주요 핵심 내용은 “이신득의, 죄, 율법, 회개, 복음, 세례, 연옥, 순례, 수도생활, 성인들에 대한 기도 단죄, 제단의 성례, 신앙고백, 파문, 서품과 소명, 사제들의 혼인, 교회, 수도 서약들, 인간 전승들, 미사의 정죄, 수도원 삶의 해로운 성격, 교황청, 교황주의자들의 거짓 회개, 하나님 앞에서 선행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 행위 비판, 마귀” 등이다.

루터는 이것이 가장 중심 쟁점이라고 생각했다. 특별히 이 교리 가운데서도 루터는 우리들이 오직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방편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칭의 교리를 강조했다. 루터는 가능한 모든 문제를 거의 다루었기 때문에 이 문서는 거의 신학적 유언의 형태를 띠고 있다. 사실 루터가 이 문서에 서명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1537년 루터가 슈말칼덴에서 개신교 영주들과 더불어 공의회의 대표 파견 문제에 대해서 협의하고 있던 때에 심각한 심장 발작을 일으키면서 그는 즉시 비텐베르크로 귀환하였기 때문이다. 영주들도 루터가 작성한 신앙 조항을 서명하지 않았다. 루터와 멜란히톤은 만투아에서 열리는 공의회 참석을 거절하지 말라고 권유했다. 하지만 슈말칼덴 동맹은 1537년도의 공의회 참석을 거절했다.

슈말칼덴 전쟁

1531년에 시작된 슈말칼덴 동맹은 15년 동안 서로 연대하였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과 루터지지자들로 조직된 슈말칼덴 동맹과의 갈등은 계속 이어졌다. 당시 권세를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었던 황제 카를 5세는 권력의 절정에 이르렀다. 황제는 가톨릭과 개신교를 다시 하나로 통합하는 일이 폭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 독일의 종교개혁 세력을 억제할 절호의 기회를 만들었다. 루터도 이것을 예측했다. 루터는 개신교 진영이 엄청난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도 더욱 분명하게 깨달았다. 루터는 제후들에게 이제까지 성취한 것들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황제는 1545년 12월 13일, 이탈리아 북부 트리엔트에서 공의회를 소집했다. 하지만 개신교 제후들은 당연히 참석을 거부했다. 이렇게 양측이 대치하는 가운데 이를 계기로 황제는 프로테스탄트 세력들인 슈말칼덴 동맹에 대한 군사행동을 명한다. 결국 1546년 7월 슈말칼덴 전쟁이 발발했다. 슈말칼덴 동맹군은 군사적으로 황제군에 비해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들은 제후들 간의 분열과 무능력으로 인해 1547년 4월 24일 뮐베르크(Muhlberg)에서 비참하게 패배하였다. 그리고 다음 달 비텐베르크에서 참수되었다. 루터는 1546년 2월 18일 아이슬레벤에서 세상을 떠났다. 종교개혁을 시작한 루터는 전쟁을 원하지 않았으나 그가 세상을 떠난 뒤 5개월 후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개혁자가 죽은 후 루터의 도시는 패배라는 수치를 당했다. 전쟁에서 패한 많은 도시들이 프로테스탄트에서 다시 가톨릭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루터파의 신앙고백서 – “일치신조”

1546년 루터가 세상을 떠난 후 여러 해 동안 루터파의 군주들과 신학자들 간에 교리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그들은 루터파 교회의 신자들로 하여금 단합할 수 있는 새로운 신앙 성명서를 작성하기 시작하였다. 1580년 드디어 루터교회는 루터파의 정체성이 담긴 한 개의 교리서가 되는 일치신조(the Formula of Concord)를 작성하였다. 이 교리서에는 루터가 주장한 인간 의지의 노예상태 교리를 매우 강한 표현으로 재천명했으나, 그의 예정론은 누그려 뜨렸다. 루터파를 이끄는 성직자와 군주, 귀족과 시의회가 일치신조서를 채택했다. 1530년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지 50년째 되는 해였다. 일치신조서는 루터교회의 기본 원리를 잘 보여준 신앙고백으로서 전 세계 루터파의 신앙 고백적 표준으로 사용되어지고 있다. 더 나아가 개신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사실 모든 개신교의 정통 신학에서 각각의 신앙고백서는 상당 부분 루터에게 빚지고 있다. 특히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이신칭의에 대한 이해는 더욱 그렇다.

신조가 오늘날 교회에 주는 교훈

대교리 문답과 소교리 문답을 작성했던 루터는 슈말칼덴 신조에서 교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동안 루터는 종교개혁 초기부터 교회에 전해 내려온 기본적인 신앙을 교리적으로 잘 정리해 주었다. 루터의 공헌이자 그의 영향력이다. 신조는 비교적 짧게 요약된 기독교 교리이기 때문에 배우기가 쉽고,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에 대한 기준을 제공해 준다. 루터가 시작한 종교개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짓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 ‘슈말칼덴 신조’이다. 그 후 루터교회는 루터파의 신앙고백서들을 종합하여 일치신조서를 작성하였다.

필자:김현배목사<revivalk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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